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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5/12 17:39:15
Name   마키아토
Subject   민중당, 정의당, 민주노동당.
김문수가 한때 당적을 두었던 민중당이라는 정당이 있습니다. 최근에 김문수의 경선 승리 때문에 간혹 회자되는 듯 한데요, 이 당도 살펴보면 재밌는 점이 많습니다.

민중당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는 '민중당이 해산되었다'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민중당이 해산되었다면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과 함께 해산되었다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만약 법적인 접근을 제외하고 정치적으로 통합진보당의 법통이 정의당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한다면, 민중당은 아직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민중당은 왜 사람들이 해산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왜 저는 민중당이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이게 왜 복잡한 문제가 되는가... 이걸 알려면 1992년 총선을 앞둔 민중당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1990년 창당한 민중당은 1992년 총선을 앞두고 한국노동당과의 통합이라는 복잡한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한국노동당은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약칭 인민노련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지하 조직으로 활동해왔던 조직인데, 1991년부터 신노선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면서 무장 봉기가 아닌 선거를 통한 권력 획득을 목표로 공개조직을 만들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한국노동당이죠. 인민노련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은 노회찬, 송영길 등이 있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형인 황광우 씨도 인민노련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고요.

협상 과정에서도 재밌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민중당 당원중에 인민노련 조직원들이 조직원 아닌 사람보다 많았다느니, 협상이 시작되자 각 지구당이 중앙당에 일제히 팩스를 보내서 협상을 압박하는 반란을 일으켰다느니, 중간에 한국노동당 조직원들이 안기부에 잡혀가서 협상의 방향추가 바뀌었다느니... 다만 이런 이야기들은 생략하고, 결과적으로 민중당과 한국노동당은 1992년 2월 6일 통합에 성공한 후, 1992년 3월에 열린 총선을 같이 준비하게 됩니다.

민중당이 잘 됐으면 지금 김문수가 저러고 있지는 않았겠죠. 당연히 망했습니다. 동시에 '의석을 갖지 못하며 2% 이상을 득표하지 못한 경우 정당의 등록을 취소한다'고 규정한 당시 정당법에 의해 등록이 취소됩니다. 출마한 후보자들의 득표율 평균은 6%인가 그랬다지만, 출마자를 찾지 못한 선거구가 훨씬 많았죠.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 부분인데, 법적으로 정당의 해산과 등록의 취소는 다릅니다.

정당의 해산은 헌법 제8조에 따른 것으로,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될 때에만 가능한 행위입니다. 정당해산심판에 의해 정당이 해산될 경우, 동일한 당명이나 유사한 강령으로는 다시 창당하지 못합니다. 통합진보당이 이렇게 해산되었죠. 등록취소는 단순히 선관위에 등록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정당은 학설상 법인 아닌 사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법인아닌 사단이 취할 수 있는 행위, 가령 임대차 계약을 맺는다던가 하는 행위는 여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중당은 선거 패배 이후 중앙위원회를 열어 당의 진로를 투표에 부치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당권파, 이우재, 장기표 등은 당의 해체를 주장했습니다. 반면 한국노동당 계열의 중앙위원들은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
먼저 민중당의 향후진로에 대해서는 '중집위제안안'과 '전희식안(위의 결정된 안)'등 두 가지가 제출되었습니다.
중집위 제안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제도적 결함과 우리의 역량부족으로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정당이 등록취소되는 사태에 직면하여 이것을 국민의 뜻으로 겸허히 받아들여 당을 해체한다.
2. 앞으로 우리는 각계의 민주세력과 광범위하게 협의하여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
(전희식안)
1. 14대 총선 결과 민중당은 51개 선거구에 후보를 내어 노력하였으나 당선자를 내지 못하였고 2% 득표에도 미치지 못함으로써 등록이 취소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결과가 현행법상 제도적 결함에서 기인하기도 하였지만, 민중당의 당세부족과 진보, 혁신정당으로서의 역할과 주장을 국민대중 앞에 분명히 부각시켜내지 못한데 따른 것으로 생각하여 이러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2. 이후 민중당은 000으로 전환한다. 000은 모든 진보세력들과 협의, 연대하여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노력하며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에 진보정당을 창당하여 대통령선거에 적극 대응한다.
3. 현 중앙위원회를 000의 조직구성과 운영을 결정할 전권기구로 한다.

<민중당 제15차 중앙위원회 결정사항> 中 (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172419 )

이러한 두 안건을 놓고 표결하기 직전, 민중당 당권파는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립니다. 남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표결한 결과 당연히 전희식안이 가결되었습니다. 전희식안에서는 '000'이라는 가명으로 표기되었지만, 곧 민중당 중앙위원회는 새로운 조직의 이름을 '진보정당추진위원회'로 확정짓고 조직 정비에 나섭니다.

반면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린 민중당 당권파는...... 그냥 민중당이 해체되었다고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간 민중당에 보내주신 지지와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
이러한 상황인식에서 그간 민중당을 이끌어 온 우리들은 깊고 진지한 고뇌 끝에 현재의 조건에서는 당의 형식적 유지가 아니라 오히려 당의 분명한 정치적 해체만이 보다 강력하고 보다 원숙한 진보정당 건설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이에 그간 우리가 모든 것을 바쳐 쌓아온 민중당을 정치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통해 보다 강력한 진보정당 운동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으려 합니다.
(...)

<1992년 4월 15일자 한겨레 광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4150028910201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2-04-15&officeId=00028&pageNo=2&printNo=1210&publishType=00010

지금 와서 보면 그냥 웃기지만 ㅋㅋㅋ 당시에는 심각했겠죠. 안타깝게도 (신)민중당 당권파가 (구)민중당 당권파에게 무슨 항의를 어떻게 했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게 민중당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가 되고,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진보정치연합이 되고, 진보정치연합은 국민승리21이 되고,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이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민중당이 민주노동당까지 끊김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온 셈이 되죠. 실제로 민주노동당에서 정책실장으로 근무했던 이재영의 글에서, 민중당 시절의 책상 등 집기류들과 임대차계약이 민주노동당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왔다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이 글은 별 생각없이 단순히 홍차넷에 웃긴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드리려고 쓴 글인데요, 그래도 굳이 뭔가의 함의를 한번 담아보자면, 역시 최근의 정의당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최근 정의당이 당명을 민주노동당으로 변경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위에서 썼던 것처럼, 정의당이 25년 전에 사용했던 당명이죠. 정의당 당대회에서 한 표 차이로 민주노동당에 밀린 당명 후보는 평등사회당이었습니다. 평등사회네트워크라는 이름은 2015년에 노동당을 탈당하고 정의당에 합류했던 사람들이 썼던 이름이고요. 예컨대 저는 정의당 당대회에서의 민주노동당과 평등사회당의 충돌을, 정의당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대한 관점의 충돌로 봅니다. 정의당의 뿌리를 2000년에서 찾을 것인가, 혹은 2015년에서 찾을 것인가? 평등사회네트워크의 사람들이 2008년 진보신당을 만들었던 사람들로 알려져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의 뿌리를 2000년에서 찾을 것인가 혹은 2008년에서 찾을 것인가?

어느 쪽이든 한가한 논의이며, 어느 쪽이든 퇴행적인 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겠죠.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일컬어 25년만큼 퇴행한 이름이라고 비판하기는 쉽지만, 평등사회당이라는 이름 역시 10년 혹은 17년만큼 퇴행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쪽이든 실제 정의당의 역사와는 다른 정체성을 임의적으로 덧씌우려는 시도이죠. 위에 쓴 것 처럼 정의당의 기원은 민중당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고,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은 인민노련의 원년 멤버였던 노회찬이었으니까. 한때 노회찬 당원이었던 제게 있어서는 어느쪽이든 시니컬한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평등사회당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민노당의 자주파들과 싸우고 나와서 선명한 좌파정당을 만들었던(최소한 그러려는 시도는 했었던) 역사를 다시 당의 정체성으로 세우고 싶었겠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민주노동당을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최소한 이 사람들은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잠재적인 '우리'로 포용하고 있으니까. 다만 더 넓은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서 더 오래된 역사를 들춰야 했다는 점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글에 두서도 없고, 내용도 없고, 맥락도 없고... 하여튼... 답답해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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