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10/29 17:29:24
Name   녹차김밥
Subject   82년생 녹차김밥 : 빠른 년생에 관하여
빠른년생에 관한 유머 글이 잊을 만 하면 올라오는데, 관련해서 제 상황도 매우 특이했던지라 인생역정(?)을 소개해 보면서 여러분의 뼈 때리는 비판도 좀 받아 보고자 합니다.

저는 5월생입니다. 일단 나이를 대놓고 공개하기는 좀 뭣하지만, 내용 서술의 편의를 위해 하나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영화 제목을 따라 82년생으로 합시다. 82년생 녹차김밥. 5월생이지만, 아버지께서 학교를 일찍 보내고 싶은 열망이 크셨던가 봅니다. 그리고 그때는 그게 유행이었다고들 해요. 그래서 뭔가의 서류를 조작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서류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저는 장관 하기엔 이미 틀린 것 같습니다. 여하튼 호적이나 주민등록은 5월생으로 되어 있지만, 초등학교 졸업장만큼은 2월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학교 1년 일찍 들어간 정도는 흔한 이야기 아니냐고요?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81년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처음에는 제가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어린 줄도 몰랐습니다. 그냥 다 또래이자 같은 학년이라고 생각했죠. 몇 살인지보다 몇 학년인지가 훨씬 중요했고, 사람들이 물어보는 것도 나이가 아니라 학년이었습니다. 한두 해 지나면서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어리다는 걸 알게 됐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습니다. 내 친구들은 그냥 같은 학년 친구들인 게 당연했거든요.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상황이었지요. 아무도 그런 상황에 친구들을 형/누나로 부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래 학년들은 감히 저에게 맞먹을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 때 다들 그랬듯이 같은 학년 이외에는 접할 일이 거의 없기도 했죠.  

다만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싸움을 엄청 못했다는 것에 있었지요. 지금도 기억나는 걸 보면 생각보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게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억울하게 당해도 신체 능력이 떨어지니 싸워서 이겨볼 수가 없습니다. 싸우는 것뿐 아니라 스포츠에도 약했죠. 축구할 때 양 팀 주장이 가위바위보로 한 명씩 뽑아가는 식으로 팀이 나뉠 때, 저는 대개 마지막에 남은 두세 명 중의 하나였습니다.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죠. 이때는 몰랐지만 어릴 때라 나이 1년 차이가 상당한 신체 능력의 차이를 가져왔던 겁니다. 당시의 기억은 이후 제 가치관 형성에 꽤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나이 차이로 인한 신체 능력의 갭이 좁혀지면서야, 내 운동 능력이 그렇게까지 바닥은 아니고 또래 평균 정도는 되는구나 하고 자각할 수 있었지요. 그즈음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저는 소위 중학교 조기 졸업을 하게 되는데요. 당시 국내에는 법적으로 일반 중고등학교의 조기 졸업 제도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생기면서 우연히도 우리 학교가 시범학교로 지정되게 된 거죠. 학년에서 성적이 좋은 수십 명을 추리고, 그 안에서 또 특별 수업을 하고, 기타 등등 여러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4명이 '월반'을 하게 됩니다. 1학년이 끝나고 3학년 교실로 직행하게 됩니다. 80년생들과 같은 반이 된 거죠.

처음에는 한 해 선배들과 같은 교실에서 지내면서 주눅도 약간 들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가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반년 이상 지날 무렵에는 네 명 중에 깡 좋은 녀석부터 약간씩 말이 짧아지기 시작합니다. 같이 수업을 듣던 3학년들도 우리와 자연히 섞여 어울리며 친해지기 시작하던 때였지요. 학년이 끝날 무렵에는 사실상 거의 동갑 친구들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이라면 학년은 학년이고, 형은 형이지. 하며 자연스레 관계 설정을 했을 텐데, 당시에는 우리도 기존 3학년들도 같은 학년이자 매일 얼굴 맞대는 사이를 '친구(말놓는 동갑)' 이외의 관계로 설정하는 법을 모르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겁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기존 3학년에 이름이 '관형'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의 말이 짧아지면서 제일 먼저 형 호칭을 박탈(?)당한 친구였습니다. '관형!' 하고 그냥 불러도 형 호칭을 뺀 것 같지 않아서 죄책감이 덜했거든요.

2년 만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타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친구들과 낯선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 때부터는 80년생들과 완전히 친구로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이를 굳이 숨긴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은 당연히 같은 학년 친구로 받아들여 주었죠.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제가 두 살 어리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잊은 채 어울렸습니다. 간혹 나이를 떠올려야 할 상황이 생길 때 오히려 어색해할 정도였죠. 고등학교 때도 역시 학년이 모든 위계질서를 가르는 기준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제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어울렸던 것이 비결의 하나가 아니었나 합니다. 지금이었으면 좀 고민스러웠을 상황인데, 저는 당시 어색하지도 고민스럽지도 않게 잘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정체성은 그냥 완전히 80년생이었던 거죠.

그렇게 완벽하게 80년생으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던 저는 만 16세의 나이로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80년생 99학번 과 동기들은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럼없이 저를 친구로 대했지만, 가끔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간혹 마주치는 81년생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었죠. 대학 생활을 하면서 '같은 학년' '같은 학교' 이외의 친구 스펙트럼도 생기면서 점차 어색한 상황들이 늘어납니다. XX 학교 99학번 정도로 저를 인지한 후, 한참 지나서야 뭐야 너 82년생이었어? 하며 황당해하는 경우들. 제 입장에서는 굳이 무슨 상하 관계로 대접을 받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80년생, 99학번' 집단에 제 정체성을 일치시키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에 그 집단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듯 행동했던 것이 나중에 배신감을 안겨줬던 적이 꽤 있는 거죠. 지나고 나서 생각하는 거지만, 그 어색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친구들은 저와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어색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리슬쩍 저와 멀어지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친구는 교내 동기들이었고, 이 친구들과는 '80년생, 99학번'으로서의 제 정체성을 이어 가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후배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던 터라 족보 꼬임을 최소화하면서 대학 생활을 합니다. 대학 외의 친구들과는 주로 1:1 관계를 통해 만나게 되므로, 각각 편하게 느끼는 대로 마음껏 관계설정을 합니다. 서로 말 놓는 80년생 친구, 81년생 친구, 82년생 친구가 모두 생깁니다. 가끔 족보가 꼬이곤 했지만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후 진로를 고민하게 되면서 중간에 휴학하고 회사에 다니기도 하는 등 2년 정도의 시간을 소모하며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편입을 통해 의과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런데 의대 본과 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더는 '80년생, 99학번'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대 본과 1학년은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한 학년에 모여 있었고, 더는 동질적인 또래 집단이라고 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죠. 같이 학사편입한 사람들만 해도 나이대가 다양했습니다. 그 안에는 내가 '80년생, 99학번'이던 시절부터 친분을 가지며 각자와의 관계 설정을 이미 마쳤던 80, 81, 82년생도 있었고, 새로 만나는 80, 81, 82년생들도 있었죠. 본격적으로 족보가 심하게 꼬이기 시작한 거죠.

그중 가장 심하게 꼬였던 족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이전 대학에서 2년을 추가로 소모하면서 진로를 탐색하던 동안, 같은 과 후배(81년생, 00학번)가 학사편입을 거쳐 이미 의대에 와 있었습니다. 전적 대학의 후배이자 의대에서는 한 학년 선배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또한 저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1년 후배이기도 했습니다. 즉, 나이가 저보다 한 살 많고 의대 선배이지만, 제 고등학교 후배이자 대학교 학부 후배인 사람이 생긴 거죠.

제가 '80년생, 99학번'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성장기 동안 그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살아왔고 그게 제일 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를 통한 상하 관계 설정으로부터 모든 인간관계가 시작되는데, 중고등학교의 같은 학년 또래와 상하 관계로 지낼 수는 없었죠. 다행히 중고등학교/대학교를 거치면서 많은 친구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었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고 바꾸는 데는, 처음 중학교 3학년 때처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대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7살 꼬마들까지요. 상대방은 저에게 말을 놓기도 하고 서로 존대하기도 하죠. 저는 어느 쪽이든 편합니다. 돌고 돌아 제 나이로 살게 되고 보니, 한국 사회가 '나이 문화'로 얼마나 많은 것을 소모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저는 그래서 유머 게시판의 https://kongcha.net/pb/pb.php?id=fun&no=41150 글의 주인공이 정말 바보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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