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10/17 15:19:45
Name   틸트
Subject   노래에는 삶의 냄새가 너무 쉽게 깃들어.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 친구. 울림이 좋다. 그는 나보다 여섯 살 정도 많고, 나와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았다. 사실상 우리 사이의 공통점이라고는 전공이 같다는 것 밖에 없었다. 몇년 전 우연히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전공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된 것 같은 기억인데, 이제는 희미하다. 우리는 그렇다면 제법 오랜 친구다. 나는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는 음악을 정말로 좋아했고, 그렇게 음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프로듀서가 되었다. 사회학과 졸업생다운 직업이다. 사회학과 졸업생이란 대체로 뭘 전공해야 저런 직업을 가지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 기획사의 프로듀서라거나, 소설가라거나. 영화 감독이라거나. 드러머라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은 음악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요즘 작업하고 있는 음악 이야기를 했고 나는 요즘 듣고 있는 음악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당신이 잡았으니 이야기의 내용은 내가 더 채울 것이다, 라는 각오로 신이 나서 마구 떠들어댔다. 요즘 계속 aiko만 듣고 있어요. 올해 콘서트만 세 번 갔다니까. 그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특별히 계기라도 있나?

나는 짧게 생각하고 길게 대답했다.

글쎄, 듣기 시작한 지는 십몇 년 되었지만, 한 이 년쯤 전부터 미친 듯이 들었던 것 같은데. 최근 일이년 동안 여러가지로 힘들었어요. 어찌 생각하면 지금 살아있는 게 다행이라니까. 찌르면 바늘이 엉엉 울며 피를 흘릴 것 같은 냉혈한 친구가 '너 요즘 진짜 힘들기는 하겠다. 이 내가 인정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좀 지치다 보니까, 옛날에 정말 좋아했던 노래들을 못 듣겠더라고요. 시끄럽고, 힘들어. 처음으로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운 노래는 Unplugged in New york 버전의 On a plain이었어요. 두 번째로 지운 노래는 Live at Reading의 On a plain이었고. 그리고 그렇게 거슬리는 노래들을 하나하나 지우다보니 저 두 앨범을 통째로 지워버리게 되었어요. 앨범 두 개를 지우고 나니, 플레이리스트를 지우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귀에 걸리적거리는 노래들을 하나하나 지우다보니, 너바나는 앨범 한 개 남고, 자우림은 전멸. 시이나 링고는 몇 곡 안 남고, 히데는. 음. 리스트에 있지만 듣지 않으려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계속 aiko만 나오게 되었는데, 좋더라구요. 와 내가 이렇게 좋은 노래들을 십몇 년 동안 그냥 가볍게 생각없이 들어왔구나. '바다를 가위로 잘라 러브레터를 써 볼까나Power of love'라거나 ’이미 시작되었어. 싱겁게도 좋아하게 되어 버렸어帽子と水着と水平背.' 이런 가사들. 저런 멜로디들. 그렇게 쭉 듣다 보니 계속 좋아서, 그렇게 계속 들었어요.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견뎌왔고キラキラ', 그렇게 목숨 하나를 빚졌네요.

처음 지운 앨범은 어떤 의미가 있는 앨범인가요? 그는 음악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 예전에, 십년쯤 전에, 한번 목숨을 빚진 노래들. 되게 많이 힘든, 어쩌면 작년보다 힘들었던 시절에, 산책을 하면서 항상 저 앨범을 들었어요. 미친놈처럼 웃고 울면서 따라부르면서 휘적휘적 걷고 뛰고 걷고. 그렇게 한 시절을 살아갈 힘을 받은 노래인데. 근데 이상하게 이제는 그걸 못 듣겠더라고.

그래요. 음악이라는 건, 노래라는 건 거기 삶의 냄새가 너무 쉽게 배곤 하니까. 본인은 인지하지 못할 지 몰라도, 힘들었던 시절에 들었던 노래에는 그 삶의 기억이 묻게 되요. 그게 사람을 아프고 힘들게 할 때가 있는 거죠. 당신에게는 한 시절을 견디게 해 준 그 노래들이 그런 노래들이었나 보네요. 그렇게 노래를 떠나보낼 때가 된 거죠. 남겨둔 너바나의 앨범은, 엄청 어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멋있다! 좋다! 하고 들었던 앨범이죠?

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조금 놀랐기 때문이다. 요즘 듣는 너바나의 앨범은 Nevermind 뿐이고, 그 앨범은 내게 실제로 그런 앨범이었다. 아무 생각 없던 시절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듣던 앨범.

그래요, 그런 노래는 오래도록 편하게 들을 수 있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조용히 위스키를 마셨다. 한 번 목숨을 빚진 노래에게 두 번 빚질 수는 없는 거겠지. 그건 노래에 너무 부담을 주는 일일 테니까. 그러면 나는, 언젠가 나중에 또 죽을 만큼 힘들면, 우울하면, 여러 일들에 패배하면 나는 그 때 플레이리스트에서 aiko의 곡들을 하나하나 지우게 될까? 모를 일이다.

아니, 안다. 나는 지금 어떻게든 살아있고, 더 이상은 삶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럴 일은 없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0-30 09:19)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2
  • 공감되네요


*alchemist*
그러고보니 저도 자우림 안들은지 꽤 되었네요... 1,2,3,4집은 진짜 닳도록 들었고 5집은 그럭저럭 6,7집 안 듣고 8집은 분위기가 꽤 맘에 들어서 듣고 9집은 손도 안댔네요(특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저는 별로 안 와닿더군요) 더불어 김윤아도 희안하게 안 듣게 되었고...
아직 가을방학, 루시아, 프롬은 줄창 듣고 있는데 이것도 언젠가는 바뀌는 때가 오겠지요?

그나저나 노래가 삶의 순간에 깃드는 순간이라면...
저는 파리 몽파르나스 타워 옥상에서 일몰을 보고 멜랑꼴리한 기분에 들었던 루시아의 '어떤 날도, 어떤 말도'를 듣고 눈물 펑펑 쏟았던 걸 꼽을 수 있겠네요
흠.
빠져들어 읽었습니다.
힘들 때 들었던 노래들과, 아무 생각 없이 좋다고 들었던 노래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되네요.
(댓글 쓰다 말고 저도 모르게 플레이리스트를 뒤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한창 힘들 때 죽도록 들었던 노래들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네요. 그때만큼 자주 듣진 않지만요.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속의 그 놀라운 친구분께도 감사드리며, 저는 플레이리스트들 더 훑어보러 가겠습니다.
저는 돌아보니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된 곡들이 많네요. 언젠가 지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래에 추억과 순간들이 묻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그 추억과 순간들이 현재 나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_~
Darwin4078
저는 너바나 앨범중 요즘은 in utero만 듣습니다. 너바나 노래중 scentless apperentice를 제일 좋아합니다.
kkm 선생님 수업 듣고는 현재 콜센터 상담사 하고 있는 1인입니다. 사회학과 졸업생이란 이런 것일까요. 동정없는 세상에서도 대학 왜 가는지 가서 뭘 할지 모르겠다는 주인공에게 사회학과 권해주던 삼촌도 생각나고 그러네요.
아직도 어떤 곡들 들으면 그 곡을 주로 듣던 시기의 감성, 생각 어떤때는 날씨나 습도까지 너무 생생하게 환기되곤 하더라구요. 그래서 더 못 듣는 곡들도 있지요.
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 지식사회학자, 일 거라고 마음대로 상상해 봅니다. 음악을 듣고, 힘을 내고, 그와 상관없이 삶을 삽시다. 사회학의 몇 안 되는 교훈 아니겠습니까. 살아야 살아진다는 것.
그 분 맞습니다. 저도 그 분 수업 제일 좋아했는데 옆집에서 그 분 때문에 석사 진학 방향 고민하셨다는 글 보고 반가워서 기억했거든요. 말씀처럼 오늘 하루도 좋은 음악과 함께 힘을 내고 그와 상관없이 또 하루를 마무리 해야겠네요. 살아야 살아진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 밤입니다.
음악 미술에는 삶을 통찰한 사람들의 시선을 가끔 느낄수 있는데요. 둘 다..나 자신은 제일 못하는 분야라서 저는 관찰자일뿐...
음악을 지워나가는 과정이 저랑 비슷해서 소오름이.....
헤어진 여자 하나당 대충 노래 한 곡 씩이 매칭이 되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그 노래들을 못듣겠다가도 또 언젠가부터는 편히 들리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목숨을 빚지고 삶을 빚진 노래들은 듣기가 힘들어 지워나가거나 차마 지우지 못한 노래는 앞부분만 듣고 스킵하게되기도 하고.
호라타래
팉트님 글 너무 좋아요 >_< 감사합니다.
은채아빠
옛날에는 음악이 좋아서 들었는데, 5년여 쯤 전부터 귀를 막으려고 듣습니다.
그러다보니 Disturbed, Parkway Drive, The Prodigy... 처럼
쉴 틈 없이 소리가 크게 재생되는 아티스트만 선호하게 되네요....
글을 읽고 나니, 듣는 음악에 따라 성격도 변화된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습니다.
망손꽝손
음... 저도 그렇게 음악에 인생을 매칭해서 잘 듣곤 하는데... 스쳐지나간 남정네 하나에게 '그렇게 노래마다 감정을 부여하면 너무 힘들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덜 그래야지!!라고 머리로 생각하고 -_- 지금은 그때 그 남자와 그 이야기를 나누며 들었던 Razorlight의 America를 특정 기분/상황이 되면 꺼내 들어요 ㅋㅋㅋ.

아무튼.. 저두 예전에 듣던 음악을 지금 잘 못 꺼내 듣겠는 때가 있어요. 그때만큼 감정이 생생하게 안 올라오면, 괜히 현실에 안주하는 늙은이 꼰대가 되는구나..싶어서 듣기 싫어지더라고요. 가령 bittersweet symphony만 들으면 미친듯이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지금은 걸으면서 들으면 트랙 넘겨버리고 싶고, 운전하면서 들으면 운전할 맛은 나요. 시무룩...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25 음악2024 걸그룹 6/6 6 헬리제의우울 25/01/01 1168 26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2124 8
1151 음악2021 걸그룹 36 헬리제의우울 21/12/13 7096 58
714 음악 쉬어가는 페이지 - 음악으로 이어 보는 근대 유럽사의 한 장면 호타루 18/10/10 7157 5
603 음악Bossa Nova - 이파네마 해변에서 밀려온 파도 7 Erzenico 18/03/16 7086 9
577 음악자장가의 공포 81 문학소녀 18/01/15 10410 65
561 음악[번외] Jazz For Christmas Time - 국내 스트리밍 사이트를 중심으로 (3) 4 Erzenico 17/12/11 7271 3
541 음악Cool Jazz - 그대여, 그 쿨몽둥이는 내려놓아요. 4 Erzenico 17/11/07 7056 7
530 음악노래에는 삶의 냄새가 너무 쉽게 깃들어. 12 틸트 17/10/17 7578 22
445 음악세상은 이런 색을 하고 있었던 걸까 5 틸트 17/06/05 8218 7
438 음악Be human. 인간이기. 5 틸트 17/05/26 6806 11
344 음악등려군과 대북방송 이야기 17 기아트윈스 17/01/13 7355 7
186 음악홍차넷 지상파 입성 기념 뮤직비디오 246 Toby 16/04/20 14198 9
151 음악천재는 악필이다?? 15 표절작곡가 16/02/11 11084 4
73 음악클라리넷에 대해서 (1) - 소개 5 남화노선 15/09/19 8734 3
58 음악Jolene/Miriam - 상간녀를 대하는 두가지 태도 10 새의선물 15/08/05 9959 0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