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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6/21 01:45:36 |
Name | 아침 |
File #1 | 오늘너무슬픔_앞표지.png (151.8 KB), Download : 12 |
Subject | 오늘 너무 슬픔 |
이 책을 읽는 과정은 괜찮은 집단상담의 진행과정과 비슷했다. 집단상담에서 낯선 사람들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기분은 항상 비슷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벙개와는 조금 다르다. 벙개에는 즐거운 기대감이 있다. 초면이지만 구면이고 공유할 거리와 공유의 범위도 비교적 선명하게 정해져있다. 홍차넷 안의 다양성이란 추파춥스의 다양성과 비슷해서 무설탕 체리맛과 블루베리 요거트 맛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 추파춥스' 맛이 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집단상담도 어떤 면에서는 추파춥스 한 상자와 같은데 차이가 있다면 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어떤 맛 사탕인지를 알려주는 포장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저 빨간 사탕이 사과맛인지 딸기맛인지는 직접 맛을 보고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최소한의 사전정보나 친밀감 없이 처음 맛보는 타인은 대체로 떨떠름하다. 이 책의 저자 멀리사 브로더의 이야기가 처음에 그랬다. 28페이지까지는 약간의 떨떠름함이 있었다. 이 책은 멀리사 브로더가 트위터에 올린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시 에세이를 쓴 것이고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섹스중독, 약물중독, 온갖 것에 중독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 책은 정말 집단상담과 비슷한 면이 있다. 집단상담의 첫 모임에서 자신을 '섹스중독에 마약중독 맛'이라고 소개하는 집단원을 보면서 앞으로의 전개에 상쾌한 기대감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섹스 중독은 로설도 아니고 야설도 아니다. 섹스중독자 본인은 로설과 야설의 판타지를 둘 다 충만히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섹스중독의 현실은 부질없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흥미가 돋기 시작한 건 브로더가 적나라하게 자신의 성생활을 까발릴 때가 아니라 그 이상의 적나라함으로 자신의 내면을 까발릴 때였다. 가령 이런 부분. '나는 아무래도 먹보면서 최악의 페미니스트인 것 같다. 다른 여자들을 대상화하니까. 나는 내 몸을 다른 여자들 몸과 비교한다. 가끔은 내가 이긴다. 이긴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 여자보다는 내 몸이 내가 자라면서 본 잡지 속 모델들의 몸과 더 닮았단다는 뜻이다. 즉 내가 그 여자보다 더 날씬하다는 거다' 아, 그래.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쁜 몸을 가지는 게 기분이 훨씬 더 좋았다. 에쁜 몸을 가지지 못했다고 나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쁜 몸 무엇인지에 대한 고전적이고도 명확한 기준이 있고 그건 분명히 승부와 우열이 있는 게임이라고 느껴버린다는 점에서 은근한 죄책감을 가졌는데 하도 은근해서 난 이 글을 읽을 때까지는 그런 죄책감을 잘 의식하지도 못했다. 브로더의 신실한 신앙도 마음에 들었다. '그 때 나는 가뜩이나 신에게 화가 나 있던 참이었으므로 이런 심정이 되었다. " 야, 신, 꺼져버려, 나도 너 안 믿을래, 엿 같은 새끼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여전히 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재수 없는 남친을 대하듯 말하고 있었다.' 알고보니 우리는 엿 같은 신 신앙공동체 속에서 형제자매였다. 집단상담에서도 낯선 타인이 한결 가깝게 느껴지는 때가 이런 순간이다. 그 기분 나도 알지. 나도 그랬어, 낄낄, 나도 그랬어, 흑흑. 이런 작은 공감의 순간 말이다. 근데 브로더나 나나 ' 이 작은 공감의 순간' 같은 감성문구가 내뿜는 간질간질한 느낌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중독이란 중독은 다 빠져 사는 브로더가 애정중독에 빠지지 않을 리 없고 썸남의 트위터, 페이스북, 텀블러를 순례하면서 하루 종일 그냥 관찰만 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는 짓을 하지 않을 리 없다. 이런 짓을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시도 중의 하나가 만트라 외우기였는데 긍정적인 격려의 내용이 담긴 만트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고백이 썩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소중'하고 '온전'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자기암시를 걸다보면 비참한 루저같은 기분이 드는데 괴이하고 몽환적인 문구는 우주 카우보이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나. 그렇다고 자신을 소중하고 온전하게 느끼는 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런 태도를 경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브로더와 나는 왜 센 척을 할까.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세상풍파에 익숙한 척, 그쯤은 능숙하게 처리할 줄 아는 척, 외로움과 두려움을 객관화하고 희화화하는 여유까지 갖춘 척하는 이유를 브로더는 두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불안을 넘어 여러분을 웃겨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나는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가면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렵기 때문이라고. 집단상담의 어느 시점에 가면 사람들은 멀쩡한 척 하는 가면을 내려놓는다. 문제 없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가벼운 문제 한둘 쯤은 가지고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심각한 문제를 안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문제가 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를 압도해버릴, 혹은 이미 압도해버린 문제들 말이다. 책의 어느 시점에서 나는 마약중독, 섹스중독, 강박증 환자의 이야기에 완전히 관심이 없어졌다. 나는 멀리사 브로더가 수치심에 떨고 불안에 떨면서 사는 이야기를 듣는다. 실망스렁 연애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이야기, 기분이 좀 그럴 때 진탕 마시며 기분전환 하는 이야기, 평화를 사랑하는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지만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괴로운 이야기, 인터넷을 끊어야 할 때 인터넷을 끊는 대신 인터넷을 끊어야한다고 sns에 올리는 이야기...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탐라에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오는 이야기. 어떤 직장인이 밥 먹었더라, 대학생들 기말고사 기간이더라는 얘기는 아무 자극을 주지 못하지만 그 직장인이 커뮤니티 모 횐님이고 시험치는 대학생이 홍차넷의 딸들이라면 이야기는 갑자기 흥미진진해진다. 멀리사 브로더의 이야기가 그랬다. 아, 걘 정말 빵빵 터지는 면과 가련한 구석이 있어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멘탈이 쿠크다스인 재능러인 주제에 은근히 생활력도 강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 것 같다. 내가 영어만 좀 잘 하면 지난 벙개에 얘도 초대했을텐데. 한 번쯤 오프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아니, 아무래도 얘가 홍차넷에 가입하는 게 더 낫겠다. 우리도 글로벌하게 영어 탐라를 생활화하는 거지. 오늘은 우리 브로더 횐님 뭐하시나 방금 트위터에 검색해봤더니 5월 6일에 새 책이 나왔는데 11시간 전에는 죽는 게 무서운 마음과 사는 게 무서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며 징징거리고 있다. 죽는 것도 무섭고 사는 것도 무섭다는 애가 그저께는 french kiss와 goth kiss의 차이에 대해 리트윗해놓았다. 근데 아이쿠, 징징글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트윗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래, 이런 점도 집단상담과 비슷하다. 집단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깊은 공감을 나누고 순간적으로 친밀감을 느끼지만 일상에서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에게는 공유되는 슬픔도 있지만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도 있으니까. 집단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베프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집단상담의 초기에 만났던 낯선 타인과 종결시점에서 빠이빠이 인사를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동일인물이 아니다. 이 책의 표지를 열 때 내가 만났던 사람은 섹스팅에 미친 알콜중독, 약물중독자였다. 표지를 닫으며 나는 유머가 넘치면서 징징도 넘치는 멀리사 브로더와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녀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나는 탐라에서 일면식도 없는 횐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짧은 응원을 보낸다. 짧지만 좋은 만남이었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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