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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5/05/16 10:24:23 |
Name | joel |
Subject | 축구에서 공간을 숫자로 해석해보기. |
축구 전문가들이 기고하는 경기 논평을 보면 다음과 같은 논평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A팀의 압박은 헐거웠고 B에게 공간을 허용했다.' 공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져 위기를 맞았다.' 같은 것들이요. 제가 축잘알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나름 축구를 좀 봤다는 팬인데도, 솔직히 저런 논평이 직관적으로 체감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얼만큼 거리가 벌어져야 공간을 허용한 것이고 간격이 지나치게 넓어진 것인지에 대한 수치적 기준이 없거든요. 결국 이건 오랫동안 축구를 보아 온 사람들의 감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축구가 다른 종목들과는 달리 데이터로 설명되기 힘든 스포츠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강조되는 것이 저러한 공간의 배분인데, 그걸 수치로 계량해낼 수가 없거든요. 이걸 무시하고 단순히 축구에서 얻어지는 결과값(슛, 패스 드리블 등)만 가지고 축구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만약 그 주관의 영역을 객관적 수치로 계량해낼 수만 있다면, 정말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제가 축구의 숫자놀음과 관련한 글을 쓰면서, 축구를 데이터로 해석하는 열쇠는 '선수들의 위치에 기반한 거리와 속도' 일 거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날 축구는 천문학적인 돈이 동원되는 거대 사업이고,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데이터를 안겨주고 있죠. 선수들과 공이 어디에 서 있는지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건 이제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만약 이러한 데이터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 공간의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먼저, 공간을 허용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 봅시다. 축구장에 서 있는 내가 앞에 있는 동료에게 공을 패스하려 합니다. 이 때 상대 선수들이 내 동료로부터 혹은 내 패스의 경로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내가 찬 공이 동료에게 도달하기까지 누구도 여기에 간섭할 수 없다면 비로소 공간을 허용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막을 수 있었는데도 결과적으로 못 막은 경우는 일단 제외합시다)여기서 간섭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건 곧 거리입니다. ![]() (그러니까 이런 상황) ![]() 위의 예시를 봅시다. 붉은색 팀의 수비진(1-4번)과 미드필더(5-8번)의 간격이 척 봐도 너무 멀리 벌어져 있습니다. 공을 가진 푸른색 1번이 8번에게 패스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요. 만약 미드필더들이 좀 더 뒤로 물러나서, 즉 푸른색 8번에게 가까이 있었다면 공이 전달되는 시간동안 재빨리 8번에게 붙어서 방해할 수가 있었겠지요. 아니면 패스 줄기 자체를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거나요. 그렇다면 그렇게 패스에 간섭하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임계거리는 얼마일까? 이게 바로 공간의 정의가 될 것이고 이건 거리와 속도로서 계량해볼 수가 있습니다. ![]() 위 그림을 봅시다. A가 B에게 넣어주는 패스를 상대팀 C가 막아야 합니다. C에서 선 AB에 수직이 되도록 선을 긋고 그 교차점을 D라고 합시다. C가 이 패스를 차단하려면 공이 A에서 D로 이동하는 시간 이내에 자신도 D에 가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인간의 육신으로 낼 수 있는 속도는 한계가 있기에, C는 저 패스의 줄기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안 됩니다. '1초 이내에 20m를 이동한 다음 거길 지나가는 공을 막아라' 같은 건 만화에서도 안 나올테니까요. 따라서 공의 속도를 Vb, 사람의 속도를 Vp 라고 하면, AD/Vb(공이 날아오는 시간) ≥ CD/Vp(사람이 이동하는 시간) 일 때에만 C는 패스에 간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D/Vb=CD/Vp를 만족하는 점들의 집합을 그려보면 그게 바로 C가 패스를 끊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경계선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공과 사람의 속도를 이용하면 삼각비를 써서 그걸 구할 수 있습니다. ![]() 이렇게 하면 위와 같이 패스의 경로와 특정한 각도를 두고 뻗어나간 두 개의 선이 구해집니다. 쉽게 말해서 패스가 행해진 순간에 이 선의 바깥 쪽에 서 있던 선수들은 패스에 간섭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위 수식에서는 사람의 속도를 5.5m/s, 공을 15m/s로 잡았습니다. 육상선수들은 100미터를 10초 이내에 뜁니다만, 정지상태에서 10미터 이하의 거리를 뛰어갈 때는 아직 가속이 충분히 붙지 못 하기 때문에 최고 속도가 초속 6미터에도 미치지 못 합니다. 이를 고려해서 5.5m/s로 기준을 잡아봤습니다. 패스의 속도는 검색해보니 평균적으로 15m/s라는 말이 나와서 그걸 참고했습니다. 이 값이 달라진다고 해도 저 각도가 조금 달라질 뿐 이 추정이 근본적으로 틀려지는 건 아니니 충분한 참고가 되겠지요. 물론 이 각도는 공의 속도가 빨라지면 좁혀질 것이고, 우리가 전제한 속도보다 빨리 뛸 수 있다면 저 선 밖에서도 공을 잡아챌 수 있겠지요. 다만 패스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공의 속도가 일정 이상으로 빨라질 수 없기에, 사람의 주력은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기에 그리 큰 차이는 없겠습니다. 여기서 저 패스에 간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습니다. 그건 패스 줄기를 차단하는 게 아니라 패스를 받는 선수에게 달려가 방해하는 것이죠.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공이 패스를 받는 선수에게 전달되는 시간' 에 맞춰 '그 선수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위치' 들을 구하면 원이 그려집니다. 여기선 공과 사람의 속도, 그리고 A에서 B까지의 거리에 따라 원의 반경이 결정되지요. ![]() 저 두 개의 영역을 합쳐보면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원뿔모양의 영역이 구해집니다. 이 공간 안에 있는 선수들이 이 패스에 간섭할 수 있는 선수들인 셈이죠. ![]() ...여기까지 혼자 생각을 해보고는 어 이거 그럴싸한데,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선수의 속도 관련 자료를 구하려 검색을 하다가 이미 어느 축구 논문에서 이러한 원뿔 형태의 영역을 'Risk region' 이라고 이름 붙여 사용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쩐지 내가 생각한 것을 남이 생각 못 할리가 없겠죠. 다만 거기선 자세한 수식이나 원리는 설명을 안 해놨기에, 저의 공상도 헛고생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아무튼 이걸 간섭 영역 이라고 불러봅시다. 이건 축구의 흐름을 설명함에 있어 정말 다방면으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공간이 만들어졌는지, 양 팀은 그 공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조절했는지를 추적한다면 그간 막연히 전문가들의 감에 의지해온 것들도 명확히 할 수 있겠죠. 우선 공간과 함께 짝을 이루는 압박이라는 요소를 이걸 통해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알듯이 압박이라는 것은 상대의 패스 선택지를 차단하는 것이고, 이건 다시 말해 상대의 간섭 영역 안에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죠. 이걸 기준으로 선수들의 움직임을 판단할 수 있지요. 아래와 같은 예를 봅시다. ![]() 블루 1이 2에게 패스를 넣어주려 하고, 레드1은 간섭 영역 밖에서 블루 1을 압박하려 합니다. ![]() 1대 2를 막는 판데이크의 전설의 수비를 이 관점에서 봅시다. 물론 이건 시소코의 판단이 아쉬운 장면이지만, 판데이크를 보면 손흥민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손흥민에게 패스가 가면 달라붙을 수 있는 간섭 영역) 손흥민에게 1:1을 열어줄 수 있는 대각선 전진패스의 경로는 몸으로 막았습니다. 이러면 그간 부재했던 수비수들에 대한 스탯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아까 위에서 제가 수행한 계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는데, 이 맹점이 오히려 수비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맹점이란 정지한 상태에서 뛰는 게 아니라 패스가 이뤄지기 전부터 뛰고 있었다면, 속도를 약 10m/s도 낼 수 있다는 점이죠. 만약 어떤 선수가 해낸 패스 끊기 가운데 간섭 영역 밖에서의 출발로 이뤄진 것들이 유의미하게 많다면, 그 선수는 미리 공의 흐름을 읽고 한 박자 빠르게 패스를 끊으러 달려가는 훌륭한 수비수라는 얘기가 될 겁니다. 그 밖에도 이를 활용해 전체 패스에서 후방에서 상대의 간섭 없이 수행되는 안전한 백패스, 횡패스를 걸러내면 누가 더 간섭될 가능성이 큰 어려운 패스들을 많이 성공시켰느냐를 가려내어 패스 성공률의 맹점을 보완할 수도 있겠죠. 수비형 미드필더의 필수덕목이라 불리지만 스탯으로 평가할 단서조차 없는 위치선정도 그 움직임이 간섭 영역을 벗어났는가를 따지면 '안전하게 공을 받아 처리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거고요. 물론 이상의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저의 망상에 가까운 것이고, 제가 수행한 계산과 실제의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사람은 앞으로 뛸 때와 뒤로 갈 때의 반응 속도가 다르고, 달리고 있는 상황과 정지 상황에서의 속도도 완전히 다르죠. 그러나 저렇게 구해진 영역이 하나의 신뢰도 높은 지표가 될 수는 있을 겁니다. 마치 구글 지도의 예상 소요시간 처럼요. 더구나 요즘처럼 빅데이터 수집 연구하기 좋은 시대에는 좀 더 질 좋은 데이터를 입력하여 더 현실에 가까운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죠. 실제로도 축구 클럽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특정 위치에 공이 전달되는 시간과 그 시간 내에 그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선수' 라는 생각을 발전시키면 아예 축구장의 전 면적을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어딘가로 공을 보냈을 때 그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게 어느 팀인가에 따라 그 공간을 누가 점유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죠. ...그런데 검색해보니 이것도 이미 축구 전문가들이 생각해 놨습니다. 이걸 'Pitch control' 이라고 부르더군요. 이 영상을 보시면 공의 위치를 기준으로 해서 누가 어느 공간을 쥐고 있는지 한 눈에 그 흐름을 보여줍니다. 정말 아쉬운 점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얻어진 이 귀중한 발견들이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공유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소수의 스포츠 관련 기업이나 팀들이 자체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할 뿐이지 축구팬들이 접근할 방법이 없습니다. 클럽들이 비싼 돈 써서 얻은 귀한 정보를 무료로 공개하길 바라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FIFA나 UEFA 같은 조직들이 대승적 차원에서 저러한 개념으로 축구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좀 널리 알려줘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최소한 챔스나 월드컵 결승 같은 거대한 이벤트 만이라도 저러한 수치에 기반한 논설이 제공된다면 축구계에 새로운 활력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한 예로 MLB 구단들 역시 귀한 정보는 비밀로 한다지만 스탯 캐스트로 얻은 발사각이나 회전수, 배럴 타구 같은 개념들은 이제 야구팬들 사이에서 흔하게 언급되는 것들이고 이게 야구를 보는 또다른 재미이기도 하거든요. 언젠가 이러한 정보들이 대중화 된다면, 그 때는 축구계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겠지요. 그 때를 대비해서 지금은 아무개가 낫냐 아무개가 못하냐 같은 논쟁은 적당히 자제해 둡시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5-05-27 11:4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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