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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1/26 18:06:08 |
Name | 자연도태 |
Subject | 예술의 사망 |
오늘의 한국에서(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런 일은 발생할 수 있다) 예인(전통적인 예술가, 방송연예인, 그외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이 업인 모두)을 평가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따라에 좌우된다. 예술적인 어떤 것에 대한 어떤 수준에 대한 논의는 지하에서나 논할 스노비즘으로 취급받아, 그 논의 자체를 지하로 끌고 들어간다. 과거 섹스 피스톨즈가 외쳤던 형식주의의 해체가 한국에서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섹스 피스톨즈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형식을 만들어내고 역사에 남았으니, 형식도 부정하고 역사에 남을만한 야망도 딱히 없는 한국적인 어떤 것이 섹스 피스톨즈의 그것을 능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떤, 랩을 잘 하는 한 남자가 있다. 한 때는 업계 수위의 실력자였으나 세월의 흐름으로 약간은 밀려나 있던 그는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다 어떤 고발성 짙은 곡으로 어떤 사회적 상징이 되고 다시금 인기를 끌게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래퍼와는 다른 가상의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건에는 반대 생각을 하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어 곡의 내용에 대한 해명 요구를 받게 된다. 그는 예술가로서 기개있게 대처하기보단 한 산업의 종사자로서, 단 한 명의 팬도 내버릴 수가 없다는 가여운 마음을 택했다. 그로써 그를 아무도 비판할 수 없었고, 그 또한 안전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비판 대신 전위적인 무언가를 행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시대에 음악인이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좋아함의 이유가 조금 변화한 거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의 실력만큼은 누구나 인정하니 상관은 없었다. 어떤, 소설을 쓴다는 한 여자가 있다. 방송작가로서 방송작가적인 글만 써오던 그는 어느날 여성의 삶을 다룬 이러저러한 소설을 써서 어떤 사회적 상징이 되고, 그의 작품은 시대가 읽어야 할 문학이 되어 널리 팔리게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소설가와는 다른 가상의 인물이다) 소설적으로 그의 작품이 매우 형편없다는 비판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왔지만, 아주 작은 목소리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 소설의 성공에 의혹을 품는 음모론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소설로서의 어떤 퀄리티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설의 옹호자들에게나 반대자들에게나 중요한 것은 그 소설로 인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묻히는 것이었지, 소설 그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시를 쓴다는 한 남자가 있다. 그가 스스로 시인임을 밝히기 전에 누구도 그가 시인임을 알지 못했던 그 시인은, 어느날 이런저런 억울한 점이 있는 이런저런 사회적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사회적 상징이 되어 시를 쓰던 시절에는 절대 받지 못하던 스포트라이트를 얻게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시인과는 다른 가상의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 이렇다하고 내놓을만한 작품이 없었기에, 스스로 이름 앞에 '시인'을 꼬박꼬박 붙이고 다녔다. 그가 이러저러한 억울한 일에 대한 시를 써내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사실 그가 쓴 '시'는 어떤 수사도 운율도 분위기도 느낄 수 없는, 대화체로 구성해도 이상하지 않은 문구의 단순한 나열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당한 일은 누가 보더라도 억울한 일이었고, 실체도 효용도 없는 시 따위와 그것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술가는 번성하되 예술은 죽었음을 증명하는 (가상의) 사례들이다. 사실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으랴. 하물며 성역도 불멸이기라도 하겠는가. 대부분의 예술인이 쥐뿔도 없는 예술적 인정보단 금전적 성공과 예술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우리 시대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옳고 그름과 그것을 휘두를 정치적 팩트 권력만이 중요한 사회, 심지어는 예술인들조차도 이를 무기로 삼는 사회. 이것이 예술-스노브의 우월감이 아니냐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 (사실 영화도 잘 모르고 음악도 잘 모르고 책은 간신히 조금 뒤적대는 내가 스노브일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는 우월감이 아니라 열등감이다. 우월감은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볼 때 생기는 것이다. 귀신을 보는 사람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본다고 이유로 우월감을 가지기보단 열등감에 시달릴 확률이 높은 것과 비슷하다. 때로 아Q의 예를 들며 너만의 세계에 사는 것으로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하지만, 잘 읽어보면 아Q의 근원은 깊은 패배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삶을 소유한, 안주할 곳이 있는 우등한 종자에게 예술은 사치이자 힐링이고 행복이다. 하지만 열등한 자에게 예술이란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탈출구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니체와 나의 스승은 수준 높은 것을 보고 살라고(단순히 그 분야 전문적인 수준높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르쳤다. 하지만 수준은 수준 낮은 것을 깔아뭉개야 성립할 수 있는 바, 수준이 상실된 시대에 수준을 논하는 것이 때로 적대감까지 부르는 마당에, 당신들 우등한 종자들이 열등한 이에게서 도대체 어디까지 더 뺏어가야 만족할지 가늠하면 너무나 참담하다. * 토비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9-01-26 22:42) * 관리사유 : 저격과 공격적 표현이 포함되어있다고 판단하여 삭제처리합니다. * 토비님에 의해서 삭제글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9-01-27 01:54) * 관리사유 : 제재조치 번복으로 티타임 게시판으로 이동합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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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열등한 자에게 예술이란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탈출구인 것이다.
맞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술인 소설은 패자의 증언이기 마련인 거고요. 승자는 굳이 소설이란 형태로 주절주절 떠벌일 필요가 없지요.
맞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술인 소설은 패자의 증언이기 마련인 거고요. 승자는 굳이 소설이란 형태로 주절주절 떠벌일 필요가 없지요.
저는 이런 입장을 접하면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이 떠오릅니다. 본 글에서 말해지는 예술의 죽음이란, 특히 기 드보르에 의해 예언된 바 있는 현상의 일단이라 보는데요, 기 드보르의 진단/예언을 높이 치는 한 사람이 자연도태님도 인용한 바 있는 조르조 아감벤이죠.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저 책은 아감벤에 대한 반대의견이라 할 만하다 생각합니다.
결국 애착 대상의 상실을 한탄하고 세계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나 사랑해야 할 것을 발견하는 역량이 관건이라는 것... 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더 보기
결국 애착 대상의 상실을 한탄하고 세계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나 사랑해야 할 것을 발견하는 역량이 관건이라는 것... 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더 보기
저는 이런 입장을 접하면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이 떠오릅니다. 본 글에서 말해지는 예술의 죽음이란, 특히 기 드보르에 의해 예언된 바 있는 현상의 일단이라 보는데요, 기 드보르의 진단/예언을 높이 치는 한 사람이 자연도태님도 인용한 바 있는 조르조 아감벤이죠.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저 책은 아감벤에 대한 반대의견이라 할 만하다 생각합니다.
결국 애착 대상의 상실을 한탄하고 세계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나 사랑해야 할 것을 발견하는 역량이 관건이라는 것... 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스펙타클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조명을 둘러싼 투쟁이 내 것이 아니라 여겨진다면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
예술이 죽었는지 매체가 시효를 다한 것인지 따져 봐야 한다고 봅니다. 예술이든 정치이든 혹은 (바디우적으로 말해서) 사랑이든 사건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을 원한다면 사건에 충실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수밖에요. 예술의 죽음이라는 선언에 집착하는 것은 예술 자체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예술이 한때 가졌던 광휘에 대한 애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조남주 작가 본인 『82년생 김지영』을 자신의 예술가적 성취의 선봉에 놓일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 인터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가 무대 위 투쟁도 중요하다 여겼으므로 무대 위 투쟁에 뛰어드는 걸 쓴 것으로 봅니다. 원하는 게 표현 영역의 탐구나 개척이 아닌 거죠. 산이도 아니고요. 차라리 박진성 씨가 흥미롭다 여깁니다. 제 감성은 극혐이라 말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일어나는 새로운 종족 분화 속 한 종족적 예술의 탄생일지도 모를 일이죠.
결국 애착 대상의 상실을 한탄하고 세계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나 사랑해야 할 것을 발견하는 역량이 관건이라는 것... 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스펙타클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조명을 둘러싼 투쟁이 내 것이 아니라 여겨진다면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
예술이 죽었는지 매체가 시효를 다한 것인지 따져 봐야 한다고 봅니다. 예술이든 정치이든 혹은 (바디우적으로 말해서) 사랑이든 사건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을 원한다면 사건에 충실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수밖에요. 예술의 죽음이라는 선언에 집착하는 것은 예술 자체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예술이 한때 가졌던 광휘에 대한 애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조남주 작가 본인 『82년생 김지영』을 자신의 예술가적 성취의 선봉에 놓일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 인터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가 무대 위 투쟁도 중요하다 여겼으므로 무대 위 투쟁에 뛰어드는 걸 쓴 것으로 봅니다. 원하는 게 표현 영역의 탐구나 개척이 아닌 거죠. 산이도 아니고요. 차라리 박진성 씨가 흥미롭다 여깁니다. 제 감성은 극혐이라 말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일어나는 새로운 종족 분화 속 한 종족적 예술의 탄생일지도 모를 일이죠.
사람들의 열광은 박진성에 대한게 아니죠. 손석희의 몰락에 대한 겁니다. 이런들 저런들 손석희는 분명 '영웅'이었고, 영웅의 몰락은 언제나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이고 즐거움 아니었습니까?
아무도 '박진성의 시'에 열광하지 않았습니다. '손석희의 상황'에 취한거죠.
예술이 죽었습니까? 예술은 여기서 주역으로 나선 적이 없는것 같은데요. 예술을 빼앗겼습니까? 대중은 시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지만, 시집이란 물건은 얼마나 팔립니까?
시는 빼앗기지 않았어요..그보다 더 비참하죠. 시인은 시를 ... 더 보기
아무도 '박진성의 시'에 열광하지 않았습니다. '손석희의 상황'에 취한거죠.
예술이 죽었습니까? 예술은 여기서 주역으로 나선 적이 없는것 같은데요. 예술을 빼앗겼습니까? 대중은 시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지만, 시집이란 물건은 얼마나 팔립니까?
시는 빼앗기지 않았어요..그보다 더 비참하죠. 시인은 시를 ... 더 보기
사람들의 열광은 박진성에 대한게 아니죠. 손석희의 몰락에 대한 겁니다. 이런들 저런들 손석희는 분명 '영웅'이었고, 영웅의 몰락은 언제나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이고 즐거움 아니었습니까?
아무도 '박진성의 시'에 열광하지 않았습니다. '손석희의 상황'에 취한거죠.
예술이 죽었습니까? 예술은 여기서 주역으로 나선 적이 없는것 같은데요. 예술을 빼앗겼습니까? 대중은 시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지만, 시집이란 물건은 얼마나 팔립니까?
시는 빼앗기지 않았어요..그보다 더 비참하죠. 시인은 시를 전력으로 써야하는데, 목적이지 수단이어선 안되는데, 나는 시를 예술을 중히 생각하는데ㅡ 세상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빼앗을 생각도 없습니다.
예술에 취향에 수준차이는 있죠. 근데 그거 덕후만 신경쓰는거에요. 카우보이 비밥이나 무사시건도나 같은 만화영화아냐? 매직더게더링? 그거 유희왕짝퉁이지? 하면 저도 화가 날겁니다.
박무직의 TOON에 우리는 왜 만화를 그리는가? 심심해서. 라는 이야기가 있죠. 우린 다들 심심한겁니다. 생존이 보장되고 시간은 남고 뇌용량도 남으니까요.
아무도 '박진성의 시'에 열광하지 않았습니다. '손석희의 상황'에 취한거죠.
예술이 죽었습니까? 예술은 여기서 주역으로 나선 적이 없는것 같은데요. 예술을 빼앗겼습니까? 대중은 시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지만, 시집이란 물건은 얼마나 팔립니까?
시는 빼앗기지 않았어요..그보다 더 비참하죠. 시인은 시를 전력으로 써야하는데, 목적이지 수단이어선 안되는데, 나는 시를 예술을 중히 생각하는데ㅡ 세상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빼앗을 생각도 없습니다.
예술에 취향에 수준차이는 있죠. 근데 그거 덕후만 신경쓰는거에요. 카우보이 비밥이나 무사시건도나 같은 만화영화아냐? 매직더게더링? 그거 유희왕짝퉁이지? 하면 저도 화가 날겁니다.
박무직의 TOON에 우리는 왜 만화를 그리는가? 심심해서. 라는 이야기가 있죠. 우린 다들 심심한겁니다. 생존이 보장되고 시간은 남고 뇌용량도 남으니까요.
음, 이걸 '슬프다'거나 '비참하다'고 말하시며 제로스님 자신도 '상황에 취한' 셈이 된 거 같네요. 슬플 것도 비참할 것도 없죠. 왜냐면 슬퍼할 사람도 비참할 사람도 없으니까요.
제가 그제 뉴스게시판의 논쟁을 보면서 느꼈던 건 '시의 문학적 순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그들에 맞서 '시의 사회적 의의'를 강변하는 사람도 정작 시와 문학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 논쟁은 학부 신입생 교양 시간에나 나올만한 정도에서 맴돌았고 여러 철학자와 문학가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도 별 의미값은 부여받지 못했죠... 더 보기
제가 그제 뉴스게시판의 논쟁을 보면서 느꼈던 건 '시의 문학적 순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그들에 맞서 '시의 사회적 의의'를 강변하는 사람도 정작 시와 문학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 논쟁은 학부 신입생 교양 시간에나 나올만한 정도에서 맴돌았고 여러 철학자와 문학가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도 별 의미값은 부여받지 못했죠... 더 보기
음, 이걸 '슬프다'거나 '비참하다'고 말하시며 제로스님 자신도 '상황에 취한' 셈이 된 거 같네요. 슬플 것도 비참할 것도 없죠. 왜냐면 슬퍼할 사람도 비참할 사람도 없으니까요.
제가 그제 뉴스게시판의 논쟁을 보면서 느꼈던 건 '시의 문학적 순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그들에 맞서 '시의 사회적 의의'를 강변하는 사람도 정작 시와 문학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 논쟁은 학부 신입생 교양 시간에나 나올만한 정도에서 맴돌았고 여러 철학자와 문학가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도 별 의미값은 부여받지 못했죠. 시와 문학보다는 무고의 피해자나 페미니즘이나 언론인 손석희가 차라리 더 사건에 어울렸을 소재니까요.
상황에 취한 건 시인 박진성을 무고의 피해자만으로 취급하는 '세상'만이 아닐 거에요. 박진성을 어떻게든 시인으로 규정하고 시가 가져야할 합목적성을 부여하는 식으로라도 박진성이 지리멸렬하다는 말을 굳이 끼워넣고 싶은 사람들도 아주 절절히 상황에 취해 있는 거죠.
시인 박진성의 시를 시로만 읽지 않는 세상이 전에 없이 가혹하다거나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듯, 피해자 박진성의 편지를 못 쓴 시로 읽는 누군가도 유별나게 순진하다거나 세상을 모르는 얼치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 며칠간, 아니 근년간 윤리의 죽음에 분개하고 예술의 사망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김지영을 읽고 예술의 사망을 슬퍼하던 이들은 오늘의 박진성을 보며 윤리가 죽었다고 분개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누구도 '순수'한 사람은 없어요. 특별히 비참한 사람도 없죠. 훼손된 적이 없거나 언제나 훼손되어왔던 시와 윤리의 신성을 각자의 편의에 따라 붙잡는 마음만 있을 뿐이죠. 어떻게든 비극을 만들어 그 압도적인 불쌍함에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고픈 욕망이 있을 뿐이죠.
제가 그제 뉴스게시판의 논쟁을 보면서 느꼈던 건 '시의 문학적 순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그들에 맞서 '시의 사회적 의의'를 강변하는 사람도 정작 시와 문학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 논쟁은 학부 신입생 교양 시간에나 나올만한 정도에서 맴돌았고 여러 철학자와 문학가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도 별 의미값은 부여받지 못했죠. 시와 문학보다는 무고의 피해자나 페미니즘이나 언론인 손석희가 차라리 더 사건에 어울렸을 소재니까요.
상황에 취한 건 시인 박진성을 무고의 피해자만으로 취급하는 '세상'만이 아닐 거에요. 박진성을 어떻게든 시인으로 규정하고 시가 가져야할 합목적성을 부여하는 식으로라도 박진성이 지리멸렬하다는 말을 굳이 끼워넣고 싶은 사람들도 아주 절절히 상황에 취해 있는 거죠.
시인 박진성의 시를 시로만 읽지 않는 세상이 전에 없이 가혹하다거나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듯, 피해자 박진성의 편지를 못 쓴 시로 읽는 누군가도 유별나게 순진하다거나 세상을 모르는 얼치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 며칠간, 아니 근년간 윤리의 죽음에 분개하고 예술의 사망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김지영을 읽고 예술의 사망을 슬퍼하던 이들은 오늘의 박진성을 보며 윤리가 죽었다고 분개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누구도 '순수'한 사람은 없어요. 특별히 비참한 사람도 없죠. 훼손된 적이 없거나 언제나 훼손되어왔던 시와 윤리의 신성을 각자의 편의에 따라 붙잡는 마음만 있을 뿐이죠. 어떻게든 비극을 만들어 그 압도적인 불쌍함에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고픈 욕망이 있을 뿐이죠.
음..저는 자연도태님이 '명분을 뒤집어썼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예술오타쿠라서 오버해서 화를 냈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날의 모든대화가 그렇지는 않더라도요.
이 정도의 예에서 보는 정도로 예술의 죽음이 선언될 정도라면 예술이 사라진지 지금은 수천년은 되었을듯 한데요. 가깝게는 블랙리스트로 예술은 사망했거나, 6-70년대 예술은 죽어서 지금은 화석도 남아있지 않을듯 해요.
사회적 의미로 변호도 가능하겠죠.
두 작품(?)의 차이는 82년생은 찬양을 받았지만 박진성 손석희 시는 손석희 조롱의 도구였을 뿐이지 딱히 처음부터 그 시를 명작이라 추켜세워준 사람도 없단거에요. 허수아비치기인셈이죠.
빠가 까를 만든다는데 김지영 빠는 강력하게 실존했지만 손석희에게 빠는 허상이라는거죠. 박진성 시를 대통령이 소개하고 연예인들이 인증하고 대학도서관마다 비치되어야 비벼볼거 아닙니까?
'손석희에게'는 kyoeic테스트 유머글급밖에 못되요.
두 작품(?)의 차이는 82년생은 찬양을 받았지만 박진성 손석희 시는 손석희 조롱의 도구였을 뿐이지 딱히 처음부터 그 시를 명작이라 추켜세워준 사람도 없단거에요. 허수아비치기인셈이죠.
빠가 까를 만든다는데 김지영 빠는 강력하게 실존했지만 손석희에게 빠는 허상이라는거죠. 박진성 시를 대통령이 소개하고 연예인들이 인증하고 대학도서관마다 비치되어야 비벼볼거 아닙니까?
'손석희에게'는 kyoeic테스트 유머글급밖에 못되요.
박진성이 시인이고 피해자인 것처럼 박진성이 올린 트위터도 양가적인 성격을 가져요. 아니, 말을 잘못했네요. 서로가 다른 성격을 갖는 건 박진성의 쪽글이 아니라 그걸 읽는 사람들이죠. 거기서 피해자의 독백을 읽을수도 있고 시를 읽을수도 있죠. 그건 사람마다 다를 거에요. 제가 이 사태에서 가장 동정할 수 없는 건 피해자의 감수성을 운운하며 문학 같은 냉정한 잣대는 떼어놓아야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이들이고, 반대로 문학의 순수성을 강변하며 저기서 시만 읽어내야만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이에요. 두 주장 모두 이상할 건 없지만 그 둘이 서로를 이상하다고 싸우는 건 이상해요. 여기서 이상하다는 건 맥락에 비추어 이렇게 상황이 흐르는 게 자연스럽지 않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주장에 그들이 그렇게 강변할만한 이유가 담길 수 없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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