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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11/23 22:13:06 |
Name | 메오라시 |
Subject | “일본에 요구하듯, 반성 않으면 내로남불” 베트남 삿갓 시위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18197.html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책임을 묻는 첫 집회였다고 합니다. 중간에 국정원 얘기가 나오는데요, 베트남 민간인학살 관련 참전군인을 조사한 정보를 국정원이 가지고 있는데 민변이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법원이 공개하라고 판결했는데도 국정원은 여전히 공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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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을 조사 연구해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밝히고 사과의 뜻을 전하고 배상하고 역사에 남기고.. 결국 이런 작업을 하는 건 잘못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거든요.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 각오를 하는 게 반성이니까요.
그래서 제일 먼저 정의해야 할 게 뭘 잘못했는지 부터인 것 같아요. 저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 자체도 잘못이라 생각하지만, 공식적으로 그것이 잘못이라 규정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것을 잘못으로 규정한다면 다시는 그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야 진정한 반성이죠. 우리가 당시 참전했던 ... 더 보기
그래서 제일 먼저 정의해야 할 게 뭘 잘못했는지 부터인 것 같아요. 저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 자체도 잘못이라 생각하지만, 공식적으로 그것이 잘못이라 규정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것을 잘못으로 규정한다면 다시는 그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야 진정한 반성이죠. 우리가 당시 참전했던 ... 더 보기
진상을 조사 연구해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밝히고 사과의 뜻을 전하고 배상하고 역사에 남기고.. 결국 이런 작업을 하는 건 잘못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거든요.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 각오를 하는 게 반성이니까요.
그래서 제일 먼저 정의해야 할 게 뭘 잘못했는지 부터인 것 같아요. 저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 자체도 잘못이라 생각하지만, 공식적으로 그것이 잘못이라 규정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것을 잘못으로 규정한다면 다시는 그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야 진정한 반성이죠. 우리가 당시 참전했던 이유는 미국의 요구와 압박인데, 사실 우린 21세기까지도 미국의 요구에 따라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그런 현실적인 면을 생각하면 참전 자체를 잘못으로 규정하고 반성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요.
결국 전쟁 중에 벌어진 구체적인 전쟁범죄행위, 특히 민간인을 상대로 벌어진 범죄와 학살을 구체적으로 연구 조사 발굴해내서 처벌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건데, 생각보다 아프고 분열이 있을 것이고 힘들 거예요. 참전하신 분들이 살아 계신 만큼 반발도 크겠지요. 과연 70노인 80노인을 베트남전에서 허튼 짓 했다고 독일처럼 재판에 세우고 정상적으로 징역형 살릴 수 있을까요.
수정) 뭔가 더 쓰려다가 실수로 글쓰기 버튼을 눌러 등록돼버린 김에 여기서 끊어야겠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정의해야 할 게 뭘 잘못했는지 부터인 것 같아요. 저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 자체도 잘못이라 생각하지만, 공식적으로 그것이 잘못이라 규정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것을 잘못으로 규정한다면 다시는 그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야 진정한 반성이죠. 우리가 당시 참전했던 이유는 미국의 요구와 압박인데, 사실 우린 21세기까지도 미국의 요구에 따라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그런 현실적인 면을 생각하면 참전 자체를 잘못으로 규정하고 반성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요.
결국 전쟁 중에 벌어진 구체적인 전쟁범죄행위, 특히 민간인을 상대로 벌어진 범죄와 학살을 구체적으로 연구 조사 발굴해내서 처벌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건데, 생각보다 아프고 분열이 있을 것이고 힘들 거예요. 참전하신 분들이 살아 계신 만큼 반발도 크겠지요. 과연 70노인 80노인을 베트남전에서 허튼 짓 했다고 독일처럼 재판에 세우고 정상적으로 징역형 살릴 수 있을까요.
수정) 뭔가 더 쓰려다가 실수로 글쓰기 버튼을 눌러 등록돼버린 김에 여기서 끊어야겠어요;
승전국이라서 사과를 안받는..것도 있긴 할텐데,
사실 전쟁 중 혹은 이후에 남베트남 소수민족을 향한 강제이주나 문화동화를 위한 인종말살급 행동들이 있었고, 이에 대해 현 베트남 정부가 무시 혹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한국 정부가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를 하면 그쪽에서도 난감할거에요.
자국에서도 과거청산이 안된 전쟁범죄들을 해외정부에서 사과하면서 말을 꺼낸다? 뭐라 답해줘야 하긴 하는데 곤란하겠죠..그러니 아에 언급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사과도 안받는 거에 더 가깝지 않을까해요.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 정의를 외치는 일도 좋지만 정부의 입장에서 외교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것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전쟁 중 혹은 이후에 남베트남 소수민족을 향한 강제이주나 문화동화를 위한 인종말살급 행동들이 있었고, 이에 대해 현 베트남 정부가 무시 혹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한국 정부가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를 하면 그쪽에서도 난감할거에요.
자국에서도 과거청산이 안된 전쟁범죄들을 해외정부에서 사과하면서 말을 꺼낸다? 뭐라 답해줘야 하긴 하는데 곤란하겠죠..그러니 아에 언급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사과도 안받는 거에 더 가깝지 않을까해요.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 정의를 외치는 일도 좋지만 정부의 입장에서 외교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것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625와 베트남전은 경우가 크게 다르다 생각합니다. 이는 북베트남-남베트남과 북한-남한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 이외에 영국/중국 등의 합의에 의해 분단되어 남한과 북한으로 각기 정권이 세워진 경우죠. 반면 베트남은 비시 프랑스가 일제에 의해 베트남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시점에 월맹이 자력으로 항일 투쟁에 성공하여 전국적인 봉기에 성공하고 독자적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군과 중국 국민당이 자의적으로 베트남에 진주한 이후 프랑스에게 권한을 반환하면서 분단된 것입니다. 즉 북베트남은 자생적으로 형성된 저항 세력으로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해 낸 반면... 더 보기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 이외에 영국/중국 등의 합의에 의해 분단되어 남한과 북한으로 각기 정권이 세워진 경우죠. 반면 베트남은 비시 프랑스가 일제에 의해 베트남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시점에 월맹이 자력으로 항일 투쟁에 성공하여 전국적인 봉기에 성공하고 독자적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군과 중국 국민당이 자의적으로 베트남에 진주한 이후 프랑스에게 권한을 반환하면서 분단된 것입니다. 즉 북베트남은 자생적으로 형성된 저항 세력으로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해 낸 반면... 더 보기
625와 베트남전은 경우가 크게 다르다 생각합니다. 이는 북베트남-남베트남과 북한-남한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 이외에 영국/중국 등의 합의에 의해 분단되어 남한과 북한으로 각기 정권이 세워진 경우죠. 반면 베트남은 비시 프랑스가 일제에 의해 베트남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시점에 월맹이 자력으로 항일 투쟁에 성공하여 전국적인 봉기에 성공하고 독자적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군과 중국 국민당이 자의적으로 베트남에 진주한 이후 프랑스에게 권한을 반환하면서 분단된 것입니다. 즉 북베트남은 자생적으로 형성된 저항 세력으로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해 낸 반면 남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이 번갈아 점령한 식민지고 괴뢰정권이었을 따름이죠.
이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북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다시금 자주성을 재입증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제네바 협정이 맺어져서 56년 7월에 베트남 전역에서 총선거를 치러서 통합 베트남 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하죠. 그러나 이후 남베트남에서 지엠이 미국의 지원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여 프랑스의 영향력을 거세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미국과 더불어 총선거를 거부하면서 판이 깨지고요. 이 역시 한반도와는 완전히 상이합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과 소련이 총선거를 거부하며 남한만이 UN의 관리하에 단독 선거를 치른 반면 베트남은 남베트남과 미국이 총선거를 거부했으니까요. 총선을 치렀으면 월맹의 압승이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월남 쪽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대불전 승전의 대가가 결국 전국 단위 총선거였던 것인데 이를 한쪽이 일방적으로 거부한 이상 베트남 지역에 대한 정통성과 명분은 북베트남 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625는 UN이 참전한 반면 베트남전은 그렇지 못한 게 이 때문이죠.
또한 남베트남은 남한과 달리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남민전의 상부 조직은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인사들이지만 기층의 하부조직은 대부분 남베트남인이었으며 꾸준히 인력이 수혈되었고 현지인들의 지원을 받았죠. 모든 남베트남인이 남민전을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남베트남 정부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자생적인 반정부 정서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반면 남한은 이승만이 런하던 때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고요.
그나마 저 지엠이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하고 미국이 이를 지원하고 묵인하면서 정통성은 꺼낼 건덕지도 없게 됩니다. 친미 쿠데타로 집권한 인사를 자주 수반이라고 포장해놓고는 재차 쿠데타로 갈아치웠으니 괴뢰 정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625는 김일성이 남침을 하며 시작된 전쟁인 반면, 베트남전은 전면전을 개전한 건 미국이라는 점도 명백한 차이고요. 그 전에 국지전과 게릴라가 행해졌다고 하지만 어차피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미국이 프랑스 지원한 것도 매한가지고 결국 산발적인 전투가 아니라 총력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 건 미국이 시작한 거죠. 이 점에서도 625와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트남전은 미국내의 반전 여론에 못 이겨 패배를 자인한 전쟁입니다.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공감대가 이미 당대에 만연했고 여론의 압력을 닉슨 행정부가 극복할 수가 없었죠. 심지어 전쟁 당사자인 참전 용사들로부터도 규탄이 행해졌고요. 반면 625는 존재감이 없는 잊혀진 전쟁이란 말은 있어도 명분 없는 잘못된 전쟁이라고 일컬어지진 않습니다. 양 전쟁의 핵심 주체였던 미국인들의 가치판단이 완전히 상이하다는 거죠. 아래는 71년 4월 18일 당시 워싱턴에서 참전 용사들이 베트남전 훈장을 집어 던지며 정부에 항의한 사건입니다. '윈터 솔저'란 말이 여기서 나왔죠. 우리는 국가에 의해 버려진 음지의 겨울 병사들이라는 뜻이죠. 625 가지고는 이런 일 없었고요.
https://youtu.be/iydq2QS35iQ
뿐만 아니라 베트남 통일 이후 미국이 공산주의 학살 집단인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를 지원해서 베트남을 견제하려고 했다는 것에서도 명분은 휴짓조각이 됩니다. 민주주의 우방을 수호하는 전쟁이었다고 하기엔 끝나고 나서 한 짓거리가 이념 배반이라는 점에서 고약하지요. 공산당 몰아내자고 더 미친 공산당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이었죠.
결정적으로 남민전은 승전하여 북베트남에 남베트남을 이양했고 그 뒤로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며 베트남과 미국은 이미 수교를 했습니다. 명분이고 정통성이고 뭐고 전쟁에서 이긴 쪽이 결정하자는 게 베트남전이었는데, 승패는 명백하게 판가름이 났고 그 결과로 수립된 국제 질서를 이젠 상호 인정하고 있지요. 국제정치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며 민감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는 어른의 사정 같은 게 있다 보니 명확히 말만 안 하는 거지 누가 옳고 그른지는 흑백이 분명하게 가려진 사안이라는 것이죠. 중국의 정통성이 국민당이 아니라 공산당에게 있고 미국의 정통성이 남군이 아니라 북군에 있고 독일의 정통성이 동독이 아니라 서독에 있다는 게 이제 불가역적인 사실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야 명확하게 선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안들, 가령 베트남 내부의 소수민족 문제도 있고 남베트남인들의 모호한 정치적 입장 같은 것들도 있고 보트 피플 문제도 있고 등등 난점들이 있지만 그게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시켜주진 못한다 생각합니다.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란 말이 괜히 베트남전에서 나온 게 아니죠. 할 말 없을 정도로 명분상으로 쳐발리고선 어떻게 위신을 지키며 퇴장해야 하는지나 고민하고 있었던 당시 미국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낱말이죠.
결론적으로 625와 베트남전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전쟁이라 봅니다. 앞서 말한 바를 반복하며 요약하자면, 북베트남은 북한과 달리 소련의 딸랑이가 아니라 스스로 외세를 몰아낸 저항 세력이었고, 남베트남은 남한과 달리 괴뢰정부였을 뿐이고, 실제로 북베트남은 잇따른 승전으로 자신들의 자주성을 입증한 반면,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미국의 처신이 그 괴뢰성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고, 남베트남 스스로 반정부 정서를 통제 못했고, 선빵 친 것도 미국이고, UN이 참전할 명분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남민전이 이겼으며, 그 패배에 대해서 미국 내부에서도 헛짓거리했다고 깠습니다. 이런 차이점으로 거론될 수 있는 것들 하나하나는 그럴 수도 있고 별거 아니라고 그게 그거라고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모든 걸 종합해 보면 극히 상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세상사라는 게 명확히 경계선이 그어지는 게 아니고, 결국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회색지대에서 정도의 차이에 따라 적당히 선을 긋고 판단해야 하는 건데, 625와 베트남전은 그 '정도'의 차이가 누적적으로 현격하다는 것이죠.
이건 딱히 제가 편향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003년 3월에 [국방부]에서 발간한 베트남전쟁연구총서에도 비슷한 입장들을 찾아볼 수 있거든요.
"미국의 군사평론가인 Brian Jenkins는 '베트남에서 미국은 공산주의와 싸운 것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어느 외국 세력과도 타협을 한 바 없는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싸웠다. 호찌민은 베트남 민족의 민족주의 전통에 자기의 이념을 접목시켰다. 그는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역사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수천 년 동안 베트남 민족주의의 본산이었던 촌락 공동체를 유지하고 활용했다. 또한 호찌민과 그의 추종자들은 남베트남이 아닌 자신들이 베트남의 정통성을 승계했다고 주장했으며 남과 북의 모든 베트남 국민들도 이를 인정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사실상 북베트남이 자신들이 베트남의 정통성을 승계했다고 주장한 것과 베트남 국민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베트남인이 수립한 정부는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뿐이었으며 일본군에 의해 제위를 유지하던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는 국가의 통치권을 형식적으로나마 호찌민에게 이양했다. 또한, 프랑스와 협상해 프랑스군의 베트남 재진주를 허용하는 대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인정받고 중국의 군대를 북베트남에서 몰아낸 것도 호찌민이었기 때문이다..
1946년 프랑스가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인정하였기는 하나, 이는 프랑스군의 베트남 북부 재진주를 위한 양보에 불과한 것으로서 베트남의 합법적인 정부로 국제적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이의 정규군이 군대로서 인정받은 것은 1954년 7월 20일의 제네바 평화 협정을 통해서였다. 동 협정은 북위 17도선 이북에서 호찌민 정부의 통치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남쪽은 프랑스의 식민체제를 유지하되 2년 후인 1956년 7월까지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총선거를 거부한 것은 북쪽의 호찌민 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비호하에 1955년 10월 26일 수립된 남쪽의 응오딘지엠 정부였다. 따라서 베트남의 정통성은 호찌민이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호찌민과 보응 웬 지압의 전략전술, 김종수 대령)"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북베트남의 남부 개입 과정은 이렇다. 남부에는 베트민 세력이 남아 있었고 이들에 의한 게릴라 활동이 지속되었다. 레주언은 1956년 남부를 방문했고, 남부 지원의 필요성을 인식, 이를 중앙당에 보고했으며, 지원이 결정되고 남부의 반 지엠 세력을 규합,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 천착한다면 결론은 '명백히 NLF는 공산주의 전위조직이었으며, 1960년 당이 정치적 수단만으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1958년 메콩 유역, 사이공과 미토 사이에 위치한 촌락에서 현지 연구를 수행했던 Gerald Cannon Hickey에 의하면 이미 1958년부터 '베트공'이라 불리던 남부 게릴라들의 활동을 경험하고 있었다고 하며 세금 징수, 병력 징발, 암살 등을 수반한 이들의 활동은 1959년 내내 증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남부인의 투쟁이 먼저 시작되었고 북측에서 이를 지원한 것이다... 반 지엠 정서를 공유하던 남부인들로서는 가능한 한 모든 세력의 연합을 모색했던 것이며, 공산주의도 그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지엠 정권에 의해서 자칫하면 무자비하게 공산주의자로 내몰리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북부와의 연계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북쪽을 대표하는 호찌민의 민족주의자로서의 위상이 지엠과 대비되어 급속도로 상승하던 상황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추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기 민족해방전선 구성원 중에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당연하고, 그들을 매개로 해 북쪽과 연계되었음도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 지엠 정서를 공유하는 남부인들이 없었다면 민족해방전선 같은 조직은 결성될 수도 발전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의 실체-지역성과 관련하여, 최병욱 교수)"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 이외에 영국/중국 등의 합의에 의해 분단되어 남한과 북한으로 각기 정권이 세워진 경우죠. 반면 베트남은 비시 프랑스가 일제에 의해 베트남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시점에 월맹이 자력으로 항일 투쟁에 성공하여 전국적인 봉기에 성공하고 독자적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군과 중국 국민당이 자의적으로 베트남에 진주한 이후 프랑스에게 권한을 반환하면서 분단된 것입니다. 즉 북베트남은 자생적으로 형성된 저항 세력으로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해 낸 반면 남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이 번갈아 점령한 식민지고 괴뢰정권이었을 따름이죠.
이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북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다시금 자주성을 재입증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제네바 협정이 맺어져서 56년 7월에 베트남 전역에서 총선거를 치러서 통합 베트남 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하죠. 그러나 이후 남베트남에서 지엠이 미국의 지원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여 프랑스의 영향력을 거세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미국과 더불어 총선거를 거부하면서 판이 깨지고요. 이 역시 한반도와는 완전히 상이합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과 소련이 총선거를 거부하며 남한만이 UN의 관리하에 단독 선거를 치른 반면 베트남은 남베트남과 미국이 총선거를 거부했으니까요. 총선을 치렀으면 월맹의 압승이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월남 쪽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대불전 승전의 대가가 결국 전국 단위 총선거였던 것인데 이를 한쪽이 일방적으로 거부한 이상 베트남 지역에 대한 정통성과 명분은 북베트남 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625는 UN이 참전한 반면 베트남전은 그렇지 못한 게 이 때문이죠.
또한 남베트남은 남한과 달리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남민전의 상부 조직은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인사들이지만 기층의 하부조직은 대부분 남베트남인이었으며 꾸준히 인력이 수혈되었고 현지인들의 지원을 받았죠. 모든 남베트남인이 남민전을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남베트남 정부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자생적인 반정부 정서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반면 남한은 이승만이 런하던 때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고요.
그나마 저 지엠이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하고 미국이 이를 지원하고 묵인하면서 정통성은 꺼낼 건덕지도 없게 됩니다. 친미 쿠데타로 집권한 인사를 자주 수반이라고 포장해놓고는 재차 쿠데타로 갈아치웠으니 괴뢰 정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625는 김일성이 남침을 하며 시작된 전쟁인 반면, 베트남전은 전면전을 개전한 건 미국이라는 점도 명백한 차이고요. 그 전에 국지전과 게릴라가 행해졌다고 하지만 어차피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미국이 프랑스 지원한 것도 매한가지고 결국 산발적인 전투가 아니라 총력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 건 미국이 시작한 거죠. 이 점에서도 625와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트남전은 미국내의 반전 여론에 못 이겨 패배를 자인한 전쟁입니다.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공감대가 이미 당대에 만연했고 여론의 압력을 닉슨 행정부가 극복할 수가 없었죠. 심지어 전쟁 당사자인 참전 용사들로부터도 규탄이 행해졌고요. 반면 625는 존재감이 없는 잊혀진 전쟁이란 말은 있어도 명분 없는 잘못된 전쟁이라고 일컬어지진 않습니다. 양 전쟁의 핵심 주체였던 미국인들의 가치판단이 완전히 상이하다는 거죠. 아래는 71년 4월 18일 당시 워싱턴에서 참전 용사들이 베트남전 훈장을 집어 던지며 정부에 항의한 사건입니다. '윈터 솔저'란 말이 여기서 나왔죠. 우리는 국가에 의해 버려진 음지의 겨울 병사들이라는 뜻이죠. 625 가지고는 이런 일 없었고요.
https://youtu.be/iydq2QS35iQ
뿐만 아니라 베트남 통일 이후 미국이 공산주의 학살 집단인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를 지원해서 베트남을 견제하려고 했다는 것에서도 명분은 휴짓조각이 됩니다. 민주주의 우방을 수호하는 전쟁이었다고 하기엔 끝나고 나서 한 짓거리가 이념 배반이라는 점에서 고약하지요. 공산당 몰아내자고 더 미친 공산당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이었죠.
결정적으로 남민전은 승전하여 북베트남에 남베트남을 이양했고 그 뒤로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며 베트남과 미국은 이미 수교를 했습니다. 명분이고 정통성이고 뭐고 전쟁에서 이긴 쪽이 결정하자는 게 베트남전이었는데, 승패는 명백하게 판가름이 났고 그 결과로 수립된 국제 질서를 이젠 상호 인정하고 있지요. 국제정치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며 민감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는 어른의 사정 같은 게 있다 보니 명확히 말만 안 하는 거지 누가 옳고 그른지는 흑백이 분명하게 가려진 사안이라는 것이죠. 중국의 정통성이 국민당이 아니라 공산당에게 있고 미국의 정통성이 남군이 아니라 북군에 있고 독일의 정통성이 동독이 아니라 서독에 있다는 게 이제 불가역적인 사실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야 명확하게 선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안들, 가령 베트남 내부의 소수민족 문제도 있고 남베트남인들의 모호한 정치적 입장 같은 것들도 있고 보트 피플 문제도 있고 등등 난점들이 있지만 그게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시켜주진 못한다 생각합니다.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란 말이 괜히 베트남전에서 나온 게 아니죠. 할 말 없을 정도로 명분상으로 쳐발리고선 어떻게 위신을 지키며 퇴장해야 하는지나 고민하고 있었던 당시 미국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낱말이죠.
결론적으로 625와 베트남전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전쟁이라 봅니다. 앞서 말한 바를 반복하며 요약하자면, 북베트남은 북한과 달리 소련의 딸랑이가 아니라 스스로 외세를 몰아낸 저항 세력이었고, 남베트남은 남한과 달리 괴뢰정부였을 뿐이고, 실제로 북베트남은 잇따른 승전으로 자신들의 자주성을 입증한 반면,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미국의 처신이 그 괴뢰성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고, 남베트남 스스로 반정부 정서를 통제 못했고, 선빵 친 것도 미국이고, UN이 참전할 명분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남민전이 이겼으며, 그 패배에 대해서 미국 내부에서도 헛짓거리했다고 깠습니다. 이런 차이점으로 거론될 수 있는 것들 하나하나는 그럴 수도 있고 별거 아니라고 그게 그거라고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모든 걸 종합해 보면 극히 상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세상사라는 게 명확히 경계선이 그어지는 게 아니고, 결국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회색지대에서 정도의 차이에 따라 적당히 선을 긋고 판단해야 하는 건데, 625와 베트남전은 그 '정도'의 차이가 누적적으로 현격하다는 것이죠.
이건 딱히 제가 편향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003년 3월에 [국방부]에서 발간한 베트남전쟁연구총서에도 비슷한 입장들을 찾아볼 수 있거든요.
"미국의 군사평론가인 Brian Jenkins는 '베트남에서 미국은 공산주의와 싸운 것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어느 외국 세력과도 타협을 한 바 없는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싸웠다. 호찌민은 베트남 민족의 민족주의 전통에 자기의 이념을 접목시켰다. 그는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역사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수천 년 동안 베트남 민족주의의 본산이었던 촌락 공동체를 유지하고 활용했다. 또한 호찌민과 그의 추종자들은 남베트남이 아닌 자신들이 베트남의 정통성을 승계했다고 주장했으며 남과 북의 모든 베트남 국민들도 이를 인정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사실상 북베트남이 자신들이 베트남의 정통성을 승계했다고 주장한 것과 베트남 국민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베트남인이 수립한 정부는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뿐이었으며 일본군에 의해 제위를 유지하던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는 국가의 통치권을 형식적으로나마 호찌민에게 이양했다. 또한, 프랑스와 협상해 프랑스군의 베트남 재진주를 허용하는 대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인정받고 중국의 군대를 북베트남에서 몰아낸 것도 호찌민이었기 때문이다..
1946년 프랑스가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인정하였기는 하나, 이는 프랑스군의 베트남 북부 재진주를 위한 양보에 불과한 것으로서 베트남의 합법적인 정부로 국제적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이의 정규군이 군대로서 인정받은 것은 1954년 7월 20일의 제네바 평화 협정을 통해서였다. 동 협정은 북위 17도선 이북에서 호찌민 정부의 통치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남쪽은 프랑스의 식민체제를 유지하되 2년 후인 1956년 7월까지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총선거를 거부한 것은 북쪽의 호찌민 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비호하에 1955년 10월 26일 수립된 남쪽의 응오딘지엠 정부였다. 따라서 베트남의 정통성은 호찌민이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호찌민과 보응 웬 지압의 전략전술, 김종수 대령)"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북베트남의 남부 개입 과정은 이렇다. 남부에는 베트민 세력이 남아 있었고 이들에 의한 게릴라 활동이 지속되었다. 레주언은 1956년 남부를 방문했고, 남부 지원의 필요성을 인식, 이를 중앙당에 보고했으며, 지원이 결정되고 남부의 반 지엠 세력을 규합,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 천착한다면 결론은 '명백히 NLF는 공산주의 전위조직이었으며, 1960년 당이 정치적 수단만으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1958년 메콩 유역, 사이공과 미토 사이에 위치한 촌락에서 현지 연구를 수행했던 Gerald Cannon Hickey에 의하면 이미 1958년부터 '베트공'이라 불리던 남부 게릴라들의 활동을 경험하고 있었다고 하며 세금 징수, 병력 징발, 암살 등을 수반한 이들의 활동은 1959년 내내 증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남부인의 투쟁이 먼저 시작되었고 북측에서 이를 지원한 것이다... 반 지엠 정서를 공유하던 남부인들로서는 가능한 한 모든 세력의 연합을 모색했던 것이며, 공산주의도 그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지엠 정권에 의해서 자칫하면 무자비하게 공산주의자로 내몰리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북부와의 연계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북쪽을 대표하는 호찌민의 민족주의자로서의 위상이 지엠과 대비되어 급속도로 상승하던 상황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추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기 민족해방전선 구성원 중에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당연하고, 그들을 매개로 해 북쪽과 연계되었음도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 지엠 정서를 공유하는 남부인들이 없었다면 민족해방전선 같은 조직은 결성될 수도 발전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의 실체-지역성과 관련하여, 최병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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