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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3/01/27 14:15:13 |
Name | 스라블 |
Subject |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한 때 |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때가 언제인가요? 저는 2006년 초의 겨울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당시 저는 대학생이었는데, 의대 본과 시기였습니다. 어마어마한 학습량과 시험을 죽을 둥 살 둥 버텨내고 드디어 찾아온 온전한 방학이었죠. 졸업까지는 한참 남은 상황이었고,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의대생들이 그렇듯 취업이나 스펙 쌓기에 대한 압박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는 방학이었습니다. 뭔가를 해야겠다, 하던 차에 문득 스노보딩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전에 한 번 스키장에 가서 보드를 타고 하루 종일 미친 듯이 구른 다음에 며칠 동안 후유증에 고생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눈밭에 구르는 게 너무 좋았던 기억이었지요. 바로 스노보드 동아리에 가입을 하고, 스키장 시즌권을 끊고, 보드 장비와 옷을 샀습니다. 그리고 두어 달 가까이를 스키장 인근에 잡았던 동아리 시즌방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보드 장비를 끌고 설원으로 향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드를 타고 설원을 달리고 구릅니다. 차갑고 시린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눈 쌓인 산의 풍광을 즐깁니다. 구석진 곳의 눈밭에 잠시 드러누워서 하늘도 봅니다. 운동신경이 좋지 않아 기술은 아주 천천히 늘지만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니니 급할 것도 없습니다. 피곤한 날에는 그냥 늦게까지 방에 누워 있다가 느지막이 나서기도 합니다. 삘 받는 날에는 야간개장 때 나가서 달립니다. 친구랑 같이 나가기도 하고 혼자 나가기도 합니다. 모든 건 다 내 마음입니다. 20대에는 으레 있기 마련인 애정사도 없습니다. 내가 마음에 둔 사람도 없고 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이로 인한 감정의 소모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로맨스에 대한 욕심도 나지 않습니다. 물론 예쁜 분들은 아무리 두툼한 스키복을 입고 헬멧에 고글로 온몸과 얼굴을 둘둘 가려도 놀랍게도 다 티가 납니다. 하지만 그냥 예뻐서 한 번쯤 눈이 갈 뿐, 별달리 수작을 걸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압박도 없습니다. 군 문제도 이미 해결한 상태입니다.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것도 없고 내가 세상에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시원한 설원에서 넘어지고 구르면서 기술을 연마하고 즐기는 걸로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비싼 보드 장비를 덥석 구입하고 시즌권을 사고 하는 이야기를 하자니 팔자 좋은 금수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입던 보드복은 인터넷 최저가로 파는 위아래 세트로 6만 원 전후하는 옷이었습니다. 시즌 내내 매일같이 똑같은 싸구려 옷을 입고 구르다 보니 마감이 다 터지고 옷감이 닳아서 엄청 후줄근해졌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신경도 안 쓰고 부끄럽지도 않게 다녔다 싶습니다. 부츠는 아저씨가 떨이로 싸게 파는 것에 낚여서 제 사이즈보다 두 사이즈나 작은 것을 샀는데 탈 때마다 발이 너무 아팠고, 실제로 시즌이 끝날 때쯤에는 발톱이 까맣게 썩어서 빠졌습니다. (그다음 시즌에도요..) 그래도 바보같이 좋다고 신고 다녔지요. 밥은 주로 동아리 시즌방에서 먹었는데, 밥에 김치-스팸-김 세 가지 중에 두어 가지 정도를 꺼내서 시즌 내내 돌려가면서 먹었습니다. 과장이 아니고 진짜였어요. 김치, 스팸, 김, 김치, 스팸, 김, 김치, 스팸, 김.. 아, 간혹 참치캔을 따는 날도 있었군요. 여하튼 식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가끔씩 재주 좋은 친구가 있는 날에는 김치찌개나 김치볶음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너무 똑같은 식사에 질린 친구 하나가 '야. 오늘은 진짜 맛있는 거 좀 먹자!' 하는 바람에 다 같이 잠시 고민하다가 동네 중국집 짜장면을 시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진심으로 정말 맛있는 걸 먹고 싶었는데, 식사에 대한 창의력이 이미 바닥났었나 봅니다. 고작 진지하게 맛있는 걸 떠올린 게 짜장면이었으니 말이죠. 스키장 내부에 있는 푸드코트나 식당 같은 데서는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는데, 당시에는 그 날강도 같은 가성비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즌이 거의 끝나서 봄 냄새가 약간씩 나던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기서도 한 번은 먹어 봐야지' 하고 스키장 식당에 들어가서 황태 해장국을 시켜 먹었는데, 그 맛이 정말 상상도 못했던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온몸이 따스해지던 그 느낌이란.. 그 때 이후로 저는 아직도 황태 해장국을 정말 좋아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 험하게 고생해가면서, 발톱 빠져가면서 결핍 속에서 지낸 생활이었는데, 그 모든 결핍이 하나도 결핍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두어 달이었습니다. 지금 떠올리다 보니 결핍이 있었구나 하는 거지 그때는 그냥 모든 것이 좋기만 했지요. 그때만큼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던 때가 지금까지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환경이 달라져서 대부분의 유부남들처럼 혼자만의 취미를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최근 10년 이상은 스키장에 간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설령 스키장에 가더라도 나이 먹고 살이 쪄서 그때처럼 덮어놓고 신나게 구르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가끔 콧속에 날카로운 영하의 공기가 들어갈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흐뭇해지곤 합니다. ----- 날이 추워지니 몇 년 전 제가 타 사이트에 썼던 토막글이 문득 생각나 약간 다듬어 올려 보았습니다. 어딘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분이 있다면 다른 데서 한 번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흐뭇하곤 합니다.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었지만 내 마음 속 모든 것이 충만했던 그 때는 참 좋았네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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