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10/21 23:40:35수정됨
Name   멍청똑똑이
Subject   체온 가까이의 온도
종일 양 쪽의 이해관계 가운데에서 시달리며, 내가 이혼법정의 변호사인지 개발자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즈음에 회의의 풍랑은 잦아들었다. 악필로 흘려 쓰며 잔뜩 메모한 회의록을 워드의 양식에 맞게 옮기며, 적절한 모양새의 어휘를 고른다. 서로의 욕심이 진하게 배인 단어들을 곱게 갈아내고 깎아내노라면 마음이 시끌벅적 해진다. 분명 회의가 끝났는데도 귓가에 앵앵대는 말들.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것으로 정신을 차린다.



겨우 한 바닥의 이메일을 써내고 의자에 기대어 축 늘어진다. 내 덩치에 비해서는 작은 사무실 의자가 불쌍하리만큼 몸을 푹 쑤셔 넣는다. 이런 일을 하고 나면 코드는 한 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를 잔뜩 입에 머금고, 미지근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꿀꺽, 하고 식도가 아플 정도로 한 번에 삼킨다. 시끄러운 것들이 조금은 쓸려내려 가는 기분이다.



회사 일이 재밌는 점은 일을 하고 힘이 들어도 일은 있다는 점이다. 힘들면 쉬었다가 하라지만 쉬는 동안 일은 줄어들지 않는다. 수산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점점 눈빛이 바래가는 죽은 생선 같은 얼굴을 하고 늘 만지작 대던 코드를 따라 친다. 특별히 생각할 것이 없는 코드를 두들기다가, 문득 외롭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외로울 때면 온기를 찾는다. 따뜻한 음식보다는 따뜻하게 만질 수 있는 것이 좋다. 내가 주로 좋아하는 것은 보일러 바닥에 개어둔 따끈한 솜이불을 끌어안는 것이다. 덥혀진 두툼한 솜이불을 둘둘 말아 품에 끌어안고 새우등을 한 채 흰 벽지의 벽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아니, 생각이 느려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솜이불의 온도는 조금 따끈하다 싶다가도, 이내 체온과 닮은 온도에 가까워진다. 나는 체온이 좋다. 내가 하루에 가장 많이 만지는 것은 키보드일 것이다. 코드를 짤 때도, 글을 쓸 때도 내 손은 키보드를 만진다. 나는 키보드에도 가끔 체온 정도의 온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좀 더울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런 날에는 일을 하는 동안에 솜이불을 끌어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아무나 가서 끌어안을 수도 없다. 내가 만질 수 있는 것 중에 키보드 만한 것도 없긴 하니까.



왜 사람은 자신의 온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타인의 온도를 찾아서 서성일까. 타인의 온도를 찾지 못해 비슷한 거라도 끌어안고 싶어 할까. 예전에는 사람의 체온이 그립다는 말에 대체로 섹스를 떠올렸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좀 덜 밝히게 된 걸 수도 있고. 어쨌거나, 사람은 제 몸의 온도만큼이나 따뜻한 것을 때때로 끌어안고, 만지고 싶어 지기 마련 아닐까 싶은 것이다. 어쩌면 그거야 말로, 고독은 어디에고 있다는 말을 잘 나타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아닌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느끼는 데에 손길에 닿는 온도만큼 진실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차가운 것을 만지기 위해 살아간다. 그 차가운 것들은 무척 중요한 것들이지만, (이를테면 키보드처럼) 따스함을 빌릴 수는 없다.



일을 겨우 끝내고 나머지 공부를 시작한다. 10분짜리 강의를 이해하기 위해 두 시간 가까이 머리를 싸매며, 나의 외로움도 조금 옅어져 갔다. 잔뜩 시끄러웠던 것들이 가라앉고 난 뒤에 공허감은 다시 알쏭달쏭한 것들로 채워졌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갈 준비를 하니, 외로움 대신 허기짐이 밀렸다. 뜨끈한 국밥 정도면, 외로움을 달래기엔 조금 과하지만 허기짐을 달래기엔 그 만한 것도 없다 싶었다. 모든 것이, 그럭저럭 견딜만하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고, 딱 그만큼 국밥이 맛있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11-03 21:4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6
  • 추게를 독점하실 생각이십니까...?
  • 국밥 최고오!
  • 추게를 독점하실 생각이십니까...?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 기타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843 31
1417 기타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27 31
1416 기타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906 20
1415 기타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734 18
1414 기타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931 36
1413 기타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4 심해냉장고 24/10/20 1548 40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850 16
1411 기타『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942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219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75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12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42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1977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93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39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906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686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582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87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61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79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29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076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50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51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