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8/10 15:05:19
Name   DrCuddy
Subject   동일범죄 동일처벌과 워마드 운영자 체포영장에 대해
사실 지금와서 자랑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초중학교까지 매년 학교에서 반장 혹은 회장을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학급의 반장이라고 하면 어렴풋하게나마 느끼는 권력이 있지요. 대표적으로 선생님이 교실에 안계실때 떠든사람 이름적기. 떠든 친구 이름 적었다고 선생님이 돌아오고 확인해도 큰 일이 벌어지는건 아닙니다. 칠판에 적더라도 대부분의 경우는 선생님이 보고 그냥 슥 지우고 넘어가는 정도이죠. 하지만 문제는 떠들었다고 이름 적힌 친구는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고 당장 이름적는 사람과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지요. 이름적힌 친구의 불만은 [나 말고 쟤도 떠들었는데 쟤는 왜 안적냐]입니다. 물론 여기서 쟤는 같이 이야기를 한 상대방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다른 떠듦의 분류겠지요. 하지만 어쩌나요. 전 그 친구가 떠드는걸 못봤거든요. 정말로요. 떠들었다는 다른 친구가 딱히 더 친해서 안적었다거나 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떠들었다고 이름 적은 친구를 보면서 그 친구가 가리키는 다른 친구도 떠들었다는걸 어렴풋이라도 느꼈다는 형평성에 맞춰 그 친구 이름도 같이 적어주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쩔 수 없습니다. 마치 형사소송법에서 [전문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것 처럼요. 내가 직접 본게 아니니 그 친구 말만 믿고 무작정 다른 친구 이름을 떠들었다고 적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과정은 중학교가 되면 특히 청소시간에 심해집니다. 다들 정해진 청소구역이 있는데 뭐 몇몇 친구들은 청소 안하고 놀러가는거죠. 매점을 가거나. 그럼 청소시간에 청소하라고 지적하면 또 듣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만 그런거 아닌데? 다른 얘들도 청소 안하고 놀았는데? 왜 걔네들은 뭐라 안함?] 이제 중학교 정도 되고 머리도 굵어지니 어느정도 논리에 맞는 말을 해줘야 반장의 권위가 살아나는데 제대로 대답해 줄 말이 안떠오르더라구요. 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왜 모든 범법행위를 단속할 수 없을까? 그리고 단속받은 사람이 같은 행동으로 형평성을 주장하며 불만을 표시하면 뭐라고 답해줘야 하나?]
이 문제는 제가 20대 중반이 되고 학부를 졸업할 때 즈음 되니 어느정도 스스로 납득할만한 답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일례로 무단횡단에 대한 경찰행정을 들어보면 우선 모든 무단횡단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모든 횡단보도마다 인원을 배치해야 하며 그러한 행정작용은 많은 비용을 발생시키지만 실제 무단횡단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나 다른 범법행위의 비교평가를 통해 무단횡단에 그러한 경찰행정력을 많이 투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한정된 국가의 행정력을 고려할 때 바람직 하지 않은 모습이라는 겁니다.
즉, [동일범죄에 동일처벌은 한정된 행정력을 고려할 때 이뤄질 수 없으며 범죄 양태의 비교판단, 사회적 영향에 따라 부분적, 선별적 수사 및 고소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안계실때 떠든사람 이름적는다던가, 청소시간에 농땡이 치는 친구를 지적하는게 학교와 교육의 핵심가치라면 더 많은 반장(?)이나 권력구조를 만들어서 강화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럴 필요성이나 효과에 비춰볼 때 한명이 적절히 계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동일범죄 동일처벌을 주장하는 친구들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그 친구들을 보면 마치 제 학생운동으로 매일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반대,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집회를 나가던 저의 대학생 때를 보는 것 같아 왠지 막 안쓰러워지고 그렇습니다. 저도 그때는 너무 화가 났거든요. 왜 다들 동의하지 않는거지? 같이 집회를 한다면 다 바꿀 수 있고 세상도 막 바뀌고 그럴거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솔직히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냥 무던히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좀 미워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그 친구들도 같은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저도 나이가 드니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빠르게 변하지 않습니다. 분노와 혐오로 순간적인 화력은 낼 수 있겠지만 결국 사회를 바꿔나가는건 이성에 의한 설득, 집회에서 이어진 관심이 당위를 얻고 지지를 얻어야 결국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집회와 투쟁이 싸움의 시발점이 되고 끝까지 이어가는 역할은 할 수 있어도 그것도 끊임없이 왜 집회는 하는가,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해 나갈것인가를 생각할 때 이뤄집니다. 지금 자신들을 혁명의 최전방에 선 선봉전사들이라고 생각할 친구들, 워마드 운영자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라는 부당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순교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리니 과연 그들이 제 나이가 되면, 여성운동, 페미니즘 운동이 성공하여 세상이 마냥 공평하진 않지만 그래도 세상을 바꾸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다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지, 언론과 여론을 통해 만들어진 공포심으로 일어난 분노, 혐오로 빵빵해진 풍선이 결국 스스로 튀어나가 정처없어 떠돌지, 궁금해집니다. 물론 결말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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