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03/25 11:32:23
Name   늘쩡
Subject   그냥 아이 키우는 얘기.
어떤 어머님께서 타임라인에 쓰신 얘기를 보고 지난 2년을 회상하게 됐어요.
저도 타임라인에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지워버릴까 하다가 티타임으로 옮겨요. 헤헤.


저희 큰아이는 학교 가길 힘들어했어요.
심할 때는, 자기 전부터 다음 날 학교 갈 일을 걱정하며 울다 잠들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첫 마디가 학교 가기 무섭다는 거였죠.
교문 앞에서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고 우는 아이를 한참 달래서 느지막이 들여보낸 적도 몇 번 있었어요. 한 번은, 포기하고 그냥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고요.

보통 학기 초에는 부모가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데, 그 기간은 아이마다 달라요. 일 주일 만에 씩씩하게 혼자 등교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1학기 내내 부모와 함께 등교하는 아이도 있죠. 하교도 마찬가지고요.

저희 큰 애는, 학교 가길 워낙 힘들어했기 때문에, 1년 내내 학교에 데려다줘야 했어요.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왔고요.
집에 올 때는 작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어서 좀 여유로웠지만, 아침에 등교할 땐 작은 아이까지 챙겨서 데리고 다니느라 더 힘들었죠.

잠이 안 깨서 아이가 못 일어나면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옷을 갈아입히고 번쩍 안아 식탁으로 데려와 아침을 먹이고 부랴부랴 등굣길에 나서요.
그 사이에 첫째는 계속 학교 안 가면 안 되냐며 흐느끼고, 둘째는 둘째 대로 온갖 떼를 씁니다.
옷 갈아입히는 손이 차갑다고 짜증 부리고, 입혀준 옷이 불편하다고 트집 잡으며 억지로 벗으려고 하고, 아침밥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입 꾹 다물고, 바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제 만들던 레고 만들러 가기도 하고..

두 아이를 달래느라 아침 내내 진이 빠져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거린데, 가는 길에도 작은 아이는 힘들다고 떼쓰며 업어 달라고 조르고, 큰아이는 또 학교 가기 무섭다고 울고..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즐겁게 하루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아침 내내 웃으면서 말하려 애써요.
열불이 나고 타들어 갈 정도로 초조해서 내면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긴 어렵지만, 겉모습이나마 최선을 다해 온화함을 유지해보는 거죠. 물론 최선을 다한다고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렇게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니까, 어라,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안 가네요.
그 사이 큰아이는 어려움을 많이 이겨낸 것 같아요.
이제 3학년이 됐고, 학교생활이 좀 수월해졌어요.
놀이 치료의 효과인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내면적으로 성장해서인지, 같이 학교 다닐 친구가 한 명 생겨서인지, 그 모두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이제 울지 않고 학교에 잘 다니는데.

그리고 아빠 힘든 것도 모르고 떼만 쓰던 둘째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빠 힘든 건 모르지만요.
첫째와 판이하게 다른 기질을 가진 둘째는 학교가 너무 재미있나 봐요.
다행이에요.
아직은 아침마다 두 아이를 데리고 함께 등교하고 있지만, 4월 어느 날부터는 문 앞까지만 두 아이를 배웅할 거예요.
서로 의지하며 학교에 가는 모습을 응원하면서.


육아 관련 서적(사실 거의 읽지 않았지만)이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육아팁들을 보면 "아니(디폴트 문두어), 이런 건 애가 하나일 때나 할 수 있는 거잖아!" 싶을 때가 많아요.

아이가 둘이면(혹은 그 이상이면) 같은 일을 곱하기 2 해서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방식을 활용해야 합니다. 옷을 입히든, 밥시중을 들든, 목욕을 시키든, 흘러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눈앞에 있는 작업 하나씩 착착 처리하듯 할 순 없는 노릇이죠. 동시적이고 복합적인 상황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유연하고도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해요.

절망스러운 건, 제가 별로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흑흑.

물론 어렵기만 한 건 아니에요. 두 아이를 포함한 다각적인 상호작용이 행복과 웃음을 동반 상승시키거든요. 어려움과 마찬가지로 기쁨도 단지 양적으로 확대될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새로워요.
게다가, 아이가 클수록 둘이어서 힘든 점보다 둘이어서 편해지는 부분이 더 많아지고요.

좀 지나면 각자의 세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지금처럼 서로를 의지하지 않게 되겠죠.
그 전까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쌓아 둬야겠어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4-06 07:43)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9
  • 모든 부모님들, 화이팅!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89 여행[사진多]5월의 가파도 산책 8 나단 21/05/12 3688 8
1087 일상/생각어느 개발자의 현타 26 거소 21/05/04 7623 35
1085 기타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키즈카페 추천 2 쉬군 21/05/04 5872 35
1084 일상/생각출발일 72시간 이내 -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사태 23 소요 21/04/25 5188 11
1083 기타요즘 나오는 군대 빈찬합 관련 뉴스에 대해.. 36 윤지호 21/04/22 6102 20
1082 IT/컴퓨터우리도 홍차넷에 xss공격을 해보자 19 ikuk 21/04/20 5544 14
1081 의료/건강COVID-19 백신 접종 19 세상의빛 21/04/17 5145 22
1080 정치/사회택배업계의 딜레마 19 매뉴물있뉴 21/04/16 5508 11
1079 IT/컴퓨터<소셜 딜레마>의 주된 주장들 9 호미밭의 파스꾼 21/04/06 4828 13
1078 게임스타여캠) 안시성 14 알료사 21/04/05 5469 12
1077 철학/종교사는 게 x같을 때 떠올려보면 좋은 말들 34 기아트윈스 21/04/02 8083 31
1076 역사왜 멕시코는 북아메리카에 속하는가? 19 아침커피 21/03/31 5991 11
1075 일상/생각200만원으로 완성한 원룸 셀프인테리어 후기. 30 유키노처럼 21/03/28 5215 50
1074 여행[사진多]한나절 벚꽃 여행기 8 나단 21/03/27 4137 18
1073 일상/생각그냥 아이 키우는 얘기. 5 늘쩡 21/03/25 4240 19
1072 기타그럼에도 사랑하는 너에게. 9 쉬군 21/03/22 4506 34
1071 정치/사회우간다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과 난민사유, 그리고 알려는 노력. 19 주식하는 제로스 21/03/17 5303 32
1070 일상/생각대학원생으로서의 나, 현대의 사제로서의 나 5 샨르우르파 21/03/15 4649 17
1069 정치/사회미래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에 대한 4개의 가설 27 이그나티우스 21/03/14 5188 17
1068 일상/생각제조업(일부)에서의 여성차별 71 Picard 21/03/12 7317 16
1067 요리/음식중년 아저씨의 베이킹 도전기. 27 쉬군 21/03/08 4704 29
1066 일상/생각소설 - 우렁각시 18 아침커피 21/03/07 4741 13
1065 정치/사회수준이하 언론에 지친 분들을 위해 추천하는 대안언론들 20 샨르우르파 21/03/03 8206 24
1064 문학지난 두달동안 읽은 책들 간단리뷰 5 샨르우르파 21/02/28 5383 22
1063 일상/생각30평대 아파트 셀프 인테리어 후기 28 녹차김밥 21/02/22 7075 31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