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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06 06:12:24
Name   박초롱
Subject   잘 지내요?.. (4)
1편 https://kongcha.net/?b=3&n=198
2편 https://kongcha.net/?b=3&n=204
3편 https://kongcha.net/?b=3&n=215




#4.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면 그 빈 자리를 굳이 메꾸려 들지 않아도 될 텐데.




그녀의 부모님과 작별을 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페이스북은 문을 닫았다. 어차피 글을 남기는 사람들도 페이스북에 방문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어 내가 들어가는 날이면 방문자수 1이 간신히 올라가는 정도로 휑해졌었지만 그래도 왠지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메신저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사라졌다. 그냥 이름이라도 띄워놓고 있으면 언젠가 로그인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놔뒀었는데 회사에 직접 문의해보니 오랫동안 접속이 되지 않아 휴면계정이 된 것도 있고 유족의 요청도 있었다 한다. 참 쉽게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주변 사람들의 SNS에서 그녀의 사진이 점점 사라져갔다. 한 때를 추억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 추억의 자리에 다른 기억들로 메꾸기 시작했다. 그들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사는 거니까. 슬픔은 빨리 잊고 기쁨을 오래 기억하는 것이 행복한 삶일 테니까.




시간은 다시 또 흘러 겨울이 왔다. 몇 년 만에 그 곳에 눈 소식이 있다 한다. 나도 모르게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애초에 나와는 연고가 없는 곳이기에 딱히 아는 곳도 없고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기차역에 내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고 정처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가 살던 그 곳에 다다랐다.

주차장에 내린 눈을 자박자박 밟으며 걷다 눈을 치우고 계신 경비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도망치듯 얼른 뒤돌았다 혹시 몰라 다가가 물었다. 역시나 가을 즈음 두 분은 이사를 가셨다 한다. 그래도 이사가기 전 동네 행사에도 곧잘 참석하시고 이웃분들과 두루두루 인사도 하고 다니셨다 하니 마음이 괜스레 편안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아파트 복도 난간에 기대어 먼 경치를 바라본다. 눈이 내렸어도 역시 서울보단 동네가 따스하다. 그래도 너는 추웠을 테지. 그리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국화라도 하나 사서 놓고 가볼까 생각했다가 동네 주민들이 재수없게 생각할까 소심한 마음에 편의점을 들러 그녀가 좋아하던 츄파춥스를 몇 개 샀다. 그래, 뭐 이 정도면 내 나름의 성의는 보인거야 하며 다시 복도에 올라갔더니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아가들아 여기서 놀면 미끄럽고 위험해요 형아가 츄파춥스 줄테니 집에 들어가서 놀으련. 세련된 서울 말투에 놀랬는지 우물쭈물 쳐다보다 일동 꾸벅 인사를 하더니 우르르 집으로 들어간다. 아이고 귀여워라. 주머니를 더듬어보니 아뿔싸 츄파춥스가 남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마음만 받아라 어차피 먹지도 못하는 거.

그 날 나는 그 곳에 많은 것을 내려두고 오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내내 마음은 더 무겁기만 했다.




어차피 겨울은 끝나고 봄은 온다. 그리고 새 학기도 시작된다. 파릇파릇하던 신입생들은 어느새 퀴퀴한 꼰대들이 되어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을 가르치려 든다. 그리고 나는 해마다 어찌할 수 없이 그녀를 잃었던 그 계절과 뒤이어 그녀를 만났던 그 계절을 마주한다.

교정을 거닐다 보면 아직도 그녀가 눈에 밟힐 때가 많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 동안에 우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 중에서도 그녀와 내가 가장 애정했던 공간은 캠퍼스 가장 후미진 구석에 위치한 미대 건물의 옥상이었다.

미알못의 눈으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조형물들을 지나 물감으로 떡칠된 캔버스가 여기 저기 쌓여 있는 야외 계단을 오르면 학교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그 곳이 있다. 특히 이 곳은 작업을 하는 미대생들이 많아서인지 24시간 거의 개방이 되어 있었기에 밤늦게 맥주 한 캔씩 들고 교정을 거닐다 마지막에 이 곳에 도착해 간간히 켜진 가로등이 밝히고 있는 캠퍼스와 그 너머로 보이는 네온 사인들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다. 굳이 덧붙이자면 조명이 없이 어스름이 은은한 게 좋았던 것도 있지만.




오늘은 그녀가 없으니 그녀의 몫까지 맥주를 사들고 오랜만에 야외 계단을 오른다. 저녁 시간 대라서 그런가 각종 배달을 하는 분들이 오르락 내리락한다. 역시 압도적인 비율의 치느님들. 미대생들도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구나.

휴대폰을 열어 그녀의 번호를 기억하고 있는지 다이얼을 눌러본다. 어찌 보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그녀의 흔적. 여전히 나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보다 손이, 손보다 가슴이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가보다.

바람이 분다. 초여름의 바람이 분다. 이 계절의 바람은 생각보다 쌀쌀하지만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서인지 선선하게만 느껴진다. 그녀와 함께 했던 그 바람들을 나는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바람에 그녀도 함께 불어온다. 담뱃불이 빠알갛게 타오르다 사그라든다.

보고싶다. 아니. 볼 수 없다.
소식이라도 알고 싶다. 아니. 알 수 없다.
그녀는 너무나 먼 곳에 있다. 이미 나와는 다른 공기에서 숨을 쉬고 나와는 다른 하늘 아래에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술김에 나도 모르게 문자를 보냈다.




시끌시끌하던 학관은 어느새 조용하다. 학관 마당에 비춰지는 불빛들을 보니 이제 남은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가로등도 몇 개 남지 않아 어둑어둑해진 풍경을 보아 하니 시간이 꽤나 많이 흐른 듯 하다. 저녁 나절 서쪽 하늘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초승달은 벌써 퇴근한 지 오래다.

머리는 깨질듯이 아프고 몸은 바들바들 떨린다. 초여름의 밤은 생각보다 매섭다. 가뜩이나 술이 깨는 와중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 하다. 차가운 벽에 오랫동안 닿아 있던 등은 감각이 없다.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쉽사리 되지 않는다. 뚜둑거리는 관절하며 잘 구부러지지 않는 무릎하며 무엇보다 고작 그 정도의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잠들다니. 나도 많이 약해진 모양이다.

그냥. 신발을 벗고 옥상 바닥에 발을 대보았다. 차갑다.
양말도 벗고 바닥에 발을 대보았다. 차갑다.
괜히 불어오는 바람마저 더 춥게 느껴진다. 한바탕 몸서리를 치고 나니 갑자기 어디서 오는지 모를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얼마나 추웠을까. 지금의 나보다 추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금의 나보다 외로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지금의 나보다 무서웠을까.
그리고 얼마나 아팠을까.




사실,
그녀가 멀리 가기 며칠 전부터 그녀와 통화할 때마다 나는 뭔가 말못한 사정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나는 다른 일로 정신이 없었고 으레 연인들이 하는 안부 정도만 이야기하고는 전화를 끊곤 했었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왜 그랬을까.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에게.

그녀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내가 있었지만 내가 그러지 못했고.
나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그녀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어머님 죄송해요. 사실 제가 나쁜 놈이에요.
아버님 죄송해요. 사실 제가 쓰레기였어요.
제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이렇게 어머님도 아버님도 저도 슬프지 않았을 수도 있었어요.
그녀가 내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할 일도 없었을 거에요.

하지만 만약은 없다.
그리고 그녀도 없다.
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이제껏 답문이 없는 걸 보면 번호도 바꾸신 모양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이미 야심한 시간임을 깨닫고 종료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그냥 한 번 난간 위에 올라서 본다.

바람이 차다.
그리고 익숙한 벨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터져나온다. 그녀가 떠난 후 단 한 번도 이 정도로 울어본 적이 없다. 처음 과대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녀의 앞에 향을 태우던 그 날도, 그녀의 편지를 읽던 그 순간에도, 그녀의 부모님과 작별하고 올라오던 그 버스 안에서도 그저 나는 눈물을 삼키며 속으로 삭히곤 했었다. 허나, 끅끅 올라오는 울음은 어느새 엉엉 우는 울음으로 터져나왔다. 쪽팔리게 남자가.





호기심에 건 전화는 왠 시커먼 남자의 울음으로 시작되어 장장 두 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오밤중에 칙칙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그의 이야기는 끊을 수가 없었다. 언제 끝까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생각보다 연애사를 듣는 것이 흥미로운 것도 있고. 결말은 비록 새드 엔딩이었지만.

길고 긴 이야기를 마친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조금은 후련한 목소리로 뜻밖의 감사를 표했다. 그래요. 내가 좀 수고하긴 했죠. 언제 시간이 나면 밥이나 한 번 먹자는 기약없는 약속으로 전화를 끊고서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얘기를 듣기만 했는데도 목이 탄다. 침대로 돌아와 다시 누우니 그 사이 누군가 베개에 물을 뿌려 놓았는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베개를 뒤집곤 잠을 청했다.




토요일에 과외를 가서 수업을 마치곤 청순한 여고생에게 그 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의 중반을 지나서부터는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다 듣고서는 으엉 하고 울어버린다. 과일을 깎아 간식으로 내어주기 위해 방에 들어오시던 여고생의 어머님은 깜짝 놀라 나에게 자초지종을 물으셨다. 애가 우는데 뭔가 다른 핑계를 대기는 그렇고 별 수 없이 어머님께도 이야기를 해드렸다. 이야기를 다 들은 어머님은 갑자기 청순 여고생을 부둥켜 안고 울며 아이고 우리 이쁜 딸 하고 느닷없는 사랑 고백을 하기 시작했고 청순 여고생은 엄마 앞으로 잘 할게요 하며 통곡을 한다. 그렇게 눈물로 가득한 모녀의 애정돋는 모습에 뻘쭘한 나는 이쑤시개를 들어 사과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 Tob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6-1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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