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8/05 14:25:33
Name   심해냉장고
Subject   내 작은 영웅의 체크카드
그러니까, 체크카드였다고요.
아, 네.
이게 무슨 말인 줄 알죠?
아, 네.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렇다, 아무래도 뭐랄까 체크카드라는 건 어른의 세계에서 격이 떨어지는 그런 아이템이니까. 어른이라면 역시 신용카드다. 물론 사장은 '어른이라면 역시 현금이지. 왜, 유명한 만화에도 나오잖아. 100만원도 안되는 술값을 카드로 결제하는 건 애새끼나 하는 짓이라고.' 라는 이상한 철학을 들먹이며 손님들에게 현금 결제를 종용하는 편이었지만, 역시 어른이라면 신용카드인 것이다. 신용이 있어야 하고, 소득이 있어야 하는, 계획적인 소비생활을 위한 첫걸음 신용카드 말이다.

그래서 카운터에서 레드락 한 잔을 주문해서 갔다줬어요.

좋았겠네요, 라고 말을 하려다 그닥 좋은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베이시스트가 클럽에서 공연 준비를 하다가 나를 알아보고, 음향 테스트를 하다가 내게 '카운터에서 레드락 한 잔만 사다주세요' 라며 카드를 건낸다는 건 역시 좋은 일일 거 같지만, 어른의 세계란 그보다 복잡한 법일 테니까.

아니, 마흔 둘이라고 그 사람. 마흔 둘이 체크카드를 쓰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그녀는 그녀와 나 사이의 카운터에 놓인, 그녀의 맥주에게 그렇게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마흔 둘도 체크카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홍대의 작은 뮤직바에서 일하며 밴드를 하는 나의 세계와 변호사로 일하며 공연을 찾는 그녀의 세계관이란 많이 다를 것이다. 좀 더 슬픈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그녀가 말하는 마흔 둘 그 사람을 그 문제의 인간을 안다. 공연에서 몇 번 스쳤던 적이 있다. 술자리도 한번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오늘처럼 비가 오던 날이라 공연은 폭망했고, 지인들조차 몇 없었다. 꽤나 떠들썩한-그리고 단 한명도 그들을 보러 오지 않은-펑크밴드의 드럼 친구가 '이럴 때는 역시 소주 아닙니까' 라고 운을 띄워 마시게 된 날이었다. 그때도 그는 체크카드를 내밀었는데, 은행 점검 시간이라 결제가 되지 않았다. '형 신용카드 없어요?' 라고 거나하게 취한 우리 밴드 베이시스트가 말했다. 형은 그윽한 우수에 찬 눈빛으로 '있겠냐 씨뱅아 너도 베이스를 10년을 더 쳐봐라 지금 있는 신용카드도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소주를 두어 병 더 마시며 점검 시간을 넘기고, 형의 체크카드로 무사히 결제를 했다. 홍대에서 베이시스트로 15년을 활동한다는 건 대충 그런 뜻이다. 이틀 뒤에 우리 밴드 베이시스트 친구는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 공장 일을 돕기 시작했고 내가 밴드의 베이스를 맡게 되었다.

내 카드로 결제할까 했는데, 역시 그것도 실례일 거 같아서 그사람 카드로 그냥 결제해서 갔다줬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내 카드로 두 잔 긁어서 한잔씩 나눴으면 안 이상했을 텐데.

형은 신용카드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섬세하고 멋진 팬을 가졌구나. 부러운 걸. 내 팬 중에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려다 바로 그만두었다. 일단 나는 아직 내 팬이랄 사람도 없으니까. 팬이 있는 베이시스트라니, 그건 신용카드가 있는 베이시스트만큼 위대한 존재다. 사실 저도 밴드를 해요, 라고 명함이라도 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내가 더 잘 하다보면 뭐든 되겠지. 창밖으로는 계속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형 밴드의 음악을 걸까 하다가 너무 유치한 짓인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우리 밴드의 음악을 거는 것도 유치한 것 같아 그 날 소주를 마시자고 한 그 펑크밴드 친구들의 음악을 걸었다.  음악은 좀 유치하지만(우리 밴드 쪽이 역시 낫다) 그래도 나라는 사람은 덜 유치해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 맞다. 싸인.
네?

그녀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명함 사이즈의 코팅한 종이 위에는 그 형의 이름이 삐둘빼뚤 써 있었다. 그 형 저렇게 악필이었나. 악필인지 아닌지 알 정도로 친한 건 아니지만.

7년 전 공연에서 받았던 싸인인데, 체크카드 뒷면에 써 있는 싸인하고 똑같더라구요. 그래서 엄청 웃겼어요.

부럽군. 형 연락처가 나한테 아직 있던가. 친구 두엇을 타고 넘어가면 못 구할 연락처는 아니지만 굳이 찾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손님이 가면 내 폰을 확인해보자. 운좋게 연락처가 있다면 장마가 가기 전에 형에게 술을 한잔 사야겠다. 오늘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지. 그저 인생과 베이스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물어보고 배워볼 생각이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8-15 10:4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6
  • 철없던 시절 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린 꿈꾸어 왔지. 노래여, 영원히.
  • 춫천
  • 멋스러운 꿈, 멋스러운 인생, 멋스러운 글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2 문학토마 피케티 - 자본과 이데올로기 리뷰(아이티 혁명을 중심으로) 9 에피타 20/10/03 5319 21
1011 문화/예술여백이 없는 나라 13 아침커피 20/09/29 6270 36
1010 경제주식투자, 튜토리얼부터 레이드까지 37 기아트윈스 20/09/23 7775 28
1009 문화/예술초가집과 모찌떡과 랩실 7 아침커피 20/09/24 4545 17
1008 일상/생각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인가 15 에피타 20/09/23 5590 26
1007 일상/생각가난해야만하는 사람들 53 rustysaber 20/09/20 6816 25
1006 기타온라인 쇼핑 관련 Tip..?! - 판매자 관점에서... 2 니누얼 20/09/16 4357 12
1005 일상/생각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 되지 마세요. 27 Schweigen 20/09/07 7669 70
1004 철학/종교나이롱 신자가 써보는 비대면예배에 대한 단상 14 T.Robin 20/08/31 5022 6
1003 문화/예술한복의 멋, 양복의 스타일 3 아침커피 20/08/30 4902 5
1002 요리/음식토마토 파스타 맛의 구조와 설계 그리고 변주 - 1 21 나루 20/08/26 5926 14
1001 일상/생각타임라인에서 공부한 의료파업에 대한 생각정리 43 거소 20/08/25 8809 82
1000 일상/생각뉴스 안보고 1달 살아보기 결과 10 2020禁유튜브 20/08/18 6145 29
999 정치/사회섹슈얼리티 시리즈 (7) - 마이 리틀 섹시 포니 28 호라타래 20/08/18 7238 25
998 문화/예술술도 차도 아닌 것의 맛 7 아침커피 20/08/17 4603 19
997 요리/음식대단할거 없는 이탤리안 흉내내기. 15 legrand 20/08/16 5236 22
996 여행[사진多/스압]푸른 파도의 섬 - 울릉도 이것저것 23 나단 20/08/15 4935 18
995 일상/생각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16 ikuk 20/08/12 5132 30
994 철학/종교최소한 시신은 없었다 6 아침커피 20/08/10 5415 17
993 일상/생각설거지 하면서 세탁기 돌려놓지 말자 24 아침커피 20/08/06 6142 49
992 창작내 작은 영웅의 체크카드 4 심해냉장고 20/08/05 5429 16
991 문학사랑하는 법 26 아침커피 20/07/28 5535 36
990 역사1911년 영국 상원의 탄생 2 코리몬테아스 20/07/27 4614 6
989 여행속초, 강릉 여행 가볍게(?) 정리 36 수영 20/07/27 5692 9
988 문화/예술지금까지 써본 카메라 이야기(#03) – Leica X2 (이미지 다량 포함) 12 *alchemist* 20/07/23 5195 7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