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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5/17 01:55:43수정됨
Name   joel
Subject   축구로 숫자놀음을 할 수 있을까? 두번째 생각, 축구 통계의 어려움.
앞선 글에서 저는 야구의 통계화가 쉬운 조건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1. 선수들이 행하는 액션을 객관적 지표에 의해 이벤트로 완결시킨다.
2. 이벤트를 발생시키는 액션의 시작 위치가 고정되어 있으며 모두가 동등한 조건을 갖는다.
3. 2에 따라 이벤트는 선수 개인의 능력에 의해 발생한다.
4. 수많은 시행에 의해 3이 검증된다.
5. 같은 이벤트는 같은 가치를 가지며, 이벤트의 누적에 따라 경기가 진행된다.

그럼 이 잣대를 축구에 들이대어봅시다. 헌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축구는 저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축구 규정은 일단 플레이가 시작되면 선수들에게 뭘 하라고 요구하질 않습니다. 시작 휘슬이 울리고 센터서클에서 첫 터치가 이루어져 게임이 시작되기만 하면, 선수들이 가만히 서서 시간만 끌어도 시간은 흐르고 때 되면 경기가 끝나요. 축구에서 득점에 대해 규정하는 이벤트는 딱 하나, 골라인을 넘으면 골이라는 것 뿐입니다. 그 밖에 잡다한 골라인 아웃이나 반칙 같은 것들은 어떻게 플레이가 멈추고 다시 인플레이가 되느냐 하는 것을 규정할 뿐입니다.

축구에서 선수들이 발생시키는 이벤트는 크게 나눠서 드리블, 패스, 슛입니다. 실질적으로 득점을 위해선 저 이벤트를 거쳐야 하니까 어쩌면 이것이 야구의 출루나 진루와 비슷할수도 있겠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편의상 우리가 구분한 이벤트일 뿐 규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드리블 예쁘게 한다고 예술 점수 주거나 슛 100번 쏴서 마일리지 모은다고 점수 주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축구는 11명이 뛰면서 서로를 방해하는, 실시간으로 위치가 변화하는 경기입니다. 위치에 따라 전술에 따라 이벤트를 발생시키는 상황이 절대로 같을 수가 없고 그 가치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80미터를 드리블하며 수비수 9명을 제치고 넣은 골과 동료가 완벽히 만들어준 기회에 발만 갖다대어 넣은 골을 동일한 이벤트라고 하는 사람은 없겠죠.

무엇보다도 축구는 승부차기를 비롯한 극소수 예외상황을 제외하면 결코 1:1의 대결로 단절될 수 없는 종목입니다. 이건 인간의 가장 정교한 도구인 손의 사용을 원천봉쇄하고 발로 공을 차는 종목 특성 때문입니다. 축구와 비슷하게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득점을 주고 받는 종목인 농구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죠. 농구는 공을 손으로 잡아둘 수 있기에 3차원 방향 어느 쪽으로도 쉽게 공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며 수비수 사이를 헤치며 공과 함께 재빨리 이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공을 차서 앞으로 가게 할 수는 있어도 뒤로 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우며 사실상 앞으로 가느냐 좌우로 가느냐의 선택지만 있죠. 수비수를 떨쳐내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럼 공도 세게 차서 빠르게 움직여야 하고, 자연스레 공이 몸에서 멀리 떨어지면서 또다른 수비수에게 공을 빼앗길 확률도 늘어납니다. 아무리 발재간이 좋아봤자 여러명이 동시에 공간을 좁혀오면 공을 돌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따라서 축구에서는 동료를 이용하고 공을 주고 받으며 약속된 전술을 실행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축구팬들이 흔히 개인 능력이라고 부르는 이벤트들조차 엄밀히 말하면 개인 능력이 아닙니다. 80미터를 드리블해나가는 선수의 곁에는 패스라는 선택지를 부여하며 상대 수비수들이 좁은 공간에 몰리지 못 하게 만드는 동료가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잘나봤자 수비수 여럿이 동시에 달라붙으면 공을 돌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축구에서 흔히 사용되는 '혼자 힘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 말은 모조리 과장이 심한 허풍인 셈이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개개인의 능력치는 거시적인 전황 속에 희석되어 분명하게 값어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론 정말 뛰어난 선수들이야 그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곤 합니다만 그들 역시 역사가 증명하듯 전술과 팀 전력이라는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상태로 선수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은 왜곡된 렌즈를 통해 사물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반복시행으로 풍성한 표본을 얻는 것이 가능한가? 안타깝지만 그것도 어렵습니다. 축구는 90분간 뛰어다녀야 하기에 타 종목에 비해 독보적인 체력과 지구력을 요하는 종목입니다. 뛰어다니기만 하면 모르겠는데 상황에 따라 급가속과 감속, 방향전환을 수시로 해야 하고 심심하면 태클을 얻어맞아야 하니 부상위험도 높습니다. 이런 종목에서 변별력을 높이겠다고 함부로 경기 수를 늘린다는 건 인간백정 짓거리나 다름 없습니다. (그 비슷한 짓을 실제로 UEFA가 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만)

더군다나 축구는 발로 종목 특성상 다분히 확률에 의존하는 게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강팀이라 해도 공격을 시도해서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이러니 누군가가 조금 더 효율적인 공격을 시도한다 한들 눈에 띄는 성과가 나타나기 어렵죠. 제가 로또를 다섯 장을 사서 당첨확률을 5배로 올려봤자 워낙 확률이 낮으니 어차피 꽝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러니까 로또 이거 다 조작임. 아무튼 조작임...읍읍. 아무튼 운 좋은 날에는 슛을 쏘는 족족 들어가지만 안 되는 날은 골대 코앞에서 홈런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고, 정확한 패스를 자랑하는 선수도 상대 골문 근처로 날리는 도전적인 패스는 성공률이 낮습니다. 프리킥의 경우 100번 차서 10번만 들어가도 신의 경지죠. 그런데 확률에 비해 경기 횟수가 적으니 이런 운빨 하나하나에 결과가 심하게 요동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축구의 매력이기도 하겠지만 그 속에 숨겨진 옥석을 골라내려는 사람들에겐 도저히 납득 안 되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축구의 진리를 깨우친 현자>



정리하자면 게임 내에서 액션을 이벤트로 가공해주지도 않고, 개인 능력치를 알아보기도 힘든데다 이벤트 발생 조건과 가치도 제각각이며 충분한 표본도 없는 스포츠가 축구입니다. 따라서 축구에서는 야구에서 과거의 세이버메트리션들이 했듯이 경기 중에 얻어지는 1차적인 이벤트의 분석만으로는 통계화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최근 들어서 축구의 통계화가 연구되며 단순한 슛,패스,드리블이 아닌 기대 득점, 기대 어시스트, 기회 창출, 드리블 성공률, 공중볼 경합, 볼 탈취 등의 다양한 이벤트들과 스탯들이 나오고는 있습니다만 이들 스탯 역시 그 이벤트를 이끌어낸 당사자들의 능력을 온전히 반영하거나 그 이외에 개입하는 변수들의 존재를 명확히 잡아주지는 못 합니다.

축구에는 막연한 목표, 골을 골라인 너머로 넘기라는 목표만 덜렁 있고 이것을 실행하는 방법은 숱하게 많기에 단순하게 특정한 선수 대형이나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라고 할 수가 없고 도대체 무엇이 효과적인 전술인지 무엇이 영리한 움직임과 좋은 패스, 슛인지 주관적으로 그때 그때 평가할 수 밖에 없거든요.

야구에서 03 심정수의 war이 03 이승엽보다 높았던 것은 홈런쇼에 가려진 심정수의 진정한 가치를 재조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만 무스타피의 수비 스탯이 판데이크보다 높았던 것은 아직 축구의 통계화가 갈 길이 멀다는 것만 증거해줄 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선수들의 대형을 도형으로 그려서 기하학적으로 분석을 해보려는 시도가 있는 걸로 압니다. 저는 수포자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말이죠.  

아무튼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앞선 글에서 저는 야구의 세이버메트릭스가 단순히 측정되는 이벤트 만으로는 투수와 수비의 능력치를 분간하는데에 어려움을 겪다가 이벤트의 발생 과정을 추적하는 스탯캐스트가 도입되며 해결을 보았다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축구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선수들의 이벤트 그 자체를 분해할 수 있다면?

선수들이 발생시키는 이벤트에 깊숙히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확률의 영향을 덜 받으며 시행횟수를 제공해줄 수 있는 지표가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정말로 그런 지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수도 없이 입에 담지만 의외로 정확하게 계량되지 못 했던 것, 바로 공간과 압박입니다.

공간과 압박의 수치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다음 글에서요.

다음 글은 언제 쓸 지 모르겠습니다...가 아니라 곧바로 이어 올리겠습니다. 분량이 길어져서 나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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