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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22 16:24:54 |
Name | 절름발이이리 |
Subject | 자격은 없다. |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내가 a를 하면 그 대가로 b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류의 생각을 하곤 합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 유아주의적 발상입니다. (인권 같은 디폴트는 논외입니다) 유아주의는 이 세상이 나에 대한 반응이라고 여기는 식의 사고 방식입니다. 근데 다들 아시겠지만 아니죠. 보통은 사춘기에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비뚤어졌다가 으른이 되면서 대충 털털해집니다..면 좋겠지만 공부하고 자기계발하는 고통이 커서 스스로를 속였는지, 그게 안쓰러워 응원하는 엄마에 속았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아동기의 무리한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히 있습니다. 발현하는 형태는 다양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하고 열심히 능력을 갖추면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어야 하고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잘해줬으면 상대도 내게 잘 해줘야하고, 인사 했으면 상대도 내게 해야하고 배우자 얼굴도 바뀌어야 하고 어렵게 들어간 직책이면 대우를 받아야 하고 등등등.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엔 그런 마땅한 결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물론 경향성이야 있지만, 하필 내가 그에 해당한다는 보장과 마땅히 그렇게 만들어야 할 당위가 없지요. 세상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 대부분은 그럴 만한 상황, 수요와 공급에 의해 형성되는 것일 뿐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니까요. 내 노력은 함수에 때려밖은 하나의 인풋일 뿐이고(물론 할 수 있는게 그거 뿐이니 노오력 해야합니다), 그게 다른 변인과 상황(짝사랑상대건, 연인이건, 회사이건, 시장이건, 세상이건)에게 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거지요. 김세영의 어떤 도박만화에 보면 "나에게 안주는 여자"보다 훨씬 더 미운게 "나에게만 안주는 여자"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여자 생각은 1도 고려 안한다는 면에서 이 심리가 얼마나 지좋을대로의 심리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겠습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에게만 안주는 여자나 나에게만 안주는 남자나 나에게만 안주는 짐승등에게 빡칠 수 있죠. 하지만 내가 빡쳤으니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유아주의적 발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빡치는 것 따위 이 세상에서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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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손님은 왕 드립, 세금 드립, 팬에 대한 의무 드립 이런 거 안 좋아합니다 ㅎ
뭐 근데 저런 게 거슬리는 것도 내 심보일 뿐이고 소란과 노성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기도 하죠.
결국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인생은 원래 고苦이고 부조리하고 가역성 따윈 없다능..
그걸 못 받아들이면 이제 개돼지 어쩌구 국민 평균 5등급 뭐 이런 헷소리나 하게 되는 거고.
관련해선 아래 글이 좋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https://pgr21.com/freedom/81456
뭐 근데 저런 게 거슬리는 것도 내 심보일 뿐이고 소란과 노성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기도 하죠.
결국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인생은 원래 고苦이고 부조리하고 가역성 따윈 없다능..
그걸 못 받아들이면 이제 개돼지 어쩌구 국민 평균 5등급 뭐 이런 헷소리나 하게 되는 거고.
관련해선 아래 글이 좋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https://pgr21.com/freedom/81456
인국공 사태에 대한 코멘트라고 생각해 연결지어 보면,
개인 차원에서야 유아적인 발상이지만 정부는 다르죠. 완전히 의무와 권리로 묶이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인 ‘기대’ 라는 게 있죠. 간단히 보면 만약 올해까지 대입 수능에서 EBS를 70% 반영하다가 내년부터 갑자기 0%로 줄인다고 해보죠. 그럼 그동안 준비한 수험생들은 ‘아 맞아 내가 기대했던 수능이 꼭 EBS 70이라는 ‘의무’는 없었지’ 하면서 순순히 바뀐 대입 제도를 순응해야만 하나요? 물론 이 글처럼 바뀐 제도에서 빠르게 변신하는 수험생이 대입의 승자가 되겠죠.
하... 더 보기
개인 차원에서야 유아적인 발상이지만 정부는 다르죠. 완전히 의무와 권리로 묶이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인 ‘기대’ 라는 게 있죠. 간단히 보면 만약 올해까지 대입 수능에서 EBS를 70% 반영하다가 내년부터 갑자기 0%로 줄인다고 해보죠. 그럼 그동안 준비한 수험생들은 ‘아 맞아 내가 기대했던 수능이 꼭 EBS 70이라는 ‘의무’는 없었지’ 하면서 순순히 바뀐 대입 제도를 순응해야만 하나요? 물론 이 글처럼 바뀐 제도에서 빠르게 변신하는 수험생이 대입의 승자가 되겠죠.
하... 더 보기
인국공 사태에 대한 코멘트라고 생각해 연결지어 보면,
개인 차원에서야 유아적인 발상이지만 정부는 다르죠. 완전히 의무와 권리로 묶이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인 ‘기대’ 라는 게 있죠. 간단히 보면 만약 올해까지 대입 수능에서 EBS를 70% 반영하다가 내년부터 갑자기 0%로 줄인다고 해보죠. 그럼 그동안 준비한 수험생들은 ‘아 맞아 내가 기대했던 수능이 꼭 EBS 70이라는 ‘의무’는 없었지’ 하면서 순순히 바뀐 대입 제도를 순응해야만 하나요? 물론 이 글처럼 바뀐 제도에서 빠르게 변신하는 수험생이 대입의 승자가 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도 변경에 대한 책임에서 정부가 자유로울 수는 없죠. 결국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순간에 왜곡한 거고 그렇게 된 결과에 대한 혼란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죠.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즉 자원 배분의 결정자로서 정부의 힘은 더 강해질 테고요. 저도 주변에 만약 그런 수험생이나 취준생이 있다면 빠르게 메타에 적응하라고 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급격한 변화에 대한 책임이란 게 면죄된다고 보지는 않아요.
이런 현상이 반복될수록 결국 사회적 자원의 낭비인 거고 그래서 인센티브가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예기간을 두거나 다시 전체 대상으로 채용을 다시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들일 시간을 주는 게 낫죠. 원래 부조리한 거라는 일반론보다 부조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시간이라는 변수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개인 차원에서야 유아적인 발상이지만 정부는 다르죠. 완전히 의무와 권리로 묶이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인 ‘기대’ 라는 게 있죠. 간단히 보면 만약 올해까지 대입 수능에서 EBS를 70% 반영하다가 내년부터 갑자기 0%로 줄인다고 해보죠. 그럼 그동안 준비한 수험생들은 ‘아 맞아 내가 기대했던 수능이 꼭 EBS 70이라는 ‘의무’는 없었지’ 하면서 순순히 바뀐 대입 제도를 순응해야만 하나요? 물론 이 글처럼 바뀐 제도에서 빠르게 변신하는 수험생이 대입의 승자가 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도 변경에 대한 책임에서 정부가 자유로울 수는 없죠. 결국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순간에 왜곡한 거고 그렇게 된 결과에 대한 혼란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죠.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즉 자원 배분의 결정자로서 정부의 힘은 더 강해질 테고요. 저도 주변에 만약 그런 수험생이나 취준생이 있다면 빠르게 메타에 적응하라고 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급격한 변화에 대한 책임이란 게 면죄된다고 보지는 않아요.
이런 현상이 반복될수록 결국 사회적 자원의 낭비인 거고 그래서 인센티브가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예기간을 두거나 다시 전체 대상으로 채용을 다시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들일 시간을 주는 게 낫죠. 원래 부조리한 거라는 일반론보다 부조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시간이라는 변수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인권 같은 디폴트는 논외입니다' 여기에 답이 있는 것 같읍니다
다들 자기만의 기준으로 이건 디폴트야!라고 생각하니까 발생되는 논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댓글에도 적었지만 제 주변 정규직 전환된 분들은 [내가 정규직 되었으니 일을 쉬엄쉬엄 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쳇쳇)
다들 자기만의 기준으로 이건 디폴트야!라고 생각하니까 발생되는 논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댓글에도 적었지만 제 주변 정규직 전환된 분들은 [내가 정규직 되었으니 일을 쉬엄쉬엄 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쳇쳇)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내가 a를 하면 그 대가로'도 생략하고
그냥 '나는 b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라고만 생각하죠.
유아주의적 발상에조차 이르지 못했으니 영아주의적이라고 해야할지
그냥 '나는 b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라고만 생각하죠.
유아주의적 발상에조차 이르지 못했으니 영아주의적이라고 해야할지
위 다른분 덧글과 비슷한 논지입니다만, 나 개인은 그렇죠. 하지만 사회 거시적으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하고
열심히 능력을 갖추면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어야 하고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거 아니었습니까?
이 시점에서 개인과 사회는 분리해야죠. 그렇지않으면 스스로 자조하기엔 좋겠지만 결국 부조리에 무기력해지는것 외엔 다른 수가 없으니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하고
열심히 능력을 갖추면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어야 하고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거 아니었습니까?
이 시점에서 개인과 사회는 분리해야죠. 그렇지않으면 스스로 자조하기엔 좋겠지만 결국 부조리에 무기력해지는것 외엔 다른 수가 없으니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되도록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룬 성과에 비례해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바뀌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여기 주류의견과는 다른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에 따른 결과가 와야 된다는 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무리 생각해도 당위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저는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에 따른 결과가 와야 된다는 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무리 생각해도 당위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저는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잘 수행하는게 기준이 되어야겠지요.
단지 직종이나 환경에 따라
그것이 '열심' 으로 표현되거나 실제로 열심히 한다는 것의 비중이 큰 경우도 있고,
'열심' 이라는 것이 올바른 방향, 양과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서로의 언어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경험과 환경에 따라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지요(...)
단지 직종이나 환경에 따라
그것이 '열심' 으로 표현되거나 실제로 열심히 한다는 것의 비중이 큰 경우도 있고,
'열심' 이라는 것이 올바른 방향, 양과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서로의 언어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경험과 환경에 따라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지요(...)
개인과 국가(또는 조직 또는 리더)는 다른게 맞습니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기대치에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킨다면 무능력으로 볼 수 있겠죠. 여기서 핵심은 불필요한가 아닌가가 되겠습니다.
네. 개인과 사회는 분리해야합니다.
한편 개인의 기대도 기대 나름입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연인을 만들 수 있는 사회..를 사회가 노력해서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한편 개인의 기대도 기대 나름입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연인을 만들 수 있는 사회..를 사회가 노력해서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인국공 사태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저런(?) 사람들과 같은 인국공 간판을 달수 없다. 나 박탈감 느낀다! 라고 하는 애들 많이보이네요 ㅋㅋ
무슨 직장이 학교도 아니고.
직장은 그저 회사와 직원의 계약관계에 의해 일해주고 돈받는것을.
그 사이에서 국가에서 여러 안전장치를 양쪽에 해놓은것이고.
당연히 본인은 명문대 나와서, 스펙 열심히 올렸으니까, 학창시절 설렁설렁 보낸애들이랑 같이 섞이기 싫다? 징징이라고 봅니다.
무슨 직장이 학교도 아니고.
직장은 그저 회사와 직원의 계약관계에 의해 일해주고 돈받는것을.
그 사이에서 국가에서 여러 안전장치를 양쪽에 해놓은것이고.
당연히 본인은 명문대 나와서, 스펙 열심히 올렸으니까, 학창시절 설렁설렁 보낸애들이랑 같이 섞이기 싫다? 징징이라고 봅니다.
저는 동의하는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하고 (동의)
열심히 능력을 갖추면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어야 하고 (비동의) => 회사가 오픈한 포지션에 맞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이것도 구직자 입장에서 '갈수 있어야 하고' 라는 말은 너무 맡겨놓은거 내놔라 라는 표현같긴 한데.. ㅎㅎ 표현이 중요한건 아닐것 같아요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회 (비동의) => 회사의 보상은 성과나 전략적 방향에 기대서 측정되어야 하겠죠. 그 성과측... 더 보기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하고 (동의)
열심히 능력을 갖추면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어야 하고 (비동의) => 회사가 오픈한 포지션에 맞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이것도 구직자 입장에서 '갈수 있어야 하고' 라는 말은 너무 맡겨놓은거 내놔라 라는 표현같긴 한데.. ㅎㅎ 표현이 중요한건 아닐것 같아요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회 (비동의) => 회사의 보상은 성과나 전략적 방향에 기대서 측정되어야 하겠죠. 그 성과측... 더 보기
저는 동의하는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하고 (동의)
열심히 능력을 갖추면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어야 하고 (비동의) => 회사가 오픈한 포지션에 맞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이것도 구직자 입장에서 '갈수 있어야 하고' 라는 말은 너무 맡겨놓은거 내놔라 라는 표현같긴 한데.. ㅎㅎ 표현이 중요한건 아닐것 같아요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회 (비동의) => 회사의 보상은 성과나 전략적 방향에 기대서 측정되어야 하겠죠. 그 성과측정도 매번 명확하지 않아도 평가시즌마다 직원들의 불만이 쌓이는거 수두룩하게 보는데... 열심히 일한다는 기준은 너무나도 불명확할 뿐더러, 열심히 일했는지 안했는지 파악할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회사가 열심히 뭐 하자고 모인곳도 아니잖아요. 설립자가 돈 많이 벌려고(or 기타 다른 이유로) 만들고 성과 잘낼수 있는 직원 뽑은것일텐데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하고 (동의)
열심히 능력을 갖추면 좋은 직장에 갈 수 있어야 하고 (비동의) => 회사가 오픈한 포지션에 맞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이것도 구직자 입장에서 '갈수 있어야 하고' 라는 말은 너무 맡겨놓은거 내놔라 라는 표현같긴 한데.. ㅎㅎ 표현이 중요한건 아닐것 같아요
열심히 일하면 좋은 평가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회 (비동의) => 회사의 보상은 성과나 전략적 방향에 기대서 측정되어야 하겠죠. 그 성과측정도 매번 명확하지 않아도 평가시즌마다 직원들의 불만이 쌓이는거 수두룩하게 보는데... 열심히 일한다는 기준은 너무나도 불명확할 뿐더러, 열심히 일했는지 안했는지 파악할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회사가 열심히 뭐 하자고 모인곳도 아니잖아요. 설립자가 돈 많이 벌려고(or 기타 다른 이유로) 만들고 성과 잘낼수 있는 직원 뽑은것일텐데요..
그 추상적인 관념이 정의로 걸려있기 때문에 현실에 적용될 때 깔끔하지 않아지는거죠. 인권은 인간들끼리 그렇게 하기로 정의하고 (다양한 법리/제도/문화적 차원에서)합의한 발명품일 뿐이고 그걸 따를거냐 말거냐의 문제일 뿐 제가 뭘 설명해야 하거나 설명하지 못하거나 할 게 없습니다. 제 말하고자하는 바와 별 상관이 없을 뿐이지요.
땡볕에서 8시간 일했는데 5천원 주는 사회는
땡볕에서 8시간 일해서 산출할 수 있는 부가가치가 (5천원을 약간 상회할만큼) 매우 적거나
땡볕에서 8시간 일할 용의가 있는 개인들이 매우 많거나
둘 다인 사회일 뿐입니다.
좋고 나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땡볕에서 8시간 일해서 산출할 수 있는 부가가치가 (5천원을 약간 상회할만큼) 매우 적거나
땡볕에서 8시간 일할 용의가 있는 개인들이 매우 많거나
둘 다인 사회일 뿐입니다.
좋고 나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최저임금제도가 없는 국가들에서도 사람들은 땡볕에서 5천원만 받고 일하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멍청이가 아닌 이상 최저임금제가 없다는 이유로 기업이 노동착취를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노동착취란 게 실존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최저임금제도와 같이 가격에 개입해 보장되는게 아니라 노동법을 통해 보장되어야 할 일로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노동착취란 게 실존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최저임금제도와 같이 가격에 개입해 보장되는게 아니라 노동법을 통해 보장되어야 할 일로 봅니다.
상관이 없는게 아니라 논의를 거기서 자르고싶으신거죠.
b를 추상적인 권리로 두면 본문의 예시들도 살짝 비틀어 디폴트로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인권은 인간들 사이의 법적제도적 합의이고 발명품일 뿐이다 라면 그 논리는 본문예시들에도 그대로 쓸 수 있죠.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은 학교에 간다
공채 시험을 통해 좋은 직장에 간다
a를 충족시키면 b를 얻는다도 그동안의 제도고 합의였던거죠. 함수값 인풋a넣으면 아웃풋 b라는 합의요.
열심히 '열심히'를 넣으셔서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는 자격이 아니라... 더 보기
b를 추상적인 권리로 두면 본문의 예시들도 살짝 비틀어 디폴트로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인권은 인간들 사이의 법적제도적 합의이고 발명품일 뿐이다 라면 그 논리는 본문예시들에도 그대로 쓸 수 있죠.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은 학교에 간다
공채 시험을 통해 좋은 직장에 간다
a를 충족시키면 b를 얻는다도 그동안의 제도고 합의였던거죠. 함수값 인풋a넣으면 아웃풋 b라는 합의요.
열심히 '열심히'를 넣으셔서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는 자격이 아니라... 더 보기
상관이 없는게 아니라 논의를 거기서 자르고싶으신거죠.
b를 추상적인 권리로 두면 본문의 예시들도 살짝 비틀어 디폴트로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인권은 인간들 사이의 법적제도적 합의이고 발명품일 뿐이다 라면 그 논리는 본문예시들에도 그대로 쓸 수 있죠.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은 학교에 간다
공채 시험을 통해 좋은 직장에 간다
a를 충족시키면 b를 얻는다도 그동안의 제도고 합의였던거죠. 함수값 인풋a넣으면 아웃풋 b라는 합의요.
열심히 '열심히'를 넣으셔서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는 자격이 아니라고 a를 노오력으로 끌어오셨지만 a의 대가로 b의 자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오력인 a를 자격으로 주장하는게 아니라 노력의 결과인 a를 자격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죠.
b를 추상적인 권리로 두면 본문의 예시들도 살짝 비틀어 디폴트로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인권은 인간들 사이의 법적제도적 합의이고 발명품일 뿐이다 라면 그 논리는 본문예시들에도 그대로 쓸 수 있죠.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은 학교에 간다
공채 시험을 통해 좋은 직장에 간다
a를 충족시키면 b를 얻는다도 그동안의 제도고 합의였던거죠. 함수값 인풋a넣으면 아웃풋 b라는 합의요.
열심히 '열심히'를 넣으셔서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는 자격이 아니라고 a를 노오력으로 끌어오셨지만 a의 대가로 b의 자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오력인 a를 자격으로 주장하는게 아니라 노력의 결과인 a를 자격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죠.
비튼게 아니라 아예 다른 얘기를 하셨네요.
"좋은 입시성적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한다."
"채용시험에 상위성적을 기록해 좋은 기업에 입사한다."
는 사실상 동어반복일 뿐입니다. 과정과 결과의 연결 당위가 없음을 얘기했는데, (사실상 같은) 결과와 결과를 얘기하시면 저더러 뭘 어쩌란건지.. 노력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를 자격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은지는 제가 잘 모르겠고, 그런 분들이라 해도 본인이 얻은 것은 입학할 자격이나 기업에 입사할 자격이지, 내가 한 수준의 노력과 결과를 기록한 자들만이 자신과 같은 라벨링을 얻는 것을 ... 더 보기
"좋은 입시성적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한다."
"채용시험에 상위성적을 기록해 좋은 기업에 입사한다."
는 사실상 동어반복일 뿐입니다. 과정과 결과의 연결 당위가 없음을 얘기했는데, (사실상 같은) 결과와 결과를 얘기하시면 저더러 뭘 어쩌란건지.. 노력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를 자격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은지는 제가 잘 모르겠고, 그런 분들이라 해도 본인이 얻은 것은 입학할 자격이나 기업에 입사할 자격이지, 내가 한 수준의 노력과 결과를 기록한 자들만이 자신과 같은 라벨링을 얻는 것을 ... 더 보기
비튼게 아니라 아예 다른 얘기를 하셨네요.
"좋은 입시성적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한다."
"채용시험에 상위성적을 기록해 좋은 기업에 입사한다."
는 사실상 동어반복일 뿐입니다. 과정과 결과의 연결 당위가 없음을 얘기했는데, (사실상 같은) 결과와 결과를 얘기하시면 저더러 뭘 어쩌란건지.. 노력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를 자격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은지는 제가 잘 모르겠고, 그런 분들이라 해도 본인이 얻은 것은 입학할 자격이나 기업에 입사할 자격이지, 내가 한 수준의 노력과 결과를 기록한 자들만이 자신과 같은 라벨링을 얻는 것을 거부할 권리, 내가 생각하는 학력과 직업에 걸맞는 인정을 받을 권리 등등이 아닙니다. 인풋을 넣은 다음에 자기 멋대로 기대하는 건 권리가 아니라는 지당한 얘기죠.
여전히 인권을 제낀게 왜 제가 편하려고 논의에서 제낀거라 생각하시는지를 모르겠는데, 인권처럼 (각론에서야 천차만별일 지언정)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동의되는 합의에 해당하는 당위라면 저도 그 기대에 대해 대충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보장 받아야죠 라고 말할 때 크게 태클 걸릴 일도 적을텐데 굳이 이걸 논의에서 빼서 제가 편해져봐야 얼마나 편해진다고.
"좋은 입시성적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한다."
"채용시험에 상위성적을 기록해 좋은 기업에 입사한다."
는 사실상 동어반복일 뿐입니다. 과정과 결과의 연결 당위가 없음을 얘기했는데, (사실상 같은) 결과와 결과를 얘기하시면 저더러 뭘 어쩌란건지.. 노력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를 자격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은지는 제가 잘 모르겠고, 그런 분들이라 해도 본인이 얻은 것은 입학할 자격이나 기업에 입사할 자격이지, 내가 한 수준의 노력과 결과를 기록한 자들만이 자신과 같은 라벨링을 얻는 것을 거부할 권리, 내가 생각하는 학력과 직업에 걸맞는 인정을 받을 권리 등등이 아닙니다. 인풋을 넣은 다음에 자기 멋대로 기대하는 건 권리가 아니라는 지당한 얘기죠.
여전히 인권을 제낀게 왜 제가 편하려고 논의에서 제낀거라 생각하시는지를 모르겠는데, 인권처럼 (각론에서야 천차만별일 지언정)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동의되는 합의에 해당하는 당위라면 저도 그 기대에 대해 대충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보장 받아야죠 라고 말할 때 크게 태클 걸릴 일도 적을텐데 굳이 이걸 논의에서 빼서 제가 편해져봐야 얼마나 편해진다고.
이게 무슨 맥락에서 쓰신 글인지 알면 좀더 이해가 쉬울것 같은데
그냥 글만 가지고는 좀 갸우뚱 하네요
요즘 특히 어떤 사건이 인상깊었다던가, 인터넷 댓글러들의 어느 면이 한심해 보였다던가...
그런 사례가 있다면 아 그거말하는거구나 했을텐데
사실 가만보면 생떼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도 그런거 참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회라는건 부당함에 빡친 사람들이 더 낫게 개선시키는 노력들의 연속인것도 맞지 않나. 합니다.
어줍잖은 비유는 논의를 산으로 가게 만들지만... 굳이 게임이야기 하나 하면
솔랭에서 난 아무리 ... 더 보기
그냥 글만 가지고는 좀 갸우뚱 하네요
요즘 특히 어떤 사건이 인상깊었다던가, 인터넷 댓글러들의 어느 면이 한심해 보였다던가...
그런 사례가 있다면 아 그거말하는거구나 했을텐데
사실 가만보면 생떼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도 그런거 참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회라는건 부당함에 빡친 사람들이 더 낫게 개선시키는 노력들의 연속인것도 맞지 않나. 합니다.
어줍잖은 비유는 논의를 산으로 가게 만들지만... 굳이 게임이야기 하나 하면
솔랭에서 난 아무리 ... 더 보기
이게 무슨 맥락에서 쓰신 글인지 알면 좀더 이해가 쉬울것 같은데
그냥 글만 가지고는 좀 갸우뚱 하네요
요즘 특히 어떤 사건이 인상깊었다던가, 인터넷 댓글러들의 어느 면이 한심해 보였다던가...
그런 사례가 있다면 아 그거말하는거구나 했을텐데
사실 가만보면 생떼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도 그런거 참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회라는건 부당함에 빡친 사람들이 더 낫게 개선시키는 노력들의 연속인것도 맞지 않나. 합니다.
어줍잖은 비유는 논의를 산으로 가게 만들지만... 굳이 게임이야기 하나 하면
솔랭에서 난 아무리 잘했어도 승리가 당위인 것은 아니지만... 잘못한 것 없는데 져서 빡치는 것도 사실이죠.
그 빡침을 어느정도 표현할 자유도 있고, 빡침이 트롤러들 제재 등으로 라이엇의 행동변화를 이끌어 낼수 있다면 유의미한 면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빡쳤다고 욕설 맞트롤 이런 짓거리를 하는 것은 유아적인 행태임에도 동의합니다.
그냥 글만 가지고는 좀 갸우뚱 하네요
요즘 특히 어떤 사건이 인상깊었다던가, 인터넷 댓글러들의 어느 면이 한심해 보였다던가...
그런 사례가 있다면 아 그거말하는거구나 했을텐데
사실 가만보면 생떼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도 그런거 참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회라는건 부당함에 빡친 사람들이 더 낫게 개선시키는 노력들의 연속인것도 맞지 않나. 합니다.
어줍잖은 비유는 논의를 산으로 가게 만들지만... 굳이 게임이야기 하나 하면
솔랭에서 난 아무리 잘했어도 승리가 당위인 것은 아니지만... 잘못한 것 없는데 져서 빡치는 것도 사실이죠.
그 빡침을 어느정도 표현할 자유도 있고, 빡침이 트롤러들 제재 등으로 라이엇의 행동변화를 이끌어 낼수 있다면 유의미한 면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빡쳤다고 욕설 맞트롤 이런 짓거리를 하는 것은 유아적인 행태임에도 동의합니다.
처음부터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내가 a를 하면 그 대가로 b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류의 생각을 하곤 합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 유아주의적 발상입니다]
(계약된) 노동을 하면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미리 방학숙제를 끝내 놓으면 남은 방학을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누릴 수 있죠.
보험에 들면 보험이 커버하는 범위 내에선 안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해외파견이나 파병을 다녀오면, 남들보다 좋은 고과점수를 기대할 수 있죠.
이런 것들이 왜 유아적 발상이에요?
[내가 a를 하면 그 대가로 b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류의 생각을 하곤 합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 유아주의적 발상입니다]
(계약된) 노동을 하면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미리 방학숙제를 끝내 놓으면 남은 방학을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누릴 수 있죠.
보험에 들면 보험이 커버하는 범위 내에선 안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해외파견이나 파병을 다녀오면, 남들보다 좋은 고과점수를 기대할 수 있죠.
이런 것들이 왜 유아적 발상이에요?
위에서부터 계속 느끼는 건데 많은 분들이 유아唯我주의 혹은 유아론solipsism을 유幼아적이라고 읽으신 듯. 유아들이 성장발달상 대체로 유아론적이긴 하지만 그 유아랑 이 유아는 음가만 같지 전혀 다른 말이죠. 한자가 네개인데 네개가 다 다름.
노동을 하면 자동으로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게 아니라, 노동 계약이 있어서 계약이 이행될 것을 기대할 수 있죠.
보험을 들면 보험을 지급받는 경우에 한정해 계약이 이행될 것을 기대할 수 있죠.
방학숙제를 끝내면 더 할 방학숙제가 없다는 것을 (방학숙제를 부여 받을때) 약속 받았지요.
위 예시들의 핵심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사전 계약입니다.
반면
계약하지 않은 노동을 했을 때 임금을 기대할 수 없고
보장받지 않는 부상을 입었을 때 보험금을 기대할 수 없고
시키지 않은 방학숙제를 혼자서 했을 때 방학숙제에서 해방될 수 ... 더 보기
보험을 들면 보험을 지급받는 경우에 한정해 계약이 이행될 것을 기대할 수 있죠.
방학숙제를 끝내면 더 할 방학숙제가 없다는 것을 (방학숙제를 부여 받을때) 약속 받았지요.
위 예시들의 핵심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사전 계약입니다.
반면
계약하지 않은 노동을 했을 때 임금을 기대할 수 없고
보장받지 않는 부상을 입었을 때 보험금을 기대할 수 없고
시키지 않은 방학숙제를 혼자서 했을 때 방학숙제에서 해방될 수 ... 더 보기
노동을 하면 자동으로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게 아니라, 노동 계약이 있어서 계약이 이행될 것을 기대할 수 있죠.
보험을 들면 보험을 지급받는 경우에 한정해 계약이 이행될 것을 기대할 수 있죠.
방학숙제를 끝내면 더 할 방학숙제가 없다는 것을 (방학숙제를 부여 받을때) 약속 받았지요.
위 예시들의 핵심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사전 계약입니다.
반면
계약하지 않은 노동을 했을 때 임금을 기대할 수 없고
보장받지 않는 부상을 입었을 때 보험금을 기대할 수 없고
시키지 않은 방학숙제를 혼자서 했을 때 방학숙제에서 해방될 수 없음은
따라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경우에도 각자는 노력하고 대비했을지 모르겠지만 아쉽게 되었네요.
이 때 "억울하다"고 주장한다면 좋은 취급을 못 받겠죠.
한편
해외파견이나 파병을 다녀오면 좋은 고과를 기대하는 건 뭐 기대는 자유, 실제로 어떨지는 두고봐야겠죠.
보험을 들면 보험을 지급받는 경우에 한정해 계약이 이행될 것을 기대할 수 있죠.
방학숙제를 끝내면 더 할 방학숙제가 없다는 것을 (방학숙제를 부여 받을때) 약속 받았지요.
위 예시들의 핵심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사전 계약입니다.
반면
계약하지 않은 노동을 했을 때 임금을 기대할 수 없고
보장받지 않는 부상을 입었을 때 보험금을 기대할 수 없고
시키지 않은 방학숙제를 혼자서 했을 때 방학숙제에서 해방될 수 없음은
따라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경우에도 각자는 노력하고 대비했을지 모르겠지만 아쉽게 되었네요.
이 때 "억울하다"고 주장한다면 좋은 취급을 못 받겠죠.
한편
해외파견이나 파병을 다녀오면 좋은 고과를 기대하는 건 뭐 기대는 자유, 실제로 어떨지는 두고봐야겠죠.
한국식 공부->대학->직업->성공 일원화된 테크트리에 갇혀계신것 같네요.
정확히 말하면 [한국 주류문화의 믿음인] a를 하면 b를 누릴 수 있다는 구시대적 사고발상이 틀린거죠.
내가 더 영향력 있고, 사회에서 더 임팩트 있는 일을 하고, 대체 불가능한 능력을 가지면 그에 대한 보상은 본인이 원한다면 충분히 받을 수 있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노력과 성과는 너무나 개인의 영역이니 이건 개인의 명제를 전체의 명제로 보고자 하는 일반화의 오류인것 같아요.
정확히 말하면 [한국 주류문화의 믿음인] a를 하면 b를 누릴 수 있다는 구시대적 사고발상이 틀린거죠.
내가 더 영향력 있고, 사회에서 더 임팩트 있는 일을 하고, 대체 불가능한 능력을 가지면 그에 대한 보상은 본인이 원한다면 충분히 받을 수 있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노력과 성과는 너무나 개인의 영역이니 이건 개인의 명제를 전체의 명제로 보고자 하는 일반화의 오류인것 같아요.
계약하지 않은 노동은 노동 의미 자체가 아니고, 시키지 않은 방학숙제 역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숙제일리가 없지요. 그런 것은 단어를 정의하는 개념상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암보험 들고 충치에 대한 보장을 받고자 한다면 진지하게 정신을 의심해 봐야겠죠.
파견이나 파병은 비공식적으로라도 인사고과든 뭐든 보장을 받고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군대 파병인데 그랬었어요. 안 그러면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만 이런 것이 계약이라고 확정짓기에는 느슨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더 보기
암보험 들고 충치에 대한 보장을 받고자 한다면 진지하게 정신을 의심해 봐야겠죠.
파견이나 파병은 비공식적으로라도 인사고과든 뭐든 보장을 받고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군대 파병인데 그랬었어요. 안 그러면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만 이런 것이 계약이라고 확정짓기에는 느슨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더 보기
계약하지 않은 노동은 노동 의미 자체가 아니고, 시키지 않은 방학숙제 역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숙제일리가 없지요. 그런 것은 단어를 정의하는 개념상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암보험 들고 충치에 대한 보장을 받고자 한다면 진지하게 정신을 의심해 봐야겠죠.
파견이나 파병은 비공식적으로라도 인사고과든 뭐든 보장을 받고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군대 파병인데 그랬었어요. 안 그러면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만 이런 것이 계약이라고 확정짓기에는 느슨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관례상 오지로 파견근무를 다녀오면 다음에는 좀 편한 곳으로 발령을 내주었고, 저도 그 관례를 기대하고 군말없이 오지 파견근무를 다녀왔는데 다시 오지로 발령을 내주며 관행 혁파니 뭐니 떠든다면 꽤나 억울한 일이겠죠.
암보험 들고 충치에 대한 보장을 받고자 한다면 진지하게 정신을 의심해 봐야겠죠.
파견이나 파병은 비공식적으로라도 인사고과든 뭐든 보장을 받고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군대 파병인데 그랬었어요. 안 그러면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만 이런 것이 계약이라고 확정짓기에는 느슨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관례상 오지로 파견근무를 다녀오면 다음에는 좀 편한 곳으로 발령을 내주었고, 저도 그 관례를 기대하고 군말없이 오지 파견근무를 다녀왔는데 다시 오지로 발령을 내주며 관행 혁파니 뭐니 떠든다면 꽤나 억울한 일이겠죠.
불타는 밀밭님께서 이해를 잘 못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파견이나 파병도 예를 잘못들고계신겁니다.
그건 조직에서 반드시 이뤄야만 하지만, 구성원들의 리스크도 공존하는 목표가 있는 상태인거죠.
거기에 밀밭님께서 지원을 하신거죠. 그런 경우에 인사고과를 보장받는 조건이 있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것은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조직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지키려고 하죠.
그러나,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예를들면)경호회사나 용병회사에 당연하게 취직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것... 더 보기
파견이나 파병도 예를 잘못들고계신겁니다.
그건 조직에서 반드시 이뤄야만 하지만, 구성원들의 리스크도 공존하는 목표가 있는 상태인거죠.
거기에 밀밭님께서 지원을 하신거죠. 그런 경우에 인사고과를 보장받는 조건이 있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것은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조직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지키려고 하죠.
그러나,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예를들면)경호회사나 용병회사에 당연하게 취직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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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밀밭님께서 이해를 잘 못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파견이나 파병도 예를 잘못들고계신겁니다.
그건 조직에서 반드시 이뤄야만 하지만, 구성원들의 리스크도 공존하는 목표가 있는 상태인거죠.
거기에 밀밭님께서 지원을 하신거죠. 그런 경우에 인사고과를 보장받는 조건이 있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것은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조직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지키려고 하죠.
그러나,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예를들면)경호회사나 용병회사에 당연하게 취직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 자리에 적절한 인재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을지 몰라도, 그 경력이 취직을 보장해주는것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이미 그 일을 하고있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있다면 그사람이 그 포지션에선 더 적절한 인력일 가능성이 높죠.
이미 실무를 하고 있으니까.
파견이나 파병도 예를 잘못들고계신겁니다.
그건 조직에서 반드시 이뤄야만 하지만, 구성원들의 리스크도 공존하는 목표가 있는 상태인거죠.
거기에 밀밭님께서 지원을 하신거죠. 그런 경우에 인사고과를 보장받는 조건이 있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것은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조직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지키려고 하죠.
그러나,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예를들면)경호회사나 용병회사에 당연하게 취직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 자리에 적절한 인재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을지 몰라도, 그 경력이 취직을 보장해주는것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이미 그 일을 하고있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있다면 그사람이 그 포지션에선 더 적절한 인력일 가능성이 높죠.
이미 실무를 하고 있으니까.
당위설정도 하면 되는거죠. 사실 그런 설정된 당위가 마냥 없지도 않고 말입니다.
노력 ㅡ 행동을 하면 어느정도의 결과가 따라오는 것은 정의에 속합니다. 그게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고, 유지되지 않죠. 선행엔 보답이 있고 악행엔 보복이 있어야 하는건 당위입니다. 그것도 인간들의 발명품이죠. 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섭리라서가 아니라 그게 이루어져야 사회가 유지되니까요. 그런 관점 ㅡ 인간들끼리의 설정일 뿐이라는 관점에서는 인권이란 사회계약과 관례/불문율이란 사회계약 사이에 는 양적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본... 더 보기
노력 ㅡ 행동을 하면 어느정도의 결과가 따라오는 것은 정의에 속합니다. 그게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고, 유지되지 않죠. 선행엔 보답이 있고 악행엔 보복이 있어야 하는건 당위입니다. 그것도 인간들의 발명품이죠. 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섭리라서가 아니라 그게 이루어져야 사회가 유지되니까요. 그런 관점 ㅡ 인간들끼리의 설정일 뿐이라는 관점에서는 인권이란 사회계약과 관례/불문율이란 사회계약 사이에 는 양적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본... 더 보기
당위설정도 하면 되는거죠. 사실 그런 설정된 당위가 마냥 없지도 않고 말입니다.
노력 ㅡ 행동을 하면 어느정도의 결과가 따라오는 것은 정의에 속합니다. 그게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고, 유지되지 않죠. 선행엔 보답이 있고 악행엔 보복이 있어야 하는건 당위입니다. 그것도 인간들의 발명품이죠. 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섭리라서가 아니라 그게 이루어져야 사회가 유지되니까요. 그런 관점 ㅡ 인간들끼리의 설정일 뿐이라는 관점에서는 인권이란 사회계약과 관례/불문율이란 사회계약 사이에 는 양적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죠.
언제나 문제는 정도죠. 내 기분과 빡치는 정도에 걸맞는 결과가 '항상' '원하는만큼' 이루어져야하는게 아니란 건 맞죠. 나혼자만 빡치는건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빡침은 중요하게 되는거고요.
노력 ㅡ 행동을 하면 어느정도의 결과가 따라오는 것은 정의에 속합니다. 그게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고, 유지되지 않죠. 선행엔 보답이 있고 악행엔 보복이 있어야 하는건 당위입니다. 그것도 인간들의 발명품이죠. 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섭리라서가 아니라 그게 이루어져야 사회가 유지되니까요. 그런 관점 ㅡ 인간들끼리의 설정일 뿐이라는 관점에서는 인권이란 사회계약과 관례/불문율이란 사회계약 사이에 는 양적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죠.
언제나 문제는 정도죠. 내 기분과 빡치는 정도에 걸맞는 결과가 '항상' '원하는만큼' 이루어져야하는게 아니란 건 맞죠. 나혼자만 빡치는건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빡침은 중요하게 되는거고요.
선과 악은 그 자체가 당위적 개념입니다. 윤리란 것이 본디 당위니까요. 따라서 선행과 악행은 응당 당위설정과 엮일 수 있습니다.
노력은 선행이 아닙니다. 자원의 투입량일 뿐이지요.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어도 본디 노력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신분제가 있던 시절에도, 노예제가 있던 시절에도, 옆 부족 몽둥이 들고가서 두들겨패고 털어올 시절에도 늘 노력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건 인간들이 합의해서 만들어낸 발명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머리를 굴려서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짐작되는 일에 자원... 더 보기
노력은 선행이 아닙니다. 자원의 투입량일 뿐이지요.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어도 본디 노력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신분제가 있던 시절에도, 노예제가 있던 시절에도, 옆 부족 몽둥이 들고가서 두들겨패고 털어올 시절에도 늘 노력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건 인간들이 합의해서 만들어낸 발명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머리를 굴려서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짐작되는 일에 자원... 더 보기
선과 악은 그 자체가 당위적 개념입니다. 윤리란 것이 본디 당위니까요. 따라서 선행과 악행은 응당 당위설정과 엮일 수 있습니다.
노력은 선행이 아닙니다. 자원의 투입량일 뿐이지요.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어도 본디 노력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신분제가 있던 시절에도, 노예제가 있던 시절에도, 옆 부족 몽둥이 들고가서 두들겨패고 털어올 시절에도 늘 노력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건 인간들이 합의해서 만들어낸 발명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머리를 굴려서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짐작되는 일에 자원을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치타가 열심히 뛰고, 늑대가 열심히 냄새 맡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사냥은 실패하기도 하는거고요. 그러니까 당위하고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노력과 보상을 정의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유추를 해보면, 어릴때 어른들은 아이에게 노력하여 성취하는 것을 요구하였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착한아이로써의 덕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어른 말을 잘 듣는 것 자체와 선한 것은 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설령 그것이 선하다 한들 그래서 노력 자체가 선한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고 말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그냥 성실한 사람이죠. 타인의 성실함을 저는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마땅히 성취하는게 정의냐고 하면 그닥...
노력은 선행이 아닙니다. 자원의 투입량일 뿐이지요.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어도 본디 노력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신분제가 있던 시절에도, 노예제가 있던 시절에도, 옆 부족 몽둥이 들고가서 두들겨패고 털어올 시절에도 늘 노력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건 인간들이 합의해서 만들어낸 발명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머리를 굴려서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짐작되는 일에 자원을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치타가 열심히 뛰고, 늑대가 열심히 냄새 맡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사냥은 실패하기도 하는거고요. 그러니까 당위하고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노력과 보상을 정의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유추를 해보면, 어릴때 어른들은 아이에게 노력하여 성취하는 것을 요구하였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착한아이로써의 덕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어른 말을 잘 듣는 것 자체와 선한 것은 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설령 그것이 선하다 한들 그래서 노력 자체가 선한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고 말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그냥 성실한 사람이죠. 타인의 성실함을 저는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마땅히 성취하는게 정의냐고 하면 그닥...
꽤 오래 전부터 이리님 글을 읽어왔는데, 이리님은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지만 얘기하기 싫어하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도 불편해하는 문제에 대한 글을 쓰기 좋아하시는거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얘기가 빙빙 도는데, 아무래도 본문을 인천공항 얘기와 따로 생각하나 붙여 생각하나 때문에 생기는 헛돔같네요.
말씀대로 노력은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짐작되는 일에 자원을 투자하죠. 그걸 잘못해서 헛된곳에 노력을 투입해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면 자격이 없는것이고요. 효용을 낳지 않는 무익한 노력에 가치나 자격이 없다는 말은 동감합니다. 이것도 동어반복을 얼마나 넘어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말이죠.
그런데 그 '짐작'은 합의와 효용에 기반한 제도와 선례에 따른 신뢰, 기대에 의한것이고 이것을 뒤흔들어 투입한 자원의 대가를 ... 더 보기
말씀대로 노력은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짐작되는 일에 자원을 투자하죠. 그걸 잘못해서 헛된곳에 노력을 투입해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면 자격이 없는것이고요. 효용을 낳지 않는 무익한 노력에 가치나 자격이 없다는 말은 동감합니다. 이것도 동어반복을 얼마나 넘어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말이죠.
그런데 그 '짐작'은 합의와 효용에 기반한 제도와 선례에 따른 신뢰, 기대에 의한것이고 이것을 뒤흔들어 투입한 자원의 대가를 ... 더 보기
얘기가 빙빙 도는데, 아무래도 본문을 인천공항 얘기와 따로 생각하나 붙여 생각하나 때문에 생기는 헛돔같네요.
말씀대로 노력은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짐작되는 일에 자원을 투자하죠. 그걸 잘못해서 헛된곳에 노력을 투입해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면 자격이 없는것이고요. 효용을 낳지 않는 무익한 노력에 가치나 자격이 없다는 말은 동감합니다. 이것도 동어반복을 얼마나 넘어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말이죠.
그런데 그 '짐작'은 합의와 효용에 기반한 제도와 선례에 따른 신뢰, 기대에 의한것이고 이것을 뒤흔들어 투입한 자원의 대가를 일방적으로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당위가 있는겁니다. 신뢰이익 보호/법적안정성/평등권 /행복추구권같은 추상적가치를 매치시킬 수 있겠고요. 그걸 좀 중간과정 생략하고 말하는게 노력에 결과가 따를 당위가 있다는거고요.
모든 정책에 유불리한 영향이 있으므로 변화를 감당해야한다는 말까지는 맞는 말이지만 무제한적인 변화를 무조건 감내하라고 할수도 없죠. 변화가 가져오는 기대되는 효용과 신뢰이익을 비교해봐야 하는거고, 기존 제도를 신뢰하고 자원을 투입한 ㅡ 노오력을 한 당사자는 그런 이익형량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거고 말입니다.
말씀대로 노력은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짐작되는 일에 자원을 투자하죠. 그걸 잘못해서 헛된곳에 노력을 투입해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면 자격이 없는것이고요. 효용을 낳지 않는 무익한 노력에 가치나 자격이 없다는 말은 동감합니다. 이것도 동어반복을 얼마나 넘어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말이죠.
그런데 그 '짐작'은 합의와 효용에 기반한 제도와 선례에 따른 신뢰, 기대에 의한것이고 이것을 뒤흔들어 투입한 자원의 대가를 일방적으로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당위가 있는겁니다. 신뢰이익 보호/법적안정성/평등권 /행복추구권같은 추상적가치를 매치시킬 수 있겠고요. 그걸 좀 중간과정 생략하고 말하는게 노력에 결과가 따를 당위가 있다는거고요.
모든 정책에 유불리한 영향이 있으므로 변화를 감당해야한다는 말까지는 맞는 말이지만 무제한적인 변화를 무조건 감내하라고 할수도 없죠. 변화가 가져오는 기대되는 효용과 신뢰이익을 비교해봐야 하는거고, 기존 제도를 신뢰하고 자원을 투입한 ㅡ 노오력을 한 당사자는 그런 이익형량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거고 말입니다.
인천공항 건은 글을 쓴 발단일 뿐이고 본문은 두루 얘기한 겁니다.
한편 사회에는 선례, 관례 정도로 불리는 계약에 미만하지만 상당수가 믿는 룰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관성은, 참여자들에게 예측가능성과 자원투입의 효율성을 제공하는 효용이 있습니다. 그렇죠. 효용입니다. 당위가 아니라. 따라서 "일방적으로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고, "일방적으로 변경할만한 필요가 있느냐"라던가 "일방적으로 변경할 만큼 뭐가 좋냐"와 같은 식으로 비판하는게 온당합니다. 만약 일방적으로 변경할 필요가 실제로 있거나 그만... 더 보기
한편 사회에는 선례, 관례 정도로 불리는 계약에 미만하지만 상당수가 믿는 룰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관성은, 참여자들에게 예측가능성과 자원투입의 효율성을 제공하는 효용이 있습니다. 그렇죠. 효용입니다. 당위가 아니라. 따라서 "일방적으로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고, "일방적으로 변경할만한 필요가 있느냐"라던가 "일방적으로 변경할 만큼 뭐가 좋냐"와 같은 식으로 비판하는게 온당합니다. 만약 일방적으로 변경할 필요가 실제로 있거나 그만... 더 보기
인천공항 건은 글을 쓴 발단일 뿐이고 본문은 두루 얘기한 겁니다.
한편 사회에는 선례, 관례 정도로 불리는 계약에 미만하지만 상당수가 믿는 룰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관성은, 참여자들에게 예측가능성과 자원투입의 효율성을 제공하는 효용이 있습니다. 그렇죠. 효용입니다. 당위가 아니라. 따라서 "일방적으로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고, "일방적으로 변경할만한 필요가 있느냐"라던가 "일방적으로 변경할 만큼 뭐가 좋냐"와 같은 식으로 비판하는게 온당합니다. 만약 일방적으로 변경할 필요가 실제로 있거나 그만큼 좋으면 변경할 수도 있는 거지요. 어차피 효용의 문제니까요. 그나마도 정부니까 그런 소리라도 듣는거지, 기업이 매년하던 공채 올해는 안 연다고 너희는 관례를 깨서 사회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었다 욕먹으면 웃기겠죠?
대다수의 인간이 믿다 못해 그냥 시행령 따위도 아니고 헌법이나 법이나 법리로까지 확인해주는 권리들과 매칭시키시는 건, 대다수의 인간이 믿다 못해 법으로 만든 정도는 되어야 들이밀만 하지 않을까 싶고요. 물론 세상이 내가 노력해온 관례와 다른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법리는 제가 살면서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한편 사회에는 선례, 관례 정도로 불리는 계약에 미만하지만 상당수가 믿는 룰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관성은, 참여자들에게 예측가능성과 자원투입의 효율성을 제공하는 효용이 있습니다. 그렇죠. 효용입니다. 당위가 아니라. 따라서 "일방적으로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고, "일방적으로 변경할만한 필요가 있느냐"라던가 "일방적으로 변경할 만큼 뭐가 좋냐"와 같은 식으로 비판하는게 온당합니다. 만약 일방적으로 변경할 필요가 실제로 있거나 그만큼 좋으면 변경할 수도 있는 거지요. 어차피 효용의 문제니까요. 그나마도 정부니까 그런 소리라도 듣는거지, 기업이 매년하던 공채 올해는 안 연다고 너희는 관례를 깨서 사회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었다 욕먹으면 웃기겠죠?
대다수의 인간이 믿다 못해 그냥 시행령 따위도 아니고 헌법이나 법이나 법리로까지 확인해주는 권리들과 매칭시키시는 건, 대다수의 인간이 믿다 못해 법으로 만든 정도는 되어야 들이밀만 하지 않을까 싶고요. 물론 세상이 내가 노력해온 관례와 다른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법리는 제가 살면서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그 확인해주는 권리들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형태들이 그렇게 매칭되는거죠. 위헌법률심판이든 헌법소원이든 보호가치있는 신뢰이익이 있고 이 신뢰보다 가치있는 법익이 없다면 그런 다른방향의 변화를 헌법에서 확인해주는 법리로 막아주는 경우도 있죠. 위헌결정 사유에서 드문것도 아니고 비례의 원칙 안에도 들어있고요.
말씀대로 사기업도 아니고 불필요하다고 해고하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필요하니 고용하는것일뿐이다 라는 말도 온전한 진실이 아닌거죠.
말씀대로 사기업도 아니고 불필요하다고 해고하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필요하니 고용하는것일뿐이다 라는 말도 온전한 진실이 아닌거죠.
음, 뒤이은 논의를 좀 보다 보니 지나치게 동어반복에 가깝고 결국 가치와 당위를 배제하다보니 논리만 남은 주장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정부나 사회가 그래야 할 <의무>는 없지만, 동시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 바람직하다> 고 하는 합의는 존재할진대, 그게 비정규직의 정규직을 통한 직업안정성 보호든 반대로 취업준비생에 대한 공평한 기회 보장이든 뭔가 사람들이 찬반을 표할 만한 대립되는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로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필자가 말하... 더 보기
그런데 그건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로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필자가 말하... 더 보기
음, 뒤이은 논의를 좀 보다 보니 지나치게 동어반복에 가깝고 결국 가치와 당위를 배제하다보니 논리만 남은 주장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정부나 사회가 그래야 할 <의무>는 없지만, 동시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 바람직하다> 고 하는 합의는 존재할진대, 그게 비정규직의 정규직을 통한 직업안정성 보호든 반대로 취업준비생에 대한 공평한 기회 보장이든 뭔가 사람들이 찬반을 표할 만한 대립되는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로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필자가 말하고 싶은 건 논리만 남으니, 실제 사례와 연결짓기엔 어느 가치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고, 동시에 논리만 남기기엔 <우리는 무언가를 하면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곤 하지만, 그 기대란 건 대체로 자의적이고 세상은 알아서 돌아간다>라고 하는 문장에서 더 나아간 이야기가 아니니까 글이 대체로 방어적으로 읽힙니다.
글쓴이가 관심은 없겠지만 가치판단 얘기를 그래도 굳이 하자면, 글쓴이가 말하는 것처럼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이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나 대체성에 영향이 큰 것에 동의하는데, 솔직히 현재 공기업 공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생산가치나 대체성을 무력화시키는 시도에 가깝거든요.
서교공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매점 아줌마가 차장급 연봉 테이블을 받는다고 하면, 매점 아줌마가 생산하는 가치가 차장급인지도 의문이고 동시에 정규직이니까 싼 사람으로 대체가 가능하지도 않죠. 회사는 가치가 되니까 쓴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규직으로 고용안정성이라는 무기로 손발을 묶어놓고 패는 것과 비슷하고, 결국 최저임금과 비슷하게 일방적인 시장가격을 정부가 기업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 점에 있어서 가치의 충돌에서 그나마 공평한 기회 보장이 좀 낫지 않나하는 생각은 듭니다. 물론 더 입맛에 맞는 건 매점 아줌마는 비정규직으로 남겨 두자 쪽이지만.
그런데 그건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로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필자가 말하고 싶은 건 논리만 남으니, 실제 사례와 연결짓기엔 어느 가치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고, 동시에 논리만 남기기엔 <우리는 무언가를 하면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곤 하지만, 그 기대란 건 대체로 자의적이고 세상은 알아서 돌아간다>라고 하는 문장에서 더 나아간 이야기가 아니니까 글이 대체로 방어적으로 읽힙니다.
글쓴이가 관심은 없겠지만 가치판단 얘기를 그래도 굳이 하자면, 글쓴이가 말하는 것처럼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이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나 대체성에 영향이 큰 것에 동의하는데, 솔직히 현재 공기업 공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생산가치나 대체성을 무력화시키는 시도에 가깝거든요.
서교공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매점 아줌마가 차장급 연봉 테이블을 받는다고 하면, 매점 아줌마가 생산하는 가치가 차장급인지도 의문이고 동시에 정규직이니까 싼 사람으로 대체가 가능하지도 않죠. 회사는 가치가 되니까 쓴다고는 하지만 그건 정규직으로 고용안정성이라는 무기로 손발을 묶어놓고 패는 것과 비슷하고, 결국 최저임금과 비슷하게 일방적인 시장가격을 정부가 기업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 점에 있어서 가치의 충돌에서 그나마 공평한 기회 보장이 좀 낫지 않나하는 생각은 듭니다. 물론 더 입맛에 맞는 건 매점 아줌마는 비정규직으로 남겨 두자 쪽이지만.
효용의 차원이냐 당위의 차원이냐를 얘기하는 거지, 효용끼리 비교해서 견주는거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편 필요와 불필요를 굳이 제3자가 결정하지 않는게 시장의 법칙입니다. 각자 알아서 하고, 살아남을 기업이나 노동자는 살아남고, 죽을 자는 죽고 그러면서 알아서 조정되라는 거죠. 필요와 불필요는 각자의 생각대로 판단되고 집행되는 것이니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죠. 물론 공기업은 시장에 존재한다기보다 정부의 보조와 정책적 목표하에서 기능하고, 따라서 그들의 필요와 불필요 또한 시장의 효율성과는 별개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셈이겠지요. 그래서 공기업들이나 정부기관은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와 별개로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죠.
글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인국공 건과 얽히지 않도록 독해를 한다면 세상은 니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는 뻔한 문장일 뿐이고, 굳이 그 건을 얽어서 독해를 한다면 국가권력이 사회적 합의(라고 믿어왔던 그 무언가)를 뒤집어엎든 말든 국가는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고, 니들은 당할 수 있는 일을 당한 것 뿐이라는 허망한 결론만이 남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런 논리라면 인권은 자격의 대상에서 굳이 왜 배제하셨는지 의문이네요. 그 또한 '합의에 의해' 당연해진 것이고 교육에 의해 인이 박힌 것이지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모두에게 주어진 인권이라는 사치스러운 개념이 등장한 게 그리 오랜 일이 아니지요.
말씀하신 대로 인국공 건과 얽히지 않도록 독해를 한다면 세상은 니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는 뻔한 문장일 뿐이고, 굳이 그 건을 얽어서 독해를 한다면 국가권력이 사회적 합의(라고 믿어왔던 그 무언가)를 뒤집어엎든 말든 국가는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고, 니들은 당할 수 있는 일을 당한 것 뿐이라는 허망한 결론만이 남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런 논리라면 인권은 자격의 대상에서 굳이 왜 배제하셨는지 의문이네요. 그 또한 '합의에 의해' 당연해진 것이고 교육에 의해 인이 박힌 것이지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모두에게 주어진 인권이라는 사치스러운 개념이 등장한 게 그리 오랜 일이 아니지요.
제가 인국공 직원은 아니지만 제가 느끼기에 가장 큰 문제는
지금까지 비교적 쉽게 들어왔던 인국공 보안요원직이
이번 정규직 전환 사태를 겪고 나서도
낮은 스펙(거의 무스펙에 가까운)으로도 쉽게 입사가 될까하는 의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전처럼 알바몬에서 모집? 어림반푼어치도 없다고 생각하구요. 이제 다음 기수 인국공 보안요원직 모집때부터는 경쟁률 박터지고 스펙 이것 저것 따지기 시작할겁니다.
그 동안 비정규직으로 후려친게 문제네, 서로 잘 되면 좋지 왜 너희가 박탈감 느끼냐 이런건 논점이탈 같구요.
결론적으로 좋은... 더 보기
지금까지 비교적 쉽게 들어왔던 인국공 보안요원직이
이번 정규직 전환 사태를 겪고 나서도
낮은 스펙(거의 무스펙에 가까운)으로도 쉽게 입사가 될까하는 의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전처럼 알바몬에서 모집? 어림반푼어치도 없다고 생각하구요. 이제 다음 기수 인국공 보안요원직 모집때부터는 경쟁률 박터지고 스펙 이것 저것 따지기 시작할겁니다.
그 동안 비정규직으로 후려친게 문제네, 서로 잘 되면 좋지 왜 너희가 박탈감 느끼냐 이런건 논점이탈 같구요.
결론적으로 좋은... 더 보기
제가 인국공 직원은 아니지만 제가 느끼기에 가장 큰 문제는
지금까지 비교적 쉽게 들어왔던 인국공 보안요원직이
이번 정규직 전환 사태를 겪고 나서도
낮은 스펙(거의 무스펙에 가까운)으로도 쉽게 입사가 될까하는 의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전처럼 알바몬에서 모집? 어림반푼어치도 없다고 생각하구요. 이제 다음 기수 인국공 보안요원직 모집때부터는 경쟁률 박터지고 스펙 이것 저것 따지기 시작할겁니다.
그 동안 비정규직으로 후려친게 문제네, 서로 잘 되면 좋지 왜 너희가 박탈감 느끼냐 이런건 논점이탈 같구요.
결론적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과정이 공정하지 않으니까 그걸 문제제기 하는것 같아요. 특히 요즘 같은 취업난에서는 더 그렇구요. 4년제 대학 나와서 스펙 쌓아서 누가 보안요원, 청경 하려고 하겠냐는 논지의 이야기도 본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용역이라서 안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하려는 사람 넘칠겁니다. 그 과정에서 1,900명 정도의 인원이 수혜 받은건 사실이구요.
지금까지 비교적 쉽게 들어왔던 인국공 보안요원직이
이번 정규직 전환 사태를 겪고 나서도
낮은 스펙(거의 무스펙에 가까운)으로도 쉽게 입사가 될까하는 의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전처럼 알바몬에서 모집? 어림반푼어치도 없다고 생각하구요. 이제 다음 기수 인국공 보안요원직 모집때부터는 경쟁률 박터지고 스펙 이것 저것 따지기 시작할겁니다.
그 동안 비정규직으로 후려친게 문제네, 서로 잘 되면 좋지 왜 너희가 박탈감 느끼냐 이런건 논점이탈 같구요.
결론적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과정이 공정하지 않으니까 그걸 문제제기 하는것 같아요. 특히 요즘 같은 취업난에서는 더 그렇구요. 4년제 대학 나와서 스펙 쌓아서 누가 보안요원, 청경 하려고 하겠냐는 논지의 이야기도 본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용역이라서 안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하려는 사람 넘칠겁니다. 그 과정에서 1,900명 정도의 인원이 수혜 받은건 사실이구요.
인권을 인간의 발명품으로 보는 관점에서 효용과 당위를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죠? 당위도 효용을 위해 인간이 설정한 합의일 뿐인데
개인적으로는 노력한다고해서 어떠한 것을 받을 수 있을것이라는 무조건적인 값은 없겠지요.
하지만 정치에서는 사람들이 (공정한 상황에서) 노력을 하면, 정의로운 결과값을 받는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 결국 목적이 되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하면 떠오르는 캐치프레이즈인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가 지지층에 상관없이 각광을 받았던 것 같구요.
결과가 정의롭다는건 사람들이 정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다만 작금의 상황은 과연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이 담보되느냐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사람들이 (공정한 상황에서) 노력을 하면, 정의로운 결과값을 받는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 결국 목적이 되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하면 떠오르는 캐치프레이즈인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가 지지층에 상관없이 각광을 받았던 것 같구요.
결과가 정의롭다는건 사람들이 정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다만 작금의 상황은 과연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이 담보되느냐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DX루카포드 님// 차원이 다르다와 연속적이다는 불가분이 아닙니다. 경계가 연속적이지만 차원은 다릅니다. 누구나 동의하는 당위, 당위로 보기에 충분한 당위, 당위로 보기에 미약한 당위 혹은 관습, 당위적이지 않은 관습, 그냥 관습 등은 연속적으로 존재하겠고 당연히 중간에 애매한 애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동의하는 당위와, 당위적이지 않은 관습이 비슷한 건 아니죠. 굳이 애매한 애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시다면 저도 애매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애매하지 않은 애들까지 그 논리로 끌어들이고 싶으시면, 애초에 그것들... 더 보기
DX루카포드 님// 차원이 다르다와 연속적이다는 불가분이 아닙니다. 경계가 연속적이지만 차원은 다릅니다. 누구나 동의하는 당위, 당위로 보기에 충분한 당위, 당위로 보기에 미약한 당위 혹은 관습, 당위적이지 않은 관습, 그냥 관습 등은 연속적으로 존재하겠고 당연히 중간에 애매한 애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동의하는 당위와, 당위적이지 않은 관습이 비슷한 건 아니죠. 굳이 애매한 애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시다면 저도 애매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애매하지 않은 애들까지 그 논리로 끌어들이고 싶으시면, 애초에 그것들을 대상으로 한 얘기가 아니다고 답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인권 같은건 거의 디폴트 오브 디폴트기 때문에 사실 이걸 제껴서 특별히 논의가 편해질 건 없어요. 제가 논의의 편의를 위해 제낀 문제를 지적하고 싶으시다면(그럴 필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더 애매한걸 가져오셔야죠.
그래도 한국에는 예로부터 과거시험이라는게 있었고 공부해서 시험봐서 성공해서 행복해지는 공식이라는게 있었고 그게 문화이자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인 사람들이 많은데 그걸 한방에 쳐내면 빡치지 않을까합니다. 애초에 나라의 제도가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것 자체가 잘못된거긴 한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공부 = 성공 이라는 공식이라는 사회적 동의 내지는 부모님의 가르침 아래서 자라온 세대가 현 20대 후반~ 30대 초반인데 그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나랏님이 정해주신 과거시험과 그걸 위한 공부를 해온것인가 하는 분노가 차오르는... 더 보기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공부 = 성공 이라는 공식이라는 사회적 동의 내지는 부모님의 가르침 아래서 자라온 세대가 현 20대 후반~ 30대 초반인데 그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나랏님이 정해주신 과거시험과 그걸 위한 공부를 해온것인가 하는 분노가 차오르는... 더 보기
그래도 한국에는 예로부터 과거시험이라는게 있었고 공부해서 시험봐서 성공해서 행복해지는 공식이라는게 있었고 그게 문화이자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인 사람들이 많은데 그걸 한방에 쳐내면 빡치지 않을까합니다. 애초에 나라의 제도가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것 자체가 잘못된거긴 한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공부 = 성공 이라는 공식이라는 사회적 동의 내지는 부모님의 가르침 아래서 자라온 세대가 현 20대 후반~ 30대 초반인데 그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나랏님이 정해주신 과거시험과 그걸 위한 공부를 해온것인가 하는 분노가 차오르는건 당연한거죠. 당위성은 없지만요.
거칠게 말해서 어차피 이렇게 될거 남들 연애하고 섹스할때 같이 섹스하고 연애하고 젊은 시절 공부같은 쓰잘데기 없는거에 허비하지 말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오겠죠. 이것도 당위성은 없지만 빡치고 후회되고 x같은건 변함이 없습니다. 요즘 10대들은 공부 잘하는것보다 외모가 좋아서 유튜버를 하는게 더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현 20대~30대는 초등학교때부터 원하는 직업 1순위가 의사 판사로 좁혀지던 세대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공부 = 성공 이라는 공식이라는 사회적 동의 내지는 부모님의 가르침 아래서 자라온 세대가 현 20대 후반~ 30대 초반인데 그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나랏님이 정해주신 과거시험과 그걸 위한 공부를 해온것인가 하는 분노가 차오르는건 당연한거죠. 당위성은 없지만요.
거칠게 말해서 어차피 이렇게 될거 남들 연애하고 섹스할때 같이 섹스하고 연애하고 젊은 시절 공부같은 쓰잘데기 없는거에 허비하지 말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오겠죠. 이것도 당위성은 없지만 빡치고 후회되고 x같은건 변함이 없습니다. 요즘 10대들은 공부 잘하는것보다 외모가 좋아서 유튜버를 하는게 더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현 20대~30대는 초등학교때부터 원하는 직업 1순위가 의사 판사로 좁혀지던 세대였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self entitlement 라는 축약된 표현으로 비판하죠. 자기애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너 자신을 사랑하라 같이 요근래 남발되는 처세적 교훈이 그렇게 강조할만한 것인지 의문이 들때가 있습니다. 개인 경험상 오히려 마음의 평안은 자기애에서 오는게 아니라 자기 무관심에서 오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세상에는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되는 일이 있고 되면 되는대로 안되면 안되는대로 그러려니 하면서 살자 같은 태도 말이죠. 혹자는 이게 가능하면 성인군자 아니냐고 쿠사리 주... 더 보기
영어권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self entitlement 라는 축약된 표현으로 비판하죠. 자기애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너 자신을 사랑하라 같이 요근래 남발되는 처세적 교훈이 그렇게 강조할만한 것인지 의문이 들때가 있습니다. 개인 경험상 오히려 마음의 평안은 자기애에서 오는게 아니라 자기 무관심에서 오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세상에는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되는 일이 있고 되면 되는대로 안되면 안되는대로 그러려니 하면서 살자 같은 태도 말이죠. 혹자는 이게 가능하면 성인군자 아니냐고 쿠사리 주겠지만 사실 저건 남 좋으라고 그러는게 아니라 본인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꽤나 이기적이며 소시민적인 태도죠. 반대로 본인이 예지한 어떠한 상에 비추어 세상의 타부당을 재단하는 것이 성인군자의 면모를 닮은 것이고요. 결국 아다리를 맞추려면 처세는 이기적으로 공적 가치는 이상주의적으로 가는게 맞고요.
한국은 강준만이 표현한 소용돌이 문화, 즉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주변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망과 사회적 압박이 개개인에게 강하게 작용하는 국가입니다. 그 에너지와 역동성이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개개인에게는 큰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겠지요. 역설적으로 계층/신분이동이 어렵고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하는 시대, 사회의 개인은 자기무관심이 보다 수월했을 겁니다. 각각 일장일단이 있으나 뭐든 적당한 것이 좋은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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