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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10 20:47:14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시작도 못하고 과외 짤린 썰 (2): 끝날 때 까지는 끝난게 아니다.
전편: https://kongcha.net/?b=3&n=1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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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첫 시도가 쓰라린 실패로 끝났지만, 그럼에도 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몇차례 과외 문의가 오긴 했었다. 공부법 질문하는척 하면서 간만 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개중에는 집에 찾아가서 OT를 한 경우도 있었다. 노트북과 파워포인트까지 들고가서 열심히 강의를 했지만, 결국에는 안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패가 반복되자 나도 조금씩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대학생활의 꽃이라고들 하는 신입생 라이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었다. 과 행사다, 동아리 행사다, 동기들간의 술자리다 이런게 많았고, 점차 나도 놀기가 바빠서 알바 따위는 흥미를 점차 잃기 시작했다. 물론 보습학원의 보조 직원이나 월급쟁이 과외교사 등등 대안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알바가 급한 것은 아니었어서 손을 대지는 않았었다.

어차피 노는데 바빠서 하루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과외를 못 구해서 그 자체로 아깝다는 생각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보다도,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익힌 노하우를 그대로 사장시켜야만 한다는 사실이 솔직히 더 어까웠다.

그런 부분에서 강사들보다는 실전에서 얻어 터져가며 경험을 쌓은 내가 조금이라도 유용한 조언을 해서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고 지갑을 여는 학부모들 눈에는 내가 그리 믿음직스런 과외선생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간에, 완전히 자신감을 잃어버린 나는 "그래 기왕 이렇게 된거 좋은 일이나 하자." 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노하우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동네 성당 인싸(?)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성당에서 입시제도와 수험전략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나로서는 예비 고3들이 와서 좀 들었으면 했는데, 정작 온 사람은 대부분 학부모들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나름대로 반응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강의를 하고 나서 며칠 뒤 아버지에게 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학부모가 내게 과외를 맡기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날 강의에 오셨던 분이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강의는 순수히 봉사라는 생각으로 했기 때문에 그걸로 과외를 할 생각이나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 소개로 찾아온 사람이니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한번 학생을 찾아가서 만나보기로 했다.

성당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위치는 내가 다니던 헬스장 바로 옆 아파트였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 간다고 대학 앞 서점에서 교재로 쓸 EBS 문제집도 사서 학생의 집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지난번의 그 청와대 운운하는 학부모와는 달리 학부모 쪽이 내게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 쪽이 전혀 열의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일단은 학생, 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3명이 부엌 식탁에 앉아서 앞으로 할 수업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OT를 했다. 학부모는 마음에 들어했고, 학생도 막판에는 하겠다는 식으로 태도가 바뀌었었다. 그래서 과외를 진행하기로 하고 시간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첫 과외비로 50만원이 입금이 되었다. 대학생이었던 나로서는 내 힘으로 그렇게 큰 돈을 벌어본 것은 처음이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정식으로 수업을 하기로 한 며칠 전에 그 학부모로부터 내게 연락이 왔다. '애가 도저히 하기 싫어해서 어쩔 수 없다. 과외는 취소할 테니 첫달 과외비는 환불 부탁한다.' 는 취지의 연락이 왔다. 속으로는 아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동네 은행 ATM으로 50만원을 그대로 돌려 드렸다. 하...

그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과외를 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어떤 포부를 품었건 간에, 어쨌거나 학부모 쪽에서 나를 고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는 했다. 대치동 1타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10만원이면 들을 수 있는 세상에, 쥐뿔도 모르는 대학생 과외선생을 더 비싼 돈을 주고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설령 선생을 쓴다고 해도, 정말 어지간히 믿을만한 집 자식이 아닌 이상에는(가령 서울대 의대를 다니는 사촌형이라던가), 어지간하면 인터넷 이력서나 인맥을 통한 소개 정도로는 고용주에게 신뢰를 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도 설렁설렁 다니는 1학년도 끝나가고 점차 전공과목 수강도 늘어나면서 과외에 매달릴 여유도 점점 줄어들기도 했었다.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해볼 때가 아직도 있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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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3~4부작 정도를 기획했었는데, 소재가 너무 노잼이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번 편도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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