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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4/11 12:36:11
Name   코리몬테아스
Subject   미국의 판사가 낙태약을 금지시키다 - 위험사회의 징후들
https://www.politico.com/news/2023/04/07/texas-judge-halts-fda-approval-of-abortion-pill-00091096

https://www.thecut.com/2023/04/whats-happening-with-abortion-pills-in-the-courts.html

지난 8월, 히포크라테스적 의료의 근본 원칙을 지키기 위한 의사들의 모임 '히포크라테스적 의료를 위한 연맹'(Alliance for Hippocratic Medicine)이 창설되었어요. 이들이 생각하는 히포크라테스적 의료의 근본 원칙 중 하나는 삶의 시작과 끝의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죠. 그리고 작년 12월, 이 연맹은 연방법원에 몇 가지 약물에 대해 소송을 제기합니다. 그 중 하나는 낙태약 미페리스톤(Mifepristone)이에요. 이들의 소송은 '자유수호연맹'(Alliance Defending Freedom)에서 지원해줬는데. 기독교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법조인들의 모임이에요.

전 이 판결과 관련한 기사를 읽으면서 판타지 소설의 도입부를 보는 줄 알았어요. 연맹X연맹들의 크로스오버로 거대제약회사의 음모에 맞서다니. 그냥 소설임. 연맹구성원들은 판결문이 전국뉴스에 소개될 때 자기들의 이름을 보고 뜨거운 벅차오름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 사건을 주재한 연방판사 Matthew J. Kacsmaryk는 트럼프가 임명한 우파성향 판사로, 지재권과 기업인수합병 문제를 다루다가 연방검사를 거쳐 수석자유협회(First LIberty Institute)라는 기독교 우파성향 비영리 로펌에서 활동한 이력을 가졌어요. 매튜는 판사가 된 이후로 여러 논란이 되는 사건에 이름을 올렸는 데. 그가 북부텍사스의 유일한 연방판사이기 때문에 해당 관할에서 제기된 소송은 모두 매튜가 담당하는 구조라서, 많은 보수단체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에 태클을 걸거나 이런 식의 소송을 위해서 법원쇼핑을 할 때 그의 관할을 애용 중이에요.

재판의 쟁점은 솔직히 좀 복잡한데. 핵심쟁점을 이해한 대로 요약하면, FDA에서 2000년 이 약을 처음 신속승인할 때 사용했던 근거조항이 잘못되었다는 게 원고의 주장이에요. 원고는 이 약이 신속승인(SubpartH) 절차를 걸쳤는 데, 이 절차는 AIDS와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에 대한 약에 적용되어야 해요. 그런데, 임신 자체는 생명을 위협하지도 않고 '질병'도 아님으로 미페리스톤이 해당절차를 거쳐 승인된 것은 FDA가 절차를 오남용한 것이고 따라서 승인은 위법하다는 취지. 또 신속승인 절차를 거치면서 안정성이 충분히 테스트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FDA는 임신 자체는 어떤 여성들에겐 생명을 위협하는 'condition'이기 때문에 임신중절약이 해당 절차를 거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절차는 신속승인 절차를 거치기에 충분한 역학적,병리생리학적,치료적 효과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고 미페리스톤은 그 기준을 모두 충족시켰다는 게 과거의 입장이에요. 또한 미페리스톤은 이미 16년에 재승인을 받았고, 그보다 이전에 REMS 리포트도 통과된 약물이기 때문에 2000년도의 승인 절차의 정당성에는 의미가 없다는 입장.  사실 미페리스톤에 대한 분쟁은 이게 처음이 아닌데, 미페리스톤은 2002년부터 낙태에 반대하는 산부인과 의사연합으로부터 시작된 이의 제기부터 해서 20년이 넘는 법률공방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출시 직후부터 반낙태 단체들의 정치적 압박속에서 안정성과 효능에 대해서 정부감시를 받고 보고를 받아왔어요. 관련 규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완화되었죠.

핵심쟁점 외에도 재밌는 건, 원래 FDA의 승인 결정에 대한 이의제기는 결정 후 6년 안에 가능해요. 그리고 2000년 승인 결정에 대해서는 이미 이의제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FDA가 2002년 제기 된 산부인과 의사들의 문제제기를 기각한 2016년 기준으로도 이미 6년이 지난 시점이었어요. FDA는 사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명백한 기한 문제 때문에 사건이 금방 기각되리라고 여겼어요. 그러나 판사는 2016년 12월과 2021년에 FDA가 문제를 'reopon'했기 때문에 기한이 늘어났다고 해버림. 더불어 판사는 이 약이 사실 여성들에게 위험하다는 원고들의 몇 가지 주장과, 시술에 의한 낙태에 비해 의료적 효용이 없다는 주장까지도 판결문에 인용했죠.

FDA가 승인한 낙태약의 승인을 뒤집어버린 연방법원의 이 전례없는 판결엔 당연히 엄청난 후폭풍이 있었어요. 워싱턴 연방법원에선 미페리스톤의 FDA 승인을 '보호'하는 판결을 내렸고, 진보성향의 주 법무장관들은 자기 주에선 이 판결과 무관하게 미페리스톤이 유통될 수 있겠다고 말했죠.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이 판결에 이의제기하고 뒤집는 법적 절차를 밟는 걸로 충분하지 않고 동시에 '무시'해야한다고 주장해요. 이 일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이 판결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 지 알 수가 없어요. 심지어 판사 조차도 이 결정이 낙태약을 당장 금지시키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하지만 FDA의 승인을 철회하는 게 약을 금지시키는 게 아니면 뭐란 건지 사람들은 모르죠.

다른 종류의 낙태약들, 트랜스젠더를 위한 호르몬 조절제, 에이즈 치료제 등 정치적 이유로 법적 분쟁의 여지가 있거나 이미 분쟁 중인 약들이 있어요. 이 판결은 그런 흐름의 이정표가 되겠죠. 주가 연방법원의 결정을 무시하는 미국, 행정부가 사법부를 무시하는 사회, 그런 요구가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세상. 낙태권을 넘어서 이번 판결은 복잡하면서도 취약한 체제를 두들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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