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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7/13 08:59:50수정됨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군대에서 주먹질한 썰
때는 200X년 어느 화창한 일요일. 병장 기아트윈스는 말년휴가를 2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냥 몸조심하며 살았으면 될 것을 저는 어째서인지 당직병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아마도 후배 위하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가 하루 희생해주면 모두가 편하니까요.

전투복을 입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저희 중대 앞 농구대에서 다수의 꽁초를 발견했습니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 저희 중대 꼬꼬마들이 중대 선임하사에게 개혼났던 일이 기억납니다. 중대 사무실 앞이 꽁초투성인데 이거 누가 그런거냐. 우리 애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사무실 앞을 이렇게 만들었을 리는 없고... 다른 중대 병사들이 농구하고 담배피고 걍 버리고 간 거다. 아니 그러면 걔들이 그렇게 꽁초 버려두도록 냅두냐. 니넨 짬도 없냐. 걔들 못혼내냐. 빨랑 안치우냐. 뭐 대충 그런 식이었지요.

아니... 이 문제로 꽁초 관리 잘 하라는 전체 전달을 얼마 전에 우리 중대 병장 중 하나가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또 이러네... 이러면 이쁜 우리 중대 꼬꼬마들만 억울하게 고생해고 욕먹고 그럴 거 아냐.... 약간 빡이 칩니다.

음. 누가 범인인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일요일 오전에 여기서 농구했던 애들. 가만보자. 다 옆 중대 뒷 중대 앞 중대 짬찬 상병 + 파릇파릇한 병장들입니다. 소집해서 갈구자니 망설여집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역을 앞둔 말년병장은 사실 별 힘이 없습니다. 얼마 후면 안 볼 사람이거든요 ㅋㅋㅋ 상병에서 막 병장이 되려는 애들, 혹은 그렇게 막 병장이 된 애들의 말빨이 가장 쎕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틀만 보고 안 볼 사람이 권력의 전성기에 돌입한 애들을 네다섯명씩 집합시켜서 갈군다는 건 사실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빡이 차오른 상태. 말을 안들어봤자 뭐 하극상이라도 하겠냐 싶어서 걍 집합을 걸었는데 ㅋㅋㅋㅋㅋ아닛 ㅋㅋㅋㅋㅋ 시바 ㅋㅋㅋㅋㅋㅋㅋㅋ 한놈이 진짜 항명할 줄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르니까 일단 모이긴 했습니다. 똥씹은 표정으로 다섯명인지 다섯분인지가 신막사 2층 화장실에 모였습니다. 권력자분들께 농구대 근처에 꽁초버리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으니까 게중 한 분이 눈을 부라리면서 "아 ㅅㅂ 조용히 있다 나가지 왜 ㅈㄹ이야"라는 거 아니겠어요? 깜짝깜짝 놀란 나는 어...어..어....어..어...

십수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항명도 이해가 됩니다. 한 인간의 존엄성은 불가침에 달려있습니다. 존엄은 한 번이라도 모욕당하면 그 순간 무너져버립니다. 세 번 당하는 것과 네 번 당하는 것 사이엔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안 당하는 것과 한 번 당하는 것 사이엔 앙그라마이뉴와 아후라마즈다 만큼의 간극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귀족남성들은 단 한 차례의 치욕도 결코 참고 넘기지 못하고 결투를 걸든 자결을 하든 했던 것입니다. 군바리에게 있어 병장이 된다는 건 아이가 성인이 된다는 것, 아들이 아빠가 된다는 것, 평민이 귀족이 된다는 것, 노예가 시민이 된다는 것과 그 의미가 비슷합니다. 시민은 노예를 갈궈도 되지만 시민끼린 갈굴 수 없는 법... 갈군다는 건 시민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병장간에는 아무리 짬밥에서 차이가 있어도 어지간하면 서로 갈구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수평성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는....음... 좀 무리수를 둔 셈이지요.

저는 냉정하게 항명러 이외의 다른 얼라들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대단히 당황한 기색은 있지만 항명에 동참하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속으로 제가 고깝다곤 해도 어쨋든 저는 그들의 선임으로 2년에 가까운 시간을 군림했으니까요. 그 시간의 무게를 단숨에 극복하고 항명을 혁명으로(;;;) 발전시키려면 심사숙고할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창졸간에 그럴 틈이 어딨었겠어요. 저는 혁명의 불꽃을 적시에 차단해야 했고, 또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야, 이XX 빼고 나머진 다 가서 쉬어라."

통치의 제1계명은 동강동강 나누기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통치대상을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면 통치 못합니다. 피통치계급이 단일그룹으로 묶여있으면 그 멤버 하나를 조지는 순간 나머지 모두가 들고일어날 거 아니겠어요. 하지만 동강동강 나눠놓고 한 그룹만 조지면 다른 모든 그룹들이 '오 우린 아니군' 하며 안도하게 되고, 심지어 조짐당한 그룹을 꼬셔하기도 합니다. 저는 반기를 든 놈과 안들기로한 놈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을 그었고, 그 줄긋기는 유효했습니다. 이 곤혹스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나머지 넷은 안도하며 슬금슬금 화장실을 나갔고 이제 혁명가와 저, 둘 만 남았습니다. 얘를 용서하고 넘어갈 순 없습니다. 항명러를 냅두고 넘어가면 제 위신이 돌이킬 수 없이 박살나거든요. 이제 진압작전을 펴야합니다.



반란군놈의시키와 저는 불꽃같은 눈빛을 잠시 교환한 후 바로 교전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하하호호 주먹질 좀 해보신 챠칸 어린이들은 아시겠지만 정식으로 격투기를 배운 적 없는 퓨어 머글들의 싸움이란 참으로 볼품이 없읍니다. 이런 싸움의 70% 이상은 내 주력무기인 오른손 훅을 날리고 니 주력무기는 (대개 똑같이 오른손 훅) 내 왼팔로 막는 식입니다. 그렇게 오른팔 강공만 누르다가 한 1분 지나면 체력 앵꼬난 쪽이 먼저 유효타를 맞고 코너에 몰리지요. 승기를 잡은 쪽이 코너샷 좀 날려주다가 적당히 때렸다 싶으면 '조빱이...' 한 마디 날려주고 화장실에서 먼저 나가고 싸움 끝 ㅋ

저는 본래 싸움에 소질이 없는지라 학창시절에 싸움으로 재미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체구가 크지도 않았고 격투기를 배우지도 않았으니 당연하지요. 하지만 반란군노무스키도 마찬가지였나봅니다. 체구가 크지도 않았고 격투기를 배우지도 않았으니 둘 다 별 볼일 음슴 ㅋ 우리 둘은 서로를 향해 분노를 가득 실은 라이트 훅을 날려댔지만, 유효타 하나 없이 모두 왼팔 가드에 막히기를 반복했습니다. 한 30초나 그렇게 주고받았을까. 저는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보니 격투기란 참으로 체력소모가 심한 운동입니다. 풀파워 라이트훅이 이게.... 전신운동이라....ㅋㅋㅋ 몇개만 날려도 온몸이 피곤합니다. 서로 체력 대방출을 하고나니 이대로가다간 못이길 것 같고...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바로 그 때, 반란군노므싀키의 눈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지나갑니다. 좋은 생각이 났나봅니다. 느닷없이 로우킥을ㅋㅋㅋㅋ 날리는 게 아니겠어요.

이게 ㅋㅋㅋㅋ 때는 00년대 초반, 한참 효도르형님이 이종격투기를 쩜쪄먹던 시절입니다. 그 와중에 기라성 같은 형님들이 나와서 로우킥의 위력을 몸소 설파하던 시절이기도 했지요. 우리 순진한 반란군친구는 라이트훅 일변도로 상황타개가 안되니까 로우킥으로 저를 무너뜨려야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아마 이런 걸 생각했던 것 같은데



현실은 대략 킹오파 하단강킥

근데 ㅋㅋㅋ 미끌미끌한 화장실 바닥에서 쓰레빠를 신고 시도한 하단강킥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고, 효과를 못냈던 정도가 아니라 그 친구는 엉거주춤하게 제 앞에 주저앉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지요. 저는 이날...음...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전환된다는 물리학의 법칙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꽂으니까 팔당댐이 수력발전하듯 루피가 고무고무 총난타하듯 쉽게쉽게 펀치가 나가더군요. 게다가 꿀밤 친다는 느낌으로 약한 손도 (왼손) 섞어주니까 효과 만점.

그렇게 코너샷 좀 쳐주고... 저도 조빱이었지만 어쨌든 유구한 전통에 따라 "조빱이...." 한 마디 해주고 퇴갤했읍니다. 그리곤 (이겼으니까?) 별 일 없이 전역했읍니다. 살면서 해본 마지막 주먹다짐이기도 했고, 또 당시 감정이 워낙 격동했던지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결론 1) 로우킥은 함부로 날리는 거 아니다
결론 2) 꽁초 함부로 버리는 거 아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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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움은 원래 조빱 싸움이 재밌다..?!
  • 져도... 이겨도... 라면 이기는 조빱이 되라....?
  • 후배위하는 선배가 후배위에서 파운딩한 썰 푼다
  • 어맛 강한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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