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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5/08 20:35:46
Name   그린우드
Subject   [리뷰] 주체와 타자의 경계 허물기: <BABA IS YOU>


퍼즐 게임의 전형은 이렇습니다. 플레이어는 자기 앞에 놓인 복잡한 상황을 스스로가 가진 능력과 사고의 전개를 통해서 풀어나가 목표에 닿고 게임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플레이어의 능력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플레이어가 가진 논리적 사고력 또는 독창적 발상력이며, 다른 하나는 플레이어의 분신인 게임 속의 주인공에게 주어진 능력입니다. BABA IS YOU는 후자의 측면에서 여타 퍼즐 게임과 차별화됩니다. 가령 명작이라고 여겨지는 퍼즐 게임 포탈 1에서 주인공이 처음에는 이동과 점프만 가능했다가, 포탈 건을 습득하고 나서는 파란색 포탈을 생성하여 미리 생성된 주황색 포탈로 이동할 수 있게 되고, 나중에는 파란색 포탈과 주황색 포탈을 자유자재로 쏘아 복잡한 퍼즐을 풀어 나가는 식입니다. 이때 플레이어의 분신은 계속하여 ‘첼’이며 그녀에게 주어지는 능력과 상황에 맞추어 퍼즐을 해결해 나가며, 이것이 퍼즐 게임의 일반적 룰입니다.(물론 게임 후반부에는 테스트 장소라는 룰이 깨지고 그것이 긴박감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만, 여전히 플레이어가 주인공에게 주어진 능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퍼즐 게임의 논리는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 행위와 닮아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철학자 아도르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과 같은 참상이 일어난 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맹신한 이성중심주의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 그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는 인간 이성이 처음에 내적 자연(자기 안에 있는 불필요한 감정적 요소들)을 지배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외적 자연(자연물과 타인들)을 지배하는 진정한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타인을 객체화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주체들끼리의 끔찍한 전쟁과 학살이었구요.


퍼즐 게임을 잘 하려면 이러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게임의 규칙,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의 범위와 한계를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스스로의 이성을 통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퍼즐을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퍼즐 게임은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이성적 주체의 행위와 닮아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이성적 주체의 행위를 오디세우스의 여행에 비유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돌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며 여러 일들을 해내지만, 그 자신은 변하거나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고 스스로로 남아서 고향에 되돌아옵니다. 아도르노에게 오디세우스의 여행은 본질적으로 이성적 주체가 비이성적 객체들을 주유하고 먹어치우는 여행입니다. 타자로서의 객체는 자아로서의 주체를 위해 마음껏 이용되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이 세계를 새로운 야만(세계대전)으로 이끌었다는 것이죠.


BABA IS YOU는 우선 주인공의 능력이 불변하는 규칙으로 주어지지 않는 게임입니다. 아니, 우선 주인공이 누구인지부터 명확하지 않습니다. 초반에는 BABA라는 귀여운 토끼를 이리저리 움직여 목표(주로 깃발)에 닿으면 되는 게임이, 나중에는 텍스트를 이리저리 움직여 주인공을 KEKE, ME와 같은 다른 생명체 또는 MOON, ROCK과 같은 무생물로 바꾸어야 클리어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능력도 ‘YOU’의 주어가 되는 것에 붙는 동사 또는 수식어들에 의해 한 번에 두 칸을 움직이거나(MOVE), 공중에 떠 있거나(FLOAT), 물체에 부딪치면 사라지거나(WEAK) 하는 식으로 변화하고, 그것이 클리어에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방금 전까지 주인공과 상호작용하던 물체가 주인공 자신이 되고, 그것의 능력을 변화시키고... 이런 식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클리어 방법 중 하나는 물건을 밀어서 주인공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에 가져다 놓고, 주인공을 물건으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이때 객체(물건, 환경)을 이용하고 발판 삼아 주체(주인공)가 목표에 도달하는 일반적 퍼즐 게임의 룰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주체였던 토끼의 육체는 저 멀리 남아 있고, 나는 방금 전까지 토끼가 밀던 돌이 되어 그대로 게임은 클리어됩니다. 이 게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주체와 객체의 이항대립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명확히 구분된 주인공과 룰, 환경적 제약 속에서의 목적 합리성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퍼즐 게임의 논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게임 역시 결국 객체로서의 요소들(주인공, 텍스트, 사물들)을 조작하여 주체(플레이어)의 승리에 도달한다는 근본적인 이항대립적 한계를 무화시키는 데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직접 게임을 하며 느낀 몇 가지 부분들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게이머는 게임의 극초반부터 텍스트를 조작하며 룰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플레이어가 자신의 주인공과 관련된 완성된 문장(주로 “BABA IS YOU”)의 텍스트를 부주의하게 건드리는 순간, 잔잔한 BGM은 멈추고 불쾌한 정적음만이 흐르며, 움직이던 토끼는 조작이 불가능해집니다. 신나게 ‘룰’을 바꾸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플레이어는 순간 당황합니다. 물론 바로 백스페이스 키를 눌러 행동을 되돌릴 수 있고 나중에는 한 스테이지에 수십 번도 넘게 이를 경험하게 됩니다만, ‘YOU’라는 주체의 특권적 위치가 순간 박탈되었을 때 주인공이었던 것이 객체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경험은 준비되지 않은 플레이어에게 모종의 불편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플레이어가 완성하게 되는 문장 중 ‘YOU IS MORE’(이동한 공간 상하좌우 빈 칸에 주인공을 생성) 그리고 ‘EMPTY IS YOU’(오브젝트가 없는 빈 칸이 주인공이 됨)와 같이 플레이어는 복수의 주체, 무(無)로서의 주체(주인공)를 통제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스테이지 자체의 난이도는 논외로 하고서라도 플레이어가 굉장히 이상한 느낌을 받고 직관적으로 얼른 해결법이 떠오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당연히 주체인 플레이어는 단일체로서의 자아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말이지요. 이외에도 엔딩 등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줄이겠습니다. 여하튼 게임 중 불쑥불쑥 튀어나오게 되는 이러한 불편함 또는 이상함(uncanniness)은 주인공에게 주어진 퍼즐이라는 과제를 넘어 이성적 자아를 신뢰하는 자신만만한 퍼즐 플레이어에게 모종의 질문들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고, 그 질문들은 어쩌면 의심받지 않고 당연하다고 상정되어온 플레이어-주체의 특권적 지위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윤리적 지점에 놓여 있는 듯합니다.


BABA IS YOU는 잘 만든 퍼즐게임, 또는 메타퍼즐게임입니다. 일견 무성의해보이는 도트 그래픽, 미니멀한 음악과 음향 효과는 의외로 잘 어우러져 플레이어를 퍼즐 자체(또는 게임이 던지는 질문들)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모든 맵을 전부 클리어해보지는 못했지만 제작자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뻔하지 않은 맵들이 많아 클리어했을 때 성취감이 느껴집니다. 플레이해 보시면 독특한 경험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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