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게시판입니다.
Date | 21/12/15 23:46:43 |
Name | 私律 |
Subject | 최영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
고려의 충신 최영장군 있쟎습니까. 그런데 고려사에 따르면, 최영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다음과 같았다죠.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최영을 논하기를, “공로는 한 나라를 뒤덮지만 죄는 천하에 가득 찼다.”라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명언이라고 하였다. 이게 잘 이해가 안갑니다. 이 평가에 앞서 최영의 문제라고 나온 게 성품이 조금 고지식하고 또 학문이 없어서 일을 모두 자기 뜻에 따라 결정하였다. 사람들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는 것을 좋아해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아도 역시 대부분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인데, 이 정도면 죄가 천하에 가득찼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아서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죄가 천하를 가득 채웠다고 한 걸까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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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하도 죽여서 아닐까요.
보통 최영 손에 죽었던 사람들 기록보니 3족이니 6촌이니 하며 아예 씨를 말려버렸던데요...
보통 최영 손에 죽었던 사람들 기록보니 3족이니 6촌이니 하며 아예 씨를 말려버렸던데요...
회군을 안했어도
회군을 한것도 둘다 뒷감당을 못하는 결정이였다는게 컷다고 봅니다
고려의 마지막 대장군의 선택이 고려의 존속을 도모하는게 아니라 그저 누구의 손에 고려가 멸망하는지를 결정하는 선택이 된셈이니까요
회군을 한것도 둘다 뒷감당을 못하는 결정이였다는게 컷다고 봅니다
고려의 마지막 대장군의 선택이 고려의 존속을 도모하는게 아니라 그저 누구의 손에 고려가 멸망하는지를 결정하는 선택이 된셈이니까요
얼마 뒤 정도전도 명이랑 붙어볼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걸 생각하면 죄가 천하를 가득채웠다기엔...
무리는 맞지만, 한국이 미국 치는 것까지는...
무리는 맞지만, 한국이 미국 치는 것까지는...
우선 졌으니까 - 도 있겠고…
최영이 북벌하려했을 때 승산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있겠죠.
저는 그보다도…
회군하겠다 했을 때 왕이 “그래 무리인거 같다 돌아와” 라고 했으면 곱게 돌아왔을 지 궁금합니다 ㅋㅋ
아래는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위화도 회군 시 승산이 있었을지 입니다
—————————————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성계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즉, 요동 정복(요동 점거)은 커녕, 요동에 대한 무력 시위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 홍건적의 침입 때만 해도, 보급 등을 고려해보면 현실적으로 ... 더 보기
최영이 북벌하려했을 때 승산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있겠죠.
저는 그보다도…
회군하겠다 했을 때 왕이 “그래 무리인거 같다 돌아와” 라고 했으면 곱게 돌아왔을 지 궁금합니다 ㅋㅋ
아래는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위화도 회군 시 승산이 있었을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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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성계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즉, 요동 정복(요동 점거)은 커녕, 요동에 대한 무력 시위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 홍건적의 침입 때만 해도, 보급 등을 고려해보면 현실적으로 ... 더 보기
우선 졌으니까 - 도 있겠고…
최영이 북벌하려했을 때 승산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있겠죠.
저는 그보다도…
회군하겠다 했을 때 왕이 “그래 무리인거 같다 돌아와” 라고 했으면 곱게 돌아왔을 지 궁금합니다 ㅋㅋ
아래는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위화도 회군 시 승산이 있었을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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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성계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즉, 요동 정복(요동 점거)은 커녕, 요동에 대한 무력 시위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 홍건적의 침입 때만 해도, 보급 등을 고려해보면 현실적으로 난민 수준이었을 20만의 병력[28]에 국경이 한방에 털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었었다. 심지어 바로 직전에 수십 년간 지속된 왜구의 침략만 보아도 고려는 국가 멸망의 상황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그 피해가 매우 컸었다. 당대의 이런 상황들을 보면 당시 고려의 국력에 대해 객관적으로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객관적인 조건에서 명의 장군들을 분석해 보아도 명 말기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당시 명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장군인 남옥, 서달, 상우춘 등은 다들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陳友諒) 또는 원나라의 몽골군을 격파한 명장들이었고 그 외의 풍승, 목영, 탕화, 장옥 등을 보면 능력이나 전공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의지나 용기 등이 상당하기 때문에 굴복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최영이 북벌하려했을 때 승산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있겠죠.
저는 그보다도…
회군하겠다 했을 때 왕이 “그래 무리인거 같다 돌아와” 라고 했으면 곱게 돌아왔을 지 궁금합니다 ㅋㅋ
아래는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위화도 회군 시 승산이 있었을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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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성계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즉, 요동 정복(요동 점거)은 커녕, 요동에 대한 무력 시위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 홍건적의 침입 때만 해도, 보급 등을 고려해보면 현실적으로 난민 수준이었을 20만의 병력[28]에 국경이 한방에 털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었었다. 심지어 바로 직전에 수십 년간 지속된 왜구의 침략만 보아도 고려는 국가 멸망의 상황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그 피해가 매우 컸었다. 당대의 이런 상황들을 보면 당시 고려의 국력에 대해 객관적으로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객관적인 조건에서 명의 장군들을 분석해 보아도 명 말기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당시 명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장군인 남옥, 서달, 상우춘 등은 다들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陳友諒) 또는 원나라의 몽골군을 격파한 명장들이었고 그 외의 풍승, 목영, 탕화, 장옥 등을 보면 능력이나 전공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의지나 용기 등이 상당하기 때문에 굴복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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