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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1/18 19:18:46 |
Name | ar15Lover |
Subject | 현대사회에서 소비를 통해 만족감을 얻기 힘든 이유. |
매슬로의 욕구 5단계를 보면,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안전 욕구->애정 욕구->존경 욕구->자아실현 욕구 순서로 발전합니다. 각각의 욕구를 채워가는 과정에서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인간은 보람감, 만족감을 느끼고 자신의 삶이 의미있다고 여기게됩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전하지만, 이를 얻기 위한 '과정'을 체험할 기회를 개개인에게서 박탈해갑니다. 우리가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을때, 그 재료들을 직접 구하고 요리하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 없이, 최종 결과물만을 얻게됩니다. 물론, 그 음식을 먹는 순간에는 도파민을 통해 쾌감을 얻습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쾌감은 금방 사라지고, 보람감,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또한 쾌감에 노출될 수록 쾌감에 대한 내성이 생겨, 이전과 같은 강도의 쾌감을 얻기 위해 더 강한자극을 원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이 누려도, 보람감과 만족감은 커녕 오히려 갈증만 늘어납니다. 반면에 수렵채집인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무던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사냥감의 습성을 파악하고,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동료들과 작전을 세우고, 사냥도구들을 만들고, 육체와 정신을 100% 사용해 계획을 실행해야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칫 죽을수도 있는 위험도 감수해야합니다. 사냥이 끝난 후에도 시신을 해체하고, 요리하는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그러나 이런식으로 얻은 음식은 인간에게 크나큰 만족감, 보람감을 줍니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고, 우울증을 겪다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동시기 미국의 원주민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지 않았고, 우울증을 겪다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크나큰 만족감을 누리고 있는데, 삶의 의미에 대해 왜 고뇌하나요? 이렇게나 재밌는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왜 자살을 하나요? 이에 대해서는 우리도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을 돈을 벌기위해 노동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현대인들이 하는 노동은, 대부분 윗선의 지시에 따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하찮은 일을 장시간 반복하는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수렵채집인들은 사냥의 과정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었음에 반해, 현대의 노동자들은 노동 과정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통제는 윗선에서 하는거니까요. 중간과정의 결핍은 새로운 수요를 낳았고, 이를 노려 시장에는 중간과정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상품들이 나오죠. 상업화된 관광상품, 아웃도어 스포츠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저 과정은 말 그대로 유사품일 뿐이지 진짜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했을 때, 당신은 그랜드 캐니언을 개척한게 아닙니다. 이미 수십만명이 다녀간 상품화된 코스를 따라갔을 뿐이죠. 사람들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는, 게임이 현대인에게 결핍된 '모험'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시뮬레이션, 즉 유사품에 불과하고 결코 과거의 모험가들이 느꼈을, 예를들어 6만 5천년전 최초로 호주 대륙에 발을 디딘 호주 원주민들의 조상이 느꼈을,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현대의 고도로 산업화-기술화된 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만족감, 보람감을 느끼기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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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화성으로 간다고 해도 저 문제가 해결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척은 인공지능이 다 하고, 인간은 그냥 보조적인 역할만 하게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아아...제가 이래서 가락시장에 장바구니를 들고 입성 할 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거군요... 오늘의 꿀가격 과일은 무엇일까? 오늘은 좋은 가격에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구할 수 있을까.두근둑은
설령 시간적 여유를 두고 직접 음식을 요리한다고 해도, 그 재료는 직접 구한 것이 아니라 수퍼마켓에서 구매한 것이겠죠. 또한 직접 요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는 투쟁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컴퓨터 게임이 진정한 만족감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요리 역시 진정한 만족감을 줄 수 없습니다. 현대사회의 탬포가 빠르다는 점도 동의합니다. 사실 경제성장이 최고의 가치가 된 현대사회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상품이 등장하는건 당연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소심하고 심약한 성격이든 거칠고 상남자
스러운 성격이든 모든인간은 필수적으로 투쟁심에서
자기 삶을 관철하고 나아갈수있는데 현대사회는
온실속의 화초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구르듯이 사는게 미덕이고 그게 맞다고 사회 자체가 그렇게 유도하고 강요하죠. 사회가 정한 그 선을 넘기고서 규율을
부수며 몸소 실천해야 비로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텐데 이걸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네요
스러운 성격이든 모든인간은 필수적으로 투쟁심에서
자기 삶을 관철하고 나아갈수있는데 현대사회는
온실속의 화초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구르듯이 사는게 미덕이고 그게 맞다고 사회 자체가 그렇게 유도하고 강요하죠. 사회가 정한 그 선을 넘기고서 규율을
부수며 몸소 실천해야 비로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텐데 이걸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네요
글의 대주제가 "현대문명, 혹은 국가의 시스템이 어떻게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제약하는가"라고 한다면, 먼저 이전에 올려주신 유나바머 관련글에서도 적었지만 저는 문명사회의 시스템은 인간을 통제하고, 자연은 그렇지 않다라는 식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이 글이 그런 의도를 갖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제가 말한바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수렵 채집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현대인들보다 더 능동적인, 따라서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시로 드신 그랜드 캐니언 방문과 비교해볼까요?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더 보기
예시로 드신 그랜드 캐니언 방문과 비교해볼까요?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더 보기
글의 대주제가 "현대문명, 혹은 국가의 시스템이 어떻게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제약하는가"라고 한다면, 먼저 이전에 올려주신 유나바머 관련글에서도 적었지만 저는 문명사회의 시스템은 인간을 통제하고, 자연은 그렇지 않다라는 식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이 글이 그런 의도를 갖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제가 말한바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수렵 채집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현대인들보다 더 능동적인, 따라서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시로 드신 그랜드 캐니언 방문과 비교해볼까요?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분명 정해진 코스에서 벗어나 그랜드케니언의 구석구석을 체험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죠. 법으로 금지구역을 설정해놓았으니까요. 그게 관광객들의 안전과 그랜드 캐니언의 환경 및 경관 보호라는 합당한 이유에서 존재한다고 스스로 납득할지라도 불만족스러울 수는 있겠죠. 그런데 수렵활동은 다른가요? 더 빠르게, 더 많은, 그리고 더 맛좋고 영양가있는 사냥감을 잡고 싶어도 여러 가지 자연적 제약(시간, 신체능력, 사냥의 난이도 등등)에 의해 제한받을테고 그에 대해 불만족을 느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족감의 요소 중에서 능동성과 수동성, 제약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다분히 자의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현대인들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행위의 만족감은 그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관심과 집중에 비례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희소할수록, 혹은 절실할수록 행위에 대한 나의 집중은 높아지고, 그것이 완료 혹은 성취되었을때의 만족감도 커지겠죠. 그러나 글의 주장처럼 어떤 "진정한 만족감"이라는게 존재하며 현대인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일상에서 그런 진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스포츠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다리로 뛰는 사람과 같은 만족감을 느낄 수 없을까요? 확실히 전자가 느끼는 속도감은 엔지니어와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니 그걸로 자기 발로 뛸 때의 만족을 느끼기란 힘들죠. 둘은 엄연히 다른 행위니까요. 그런데 전자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가짜고, 후자만이 진정한 만족감인가요?
또한 "과정의 결핍"을 말하고자 한다면 현대사회의 소비형태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을 넘어서 적어도 통 속의 뇌, 혹은 매트릭스 수준의 논의를 끌어와야 한다고 봅니다. 전자와 후자가 같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사냥이나 채집에서 도구를 사용하는것과 전화로 먹거리를 주문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예시로 드신 그랜드 캐니언 방문과 비교해볼까요?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분명 정해진 코스에서 벗어나 그랜드케니언의 구석구석을 체험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죠. 법으로 금지구역을 설정해놓았으니까요. 그게 관광객들의 안전과 그랜드 캐니언의 환경 및 경관 보호라는 합당한 이유에서 존재한다고 스스로 납득할지라도 불만족스러울 수는 있겠죠. 그런데 수렵활동은 다른가요? 더 빠르게, 더 많은, 그리고 더 맛좋고 영양가있는 사냥감을 잡고 싶어도 여러 가지 자연적 제약(시간, 신체능력, 사냥의 난이도 등등)에 의해 제한받을테고 그에 대해 불만족을 느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족감의 요소 중에서 능동성과 수동성, 제약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다분히 자의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현대인들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행위의 만족감은 그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관심과 집중에 비례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희소할수록, 혹은 절실할수록 행위에 대한 나의 집중은 높아지고, 그것이 완료 혹은 성취되었을때의 만족감도 커지겠죠. 그러나 글의 주장처럼 어떤 "진정한 만족감"이라는게 존재하며 현대인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일상에서 그런 진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스포츠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다리로 뛰는 사람과 같은 만족감을 느낄 수 없을까요? 확실히 전자가 느끼는 속도감은 엔지니어와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니 그걸로 자기 발로 뛸 때의 만족을 느끼기란 힘들죠. 둘은 엄연히 다른 행위니까요. 그런데 전자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가짜고, 후자만이 진정한 만족감인가요?
또한 "과정의 결핍"을 말하고자 한다면 현대사회의 소비형태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을 넘어서 적어도 통 속의 뇌, 혹은 매트릭스 수준의 논의를 끌어와야 한다고 봅니다. 전자와 후자가 같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사냥이나 채집에서 도구를 사용하는것과 전화로 먹거리를 주문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1. 수렵채집사회에서도 여전히 자연으로부터의 제약이 있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바로 그 자연의 제약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자연으로부터의 제약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즉시 얻을 수 있는 인간은, 끝없는 쾌락에 탐닉하는 미치광이로 타락하고 맙니다. 이미 인간의 역사 속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었던 귀족, 황제들이 어떤식으로 타락했는지, 현대의 특권층의 자녀들이 어떤식으로 타락하는지 목격했습니다.
2. 대체 아우토반을 스포츠카로 질주하는 이유가 뭡니까? 수렵채... 더 보기
2. 대체 아우토반을 스포츠카로 질주하는 이유가 뭡니까? 수렵채... 더 보기
1. 수렵채집사회에서도 여전히 자연으로부터의 제약이 있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바로 그 자연의 제약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자연으로부터의 제약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즉시 얻을 수 있는 인간은, 끝없는 쾌락에 탐닉하는 미치광이로 타락하고 맙니다. 이미 인간의 역사 속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었던 귀족, 황제들이 어떤식으로 타락했는지, 현대의 특권층의 자녀들이 어떤식으로 타락하는지 목격했습니다.
2. 대체 아우토반을 스포츠카로 질주하는 이유가 뭡니까? 수렵채집인이 전력질주한다면, 그건, 뒤에서 맹수가 쫓아오고 있거나, 아니면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고,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반면에 스포츠카로 아우토반을 질주하는건 오직 '그게 재밌으니까'인데 이건 결국 일시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에 불과합니다.
스포츠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행위가 수렵채집인의 삶과 동등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고 쳐도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오직 극소수의 운좋은 사람들만 그런 행동을 즐길 수 있습니다.
둘째,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포츠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막대한 시간을 지루하고 반복적이고 수동적인 노동에 투자했을 것입니다.
셋째, 스포츠카를 만들고, 아우토반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연환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아우토반은 건설과정에서 환경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동물들의 이동을 방해합니다.
질주하는 스포츠카가 내뿜는 배기가스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기후변화를 유발하고, 소음을 일으킵니다.
반면에 수렵채집사회에서의 수렵,채집행위는 모두가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이 스포츠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해야만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을 수렵채집인들은 매일 같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렵채집인들의 수렵행위 역시 자연환경에 어느정도의 피해를 주지만, 스포츠카와 아우토반이 가하는 자연환경 파괴에 비교하면 귀여울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3. 행위의 만족감은 희소성과 절실함에 비례한다고 말씀하신 것에는 동의합니다.
수렵채집인이 사냥한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든다면, 그 옷은 대단히 희소하고, 대단히 절실하게 필요로 하기에
자신의 가죽옷에 만족할 것입니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희귀하고 고급스러운 모피옷을 가져다줘도 만족할줄 모릅니다.
4. 사냥이나 채집에서 도구를 사용하는것과 전화로 먹거리를 주문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수렵채집인들의 사냥, 채집행위는 그 자체로 목숨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반면에 현대인이 배달의 민족 앱을 이용해서 야식을 시키는건 목숨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야식을 배달받지 못하면 굶어죽습니까? 아니잖아요. 말씀하신대로, 행위의 희소성과 절실함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야식으로 주문한다 한들 여전히 만족감을 누리기 힘듭니다. 여기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면, 애초에 비만이 사회문제가 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수렵채집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외부의 도움 없이, 개인 혹은 소규모 공동체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이고, 생분해 가능한(biodegradable)한 것입니다.
반면에 스마트폰으로 야식을 주문하기 위해서는 공장, 전기망, 인터넷망과 같은 산업기반시설이 필수적이고, 이런 인프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연환경에 막대한 피해를 주게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질들은 생분해 불가능한 것들이며, 자연환경에 반영구적인 피해를 줍니다.
2. 대체 아우토반을 스포츠카로 질주하는 이유가 뭡니까? 수렵채집인이 전력질주한다면, 그건, 뒤에서 맹수가 쫓아오고 있거나, 아니면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고,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반면에 스포츠카로 아우토반을 질주하는건 오직 '그게 재밌으니까'인데 이건 결국 일시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에 불과합니다.
스포츠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행위가 수렵채집인의 삶과 동등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고 쳐도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오직 극소수의 운좋은 사람들만 그런 행동을 즐길 수 있습니다.
둘째,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포츠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막대한 시간을 지루하고 반복적이고 수동적인 노동에 투자했을 것입니다.
셋째, 스포츠카를 만들고, 아우토반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연환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아우토반은 건설과정에서 환경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동물들의 이동을 방해합니다.
질주하는 스포츠카가 내뿜는 배기가스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기후변화를 유발하고, 소음을 일으킵니다.
반면에 수렵채집사회에서의 수렵,채집행위는 모두가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이 스포츠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질주해야만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을 수렵채집인들은 매일 같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렵채집인들의 수렵행위 역시 자연환경에 어느정도의 피해를 주지만, 스포츠카와 아우토반이 가하는 자연환경 파괴에 비교하면 귀여울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3. 행위의 만족감은 희소성과 절실함에 비례한다고 말씀하신 것에는 동의합니다.
수렵채집인이 사냥한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든다면, 그 옷은 대단히 희소하고, 대단히 절실하게 필요로 하기에
자신의 가죽옷에 만족할 것입니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희귀하고 고급스러운 모피옷을 가져다줘도 만족할줄 모릅니다.
4. 사냥이나 채집에서 도구를 사용하는것과 전화로 먹거리를 주문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수렵채집인들의 사냥, 채집행위는 그 자체로 목숨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반면에 현대인이 배달의 민족 앱을 이용해서 야식을 시키는건 목숨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야식을 배달받지 못하면 굶어죽습니까? 아니잖아요. 말씀하신대로, 행위의 희소성과 절실함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야식으로 주문한다 한들 여전히 만족감을 누리기 힘듭니다. 여기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면, 애초에 비만이 사회문제가 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수렵채집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외부의 도움 없이, 개인 혹은 소규모 공동체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이고, 생분해 가능한(biodegradable)한 것입니다.
반면에 스마트폰으로 야식을 주문하기 위해서는 공장, 전기망, 인터넷망과 같은 산업기반시설이 필수적이고, 이런 인프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연환경에 막대한 피해를 주게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질들은 생분해 불가능한 것들이며, 자연환경에 반영구적인 피해를 줍니다.
근데 고대인(?) 들이 그런 삶에 만족감을 충분히 느꼈었다고 한다면
인류의 생활방식이 쭉 변화한 동력은 별도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만족감' 이 무엇인가부터 모호한 개념이지요.
짐작해보자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쾌락이나 욕망과 구분되는 불변성이 있는 만족감" 같은 느낌으로 쓰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개념은 현대인의 눈으로 과거를 보기에 말 하기가 비교적 쉬운거고
당시를 살아가던 인류의 입장은 다르죠.
당장 내 눈 앞에 내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고, 먹을게 없어 죽어가고
자다가 맹수의 습격을... 더 보기
인류의 생활방식이 쭉 변화한 동력은 별도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만족감' 이 무엇인가부터 모호한 개념이지요.
짐작해보자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쾌락이나 욕망과 구분되는 불변성이 있는 만족감" 같은 느낌으로 쓰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개념은 현대인의 눈으로 과거를 보기에 말 하기가 비교적 쉬운거고
당시를 살아가던 인류의 입장은 다르죠.
당장 내 눈 앞에 내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고, 먹을게 없어 죽어가고
자다가 맹수의 습격을... 더 보기
근데 고대인(?) 들이 그런 삶에 만족감을 충분히 느꼈었다고 한다면
인류의 생활방식이 쭉 변화한 동력은 별도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만족감' 이 무엇인가부터 모호한 개념이지요.
짐작해보자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쾌락이나 욕망과 구분되는 불변성이 있는 만족감" 같은 느낌으로 쓰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개념은 현대인의 눈으로 과거를 보기에 말 하기가 비교적 쉬운거고
당시를 살아가던 인류의 입장은 다르죠.
당장 내 눈 앞에 내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고, 먹을게 없어 죽어가고
자다가 맹수의 습격을 받고, 비가 내렸더니 집이 무너지는데
흔히 말하는 '고차원적 만족' 에 대해 자각하긴 어려웠을겁니다.
당장 대한민국 역사만 봐도 '먹고사니즘' 이 해결된 이후에야 추가적인 욕구들이 표면화 된 것을 봐도 알 수 있지요.
물론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른 바 '선지자' 라 불리는 사람들이
생존이나 의식주에 우선한 어떤 가치를 추구한 경우가 존재하긴 합니다.
예전엔 이런 '초월적 가치추구' 에서 얻어지는 만족이야 말로 진정한 만족이라는 주장을 접한 적도 있네요.
비슷한 방향의 취향을 갖고있음에도
말씀하시는 주장에 쓰인 단어들이나 개념들, 그리고 A->B라는 논리연결은
충분한 근거를 갖추거나, 합의가 되지 않은 자의적 정의와 가설로 보입니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덕질엔 덕질에 어울리는 문법이 있으니까(끄덕)
인류의 생활방식이 쭉 변화한 동력은 별도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만족감' 이 무엇인가부터 모호한 개념이지요.
짐작해보자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쾌락이나 욕망과 구분되는 불변성이 있는 만족감" 같은 느낌으로 쓰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개념은 현대인의 눈으로 과거를 보기에 말 하기가 비교적 쉬운거고
당시를 살아가던 인류의 입장은 다르죠.
당장 내 눈 앞에 내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고, 먹을게 없어 죽어가고
자다가 맹수의 습격을 받고, 비가 내렸더니 집이 무너지는데
흔히 말하는 '고차원적 만족' 에 대해 자각하긴 어려웠을겁니다.
당장 대한민국 역사만 봐도 '먹고사니즘' 이 해결된 이후에야 추가적인 욕구들이 표면화 된 것을 봐도 알 수 있지요.
물론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른 바 '선지자' 라 불리는 사람들이
생존이나 의식주에 우선한 어떤 가치를 추구한 경우가 존재하긴 합니다.
예전엔 이런 '초월적 가치추구' 에서 얻어지는 만족이야 말로 진정한 만족이라는 주장을 접한 적도 있네요.
비슷한 방향의 취향을 갖고있음에도
말씀하시는 주장에 쓰인 단어들이나 개념들, 그리고 A->B라는 논리연결은
충분한 근거를 갖추거나, 합의가 되지 않은 자의적 정의와 가설로 보입니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덕질엔 덕질에 어울리는 문법이 있으니까(끄덕)
"당장 내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고": 대부분의 수렵채집인들은 생후 몇년이 지나기 전엔 영혼이나 의식이 깃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인들이 낙태를 죽음으로 여기지 않듯이, 수렵채집인들은 영아의 사망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먹을게 없어 죽어가고": 수렵채집인들이 못먹고 못살았다는건 대표적인 편견이죠. 연구가 진행이 되면 될수록 수렵채집인들은 잘먹었고, 신장 역시 현대인과 비슷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죠. 오히려 농업을 시작한 후로 영양 불균형에 시달리고, 기근에 취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다가 맹수의 ... 더 보기
"먹을게 없어 죽어가고": 수렵채집인들이 못먹고 못살았다는건 대표적인 편견이죠. 연구가 진행이 되면 될수록 수렵채집인들은 잘먹었고, 신장 역시 현대인과 비슷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죠. 오히려 농업을 시작한 후로 영양 불균형에 시달리고, 기근에 취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다가 맹수의 ... 더 보기
"당장 내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고": 대부분의 수렵채집인들은 생후 몇년이 지나기 전엔 영혼이나 의식이 깃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인들이 낙태를 죽음으로 여기지 않듯이, 수렵채집인들은 영아의 사망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먹을게 없어 죽어가고": 수렵채집인들이 못먹고 못살았다는건 대표적인 편견이죠. 연구가 진행이 되면 될수록 수렵채집인들은 잘먹었고, 신장 역시 현대인과 비슷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죠. 오히려 농업을 시작한 후로 영양 불균형에 시달리고, 기근에 취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다가 맹수의 습격을 받고": 맹수가 습격한다면 횃불로 위협해 도망가게 하는 식으로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핵전쟁의 위협, 기후변화 등의 위협에 완벽하게 무력합니다. 또한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입는 외상은 맹수의 습격 못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인들의 경우 최소한의 자기방어행위조차도 법률을 통해 규제당하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니 집이 무너진다": 집이 무너지면 다시 지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최소한 그들은 자기 손으로 어떻게 거처를 마련할지 알고 있었죠. 반면에 현대인들은 주택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시장경제와 정부의 결정에 의존해야 합니다.
옛날엔 '고차원적 만족'에 대한 자각이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현대인이야 말로 말초신경의 값싼 쾌감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노자, 공자 같은 인물들은 스마트폰, 인터넷, 유튜브 없이도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올랐고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청동기로 민주정을 세웠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신석기 수준의 기술로 민주적 연방정부를 세웠습니다. 기원전 1만 7천년경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벽화는 피카소가 이것에 비하면 자신의 작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높은 수준입니다.
제가하고 있는 이런 이야기는 이미 사무엘 버틀러, 자크 엘륄, 데이비드 스커비나 같은 철학자들이 다룬 바 있고,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죠. 저야 훈련된 철학자가 아니다보니 논지를 엄밀하게 전개시키는 능력이 부족하긴 한데, 뜬금없는 소리를 지어내서 하고 있는건 아닙니다.
"먹을게 없어 죽어가고": 수렵채집인들이 못먹고 못살았다는건 대표적인 편견이죠. 연구가 진행이 되면 될수록 수렵채집인들은 잘먹었고, 신장 역시 현대인과 비슷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죠. 오히려 농업을 시작한 후로 영양 불균형에 시달리고, 기근에 취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다가 맹수의 습격을 받고": 맹수가 습격한다면 횃불로 위협해 도망가게 하는 식으로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핵전쟁의 위협, 기후변화 등의 위협에 완벽하게 무력합니다. 또한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입는 외상은 맹수의 습격 못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인들의 경우 최소한의 자기방어행위조차도 법률을 통해 규제당하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니 집이 무너진다": 집이 무너지면 다시 지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최소한 그들은 자기 손으로 어떻게 거처를 마련할지 알고 있었죠. 반면에 현대인들은 주택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시장경제와 정부의 결정에 의존해야 합니다.
옛날엔 '고차원적 만족'에 대한 자각이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현대인이야 말로 말초신경의 값싼 쾌감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노자, 공자 같은 인물들은 스마트폰, 인터넷, 유튜브 없이도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올랐고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청동기로 민주정을 세웠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신석기 수준의 기술로 민주적 연방정부를 세웠습니다. 기원전 1만 7천년경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벽화는 피카소가 이것에 비하면 자신의 작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높은 수준입니다.
제가하고 있는 이런 이야기는 이미 사무엘 버틀러, 자크 엘륄, 데이비드 스커비나 같은 철학자들이 다룬 바 있고,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죠. 저야 훈련된 철학자가 아니다보니 논지를 엄밀하게 전개시키는 능력이 부족하긴 한데, 뜬금없는 소리를 지어내서 하고 있는건 아닙니다.
사실 지금 리플에 달아주신 내용도
"그렇다고 하니 그런갑다 근데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 는 느낌이긴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뜬금없는 소리를 지어내서 하시는건 아니고,
쓰니님(?) 내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되어있을거라 생각해요.
단지,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깜놀하긴 하죠.
'이게 이렇게 강하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인가?' 싶은 그런 느낌.
그런 괴리를 해소하는 것이, 논지를 엄밀하게 전개시키는(혹은 설득력 있게 풀어가는) 능력 아닌가 싶읍니다.
여튼, 뭔가 엄근진하게 주장할 수 있는 ... 더 보기
"그렇다고 하니 그런갑다 근데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 는 느낌이긴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뜬금없는 소리를 지어내서 하시는건 아니고,
쓰니님(?) 내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되어있을거라 생각해요.
단지,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깜놀하긴 하죠.
'이게 이렇게 강하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인가?' 싶은 그런 느낌.
그런 괴리를 해소하는 것이, 논지를 엄밀하게 전개시키는(혹은 설득력 있게 풀어가는) 능력 아닌가 싶읍니다.
여튼, 뭔가 엄근진하게 주장할 수 있는 ... 더 보기
사실 지금 리플에 달아주신 내용도
"그렇다고 하니 그런갑다 근데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 는 느낌이긴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뜬금없는 소리를 지어내서 하시는건 아니고,
쓰니님(?) 내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되어있을거라 생각해요.
단지,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깜놀하긴 하죠.
'이게 이렇게 강하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인가?' 싶은 그런 느낌.
그런 괴리를 해소하는 것이, 논지를 엄밀하게 전개시키는(혹은 설득력 있게 풀어가는) 능력 아닌가 싶읍니다.
여튼, 뭔가 엄근진하게 주장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하니 반갑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철학자들이 다룬 바 있는 정도가 아닌, ㅇㄱㄹㅇ ㅂㅂㅂㄱ 정도의 정설 수준이라면
살며 어디선가는 마주할 수 있겠죠.
그럼 아디오스
"그렇다고 하니 그런갑다 근데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 는 느낌이긴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뜬금없는 소리를 지어내서 하시는건 아니고,
쓰니님(?) 내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되어있을거라 생각해요.
단지,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깜놀하긴 하죠.
'이게 이렇게 강하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인가?' 싶은 그런 느낌.
그런 괴리를 해소하는 것이, 논지를 엄밀하게 전개시키는(혹은 설득력 있게 풀어가는) 능력 아닌가 싶읍니다.
여튼, 뭔가 엄근진하게 주장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하니 반갑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철학자들이 다룬 바 있는 정도가 아닌, ㅇㄱㄹㅇ ㅂㅂㅂㄱ 정도의 정설 수준이라면
살며 어디선가는 마주할 수 있겠죠.
그럼 아디오스
1. 글의 궁극적인 목적이 현대사회의 쾌락 추구가 같는 문제점을 비판하고, 수렵채집사회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긍정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것임은 이해했습니다. 수렵채집사회의 삶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보고 계시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받아들이겠습니다.
2. [자연으로부터의 제약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즉시 얻을 수 있는 인간은, 끝없는 쾌락에 탐닉하는 미치광이로 타락하고 맙니다.] 현대를 엄청난 데카당스의 사회로 묘사하시네요. 어떤 확실... 더 보기
2. [자연으로부터의 제약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즉시 얻을 수 있는 인간은, 끝없는 쾌락에 탐닉하는 미치광이로 타락하고 맙니다.] 현대를 엄청난 데카당스의 사회로 묘사하시네요. 어떤 확실... 더 보기
1. 글의 궁극적인 목적이 현대사회의 쾌락 추구가 같는 문제점을 비판하고, 수렵채집사회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긍정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것임은 이해했습니다. 수렵채집사회의 삶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보고 계시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받아들이겠습니다.
2. [자연으로부터의 제약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즉시 얻을 수 있는 인간은, 끝없는 쾌락에 탐닉하는 미치광이로 타락하고 맙니다.] 현대를 엄청난 데카당스의 사회로 묘사하시네요. 어떤 확실한 논거 없이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당연한 것처럼 제시하시는데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표출할 거라면 "급진적이지만 이게 사실이다"라는 말보다는 좀 더 탄탄한 논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건 저를 포함해서 많은 현대인들이 어떠한 제약도 없이 쾌락을 무제한적으로 제공받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그게 자연적 제약 때문이든, 아니면 사회적 제약 때문이건 간에요. 뭐 지구의 어느 누군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죠.
3, 마찬가지로, 무슨 근거로 현대인들의 노동을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수동적이라고 규정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리봐도 이렇게 간단하게 던져질 수 있는 내용의 주장은 도저히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자신의 일에 보람과 사명감을 갖고 종사하는 현대인들은 별종인가요? 적어도 그냥 "할말 없음" 정도로 넘어가도 될 정도의 소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 정도 수준의 일반화를 이토록 거침없이 제시할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을 알고 싶습니다. 논문 수준의 정밀함을 바라는 건 터무니없는 욕심이지만 논쟁적인 주장에 대해 좀더 엄중함을 요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4. 만족감에 대한 얘기로 돌아와서 [모험과 투쟁이 결여된 활동은 진정한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걸 전제로 하고 계신것 같네요. 그리고 그에 부합되지 않는 소비를 기반으로 한 활동은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것이구요. 보다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경험이 더 많은 성취감을 줄 수 있고, 이것이 더 큰 만족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논리대로라면 어디까지가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체험의 마지노선일까요?
가령 짜장면을 먹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김씨 표류기"마냥 직접 밀농사를 짖고, 오이를 재배해서 면을 뽑아야만 할까요? 아니면 그조차도 짜장스프는 기성제품을 사용했으므로 탈락인가요? 행위의 만족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절실함과 몰입의 기준이 그렇게 빡빡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짜장면을 만족스럽게 먹기 위한 조건은 [배고프다]와 [짜장면이 땡긴다] 정도면 됩니다. 그정도의 조건도 충족 못하는 상황에서 짜장면 먹어봐야 만족스럽지 못한거야 당연하죠. 근데 직접 수렵채집을 해서 음식을 내 입속에 집어넣는게 아니라고 해서 내가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즐거움이 거짓이라거나 무가치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5. 현대사회의 많은 활동이 자연환경 파괴를 수반한다는 지적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겠죠. 마약과 같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쾌락 추구가 잘못되었다는 것 또한 명백하구요. 그와는 별개로 저는 현대문명이 환경파괴나 여타 여러 문제를 초래하기에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는 식의 주장은 헛소리로 들립니다.(ar15Lover님이 그런 얘기를 하고 계시다는건 아닙니다) 결국 환경파괴와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길도 문명의 발전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지만 이건 오프 토픽이니 넘어가죠.
말씀하시는 주장과, 그 주장과 연계되는 과도한 일반화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생각해볼만한 논쟁적인 주제를 제시해주시는 것에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자연으로부터의 제약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즉시 얻을 수 있는 인간은, 끝없는 쾌락에 탐닉하는 미치광이로 타락하고 맙니다.] 현대를 엄청난 데카당스의 사회로 묘사하시네요. 어떤 확실한 논거 없이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당연한 것처럼 제시하시는데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표출할 거라면 "급진적이지만 이게 사실이다"라는 말보다는 좀 더 탄탄한 논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건 저를 포함해서 많은 현대인들이 어떠한 제약도 없이 쾌락을 무제한적으로 제공받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그게 자연적 제약 때문이든, 아니면 사회적 제약 때문이건 간에요. 뭐 지구의 어느 누군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죠.
3, 마찬가지로, 무슨 근거로 현대인들의 노동을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수동적이라고 규정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리봐도 이렇게 간단하게 던져질 수 있는 내용의 주장은 도저히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자신의 일에 보람과 사명감을 갖고 종사하는 현대인들은 별종인가요? 적어도 그냥 "할말 없음" 정도로 넘어가도 될 정도의 소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 정도 수준의 일반화를 이토록 거침없이 제시할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을 알고 싶습니다. 논문 수준의 정밀함을 바라는 건 터무니없는 욕심이지만 논쟁적인 주장에 대해 좀더 엄중함을 요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4. 만족감에 대한 얘기로 돌아와서 [모험과 투쟁이 결여된 활동은 진정한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걸 전제로 하고 계신것 같네요. 그리고 그에 부합되지 않는 소비를 기반으로 한 활동은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것이구요. 보다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경험이 더 많은 성취감을 줄 수 있고, 이것이 더 큰 만족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논리대로라면 어디까지가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체험의 마지노선일까요?
가령 짜장면을 먹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김씨 표류기"마냥 직접 밀농사를 짖고, 오이를 재배해서 면을 뽑아야만 할까요? 아니면 그조차도 짜장스프는 기성제품을 사용했으므로 탈락인가요? 행위의 만족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절실함과 몰입의 기준이 그렇게 빡빡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짜장면을 만족스럽게 먹기 위한 조건은 [배고프다]와 [짜장면이 땡긴다] 정도면 됩니다. 그정도의 조건도 충족 못하는 상황에서 짜장면 먹어봐야 만족스럽지 못한거야 당연하죠. 근데 직접 수렵채집을 해서 음식을 내 입속에 집어넣는게 아니라고 해서 내가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즐거움이 거짓이라거나 무가치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5. 현대사회의 많은 활동이 자연환경 파괴를 수반한다는 지적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겠죠. 마약과 같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쾌락 추구가 잘못되었다는 것 또한 명백하구요. 그와는 별개로 저는 현대문명이 환경파괴나 여타 여러 문제를 초래하기에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는 식의 주장은 헛소리로 들립니다.(ar15Lover님이 그런 얘기를 하고 계시다는건 아닙니다) 결국 환경파괴와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길도 문명의 발전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지만 이건 오프 토픽이니 넘어가죠.
말씀하시는 주장과, 그 주장과 연계되는 과도한 일반화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생각해볼만한 논쟁적인 주제를 제시해주시는 것에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 네 수렵채집사회에서도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고, 그들의 삶은 고달펐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우리의 조상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에 직결된 중요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대기업과 국가의 지시에 의존해야합니다. 반면에 수렵채집인들은 자신의 삶과 관련된 문제들을 직접 해결할 수 있었고,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이 부분은, 자연으로부터의 제약이야 말로 인간을 ... 더 보기
2. 이 부분은, 자연으로부터의 제약이야 말로 인간을 ... 더 보기
1. 네 수렵채집사회에서도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고, 그들의 삶은 고달펐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우리의 조상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에 직결된 중요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대기업과 국가의 지시에 의존해야합니다. 반면에 수렵채집인들은 자신의 삶과 관련된 문제들을 직접 해결할 수 있었고,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이 부분은, 자연으로부터의 제약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말이었습니다. 물론 현대인들 대다수는 여전히 쾌락을 무한대로 제공받으며 살고 있지 않습니다만, “현대사회 덕분에 우리가 자연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지 않았느냐?”식의 주장의 이면에는 안전하고, 물질적 풍요만 제공되면 그만이라는 전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연으로부터 압제를 당하고 살지 않았느냐는 반론에 대해서는, 저는 그게 ‘자연으로부터의 압제’라는 개념 자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자연으로부터의 압제’ 덕분에 우리의 삶에 모험이 있고 투쟁이 있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삼성전자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고 일하는 엔지니어가 있다고 칩시다. 이 엔지니어는 분명 과거 수렵채집인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많은 물질적 풍요, 오락을 누리며 살고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삼성전자라는 거대한 기계장치의 부품일 뿐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듭니다. 게다가 그의 일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입니다. 그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대체할 사람은 널려있습니다. 물론, 맥도날드에서 하루종일 패티를 튀기면서 자신의 삶이 보람차고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기야 하겠습니다마는, 전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할말 없습니다. 옛날 미국 흑인 노예들 중에서도 “아니 노예 생활 나쁘지 않은데 해방 그런거 뭐가 필요함?”이러면서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 사람들 중에서도 북한 체제가 나쁘지 않으며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반면에 수렵채집사회의 사냥꾼이 하는 사냥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냥을 성공하냐 실패하냐 여부에 본인의 목숨 뿐만 아니라 부족 전체의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이 사냥꾼에게 많은 이들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냥꾼은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존경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짜장면 재료를 직접 재배해서 요리해 먹는다면, 아마 그 짜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일 것입니다. 텃밭을 가꾸는 과정에서 성취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체력도 좋아지고, 칼로리 소모가 많아지니 살이 찔 일도 없겠죠. “그럼 짜장면을 배달시켜먹지 말라는 말이냐?!” 아뇨, 짜장면 배달 시키십시오. 저도 배달음식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먹은 짜장면이 정말로 만족감을 주나요? 그게 만족감을 줄수 있다면 왜 비만이 사회문제가 되고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비만인들이 그토록 많은거죠? 전 짜장면을 무조건 직접 재배해서 만들어 먹어야한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라, 현대사회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부분을 박탈해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저는 자연환경의 파괴가 곧 인간성의 파괴라고 봅니다. 지난 280만년동안 인류는 자연의 일부로서 진화해왔습니다. 산업혁명이 불과 250년전 일인데, 찰나의 순간에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째서인지 스스로가 자연환경으로부터 벗어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듯하는데, 저는 이런 생각은 근거없는 오만함이라고 봅니다.
제 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정성어린 반론을 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 이 부분은, 자연으로부터의 제약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말이었습니다. 물론 현대인들 대다수는 여전히 쾌락을 무한대로 제공받으며 살고 있지 않습니다만, “현대사회 덕분에 우리가 자연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지 않았느냐?”식의 주장의 이면에는 안전하고, 물질적 풍요만 제공되면 그만이라는 전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연으로부터 압제를 당하고 살지 않았느냐는 반론에 대해서는, 저는 그게 ‘자연으로부터의 압제’라는 개념 자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자연으로부터의 압제’ 덕분에 우리의 삶에 모험이 있고 투쟁이 있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삼성전자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고 일하는 엔지니어가 있다고 칩시다. 이 엔지니어는 분명 과거 수렵채집인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많은 물질적 풍요, 오락을 누리며 살고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삼성전자라는 거대한 기계장치의 부품일 뿐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듭니다. 게다가 그의 일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입니다. 그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대체할 사람은 널려있습니다. 물론, 맥도날드에서 하루종일 패티를 튀기면서 자신의 삶이 보람차고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기야 하겠습니다마는, 전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할말 없습니다. 옛날 미국 흑인 노예들 중에서도 “아니 노예 생활 나쁘지 않은데 해방 그런거 뭐가 필요함?”이러면서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 사람들 중에서도 북한 체제가 나쁘지 않으며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반면에 수렵채집사회의 사냥꾼이 하는 사냥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냥을 성공하냐 실패하냐 여부에 본인의 목숨 뿐만 아니라 부족 전체의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이 사냥꾼에게 많은 이들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냥꾼은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존경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짜장면 재료를 직접 재배해서 요리해 먹는다면, 아마 그 짜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일 것입니다. 텃밭을 가꾸는 과정에서 성취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체력도 좋아지고, 칼로리 소모가 많아지니 살이 찔 일도 없겠죠. “그럼 짜장면을 배달시켜먹지 말라는 말이냐?!” 아뇨, 짜장면 배달 시키십시오. 저도 배달음식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먹은 짜장면이 정말로 만족감을 주나요? 그게 만족감을 줄수 있다면 왜 비만이 사회문제가 되고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비만인들이 그토록 많은거죠? 전 짜장면을 무조건 직접 재배해서 만들어 먹어야한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라, 현대사회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부분을 박탈해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저는 자연환경의 파괴가 곧 인간성의 파괴라고 봅니다. 지난 280만년동안 인류는 자연의 일부로서 진화해왔습니다. 산업혁명이 불과 250년전 일인데, 찰나의 순간에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째서인지 스스로가 자연환경으로부터 벗어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듯하는데, 저는 이런 생각은 근거없는 오만함이라고 봅니다.
제 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정성어린 반론을 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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