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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6/12 18:43:26
Name   quip
Subject   빛바랜 좋은 날들, 사라져가는 멜로디.
그때는 이렇게까지 붐비지 않았는데, 하고 동생은 말했다.

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처럼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응. 이십대 시절에 교토에 왔을 때는, 붐비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금각사는 날씨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바탕 일을 해치우고 담배 한 대를 빤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 살자, 고 나는 생각했다>는 금각사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물론 나는 한바탕 일을 해치우지도 않았고, 경내는 금연이었지만. 살자, 고 나는 생각하려 노력했다.

교토, 가족 여행이었다. 교토는 <가족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수많은 지난함을 어느 정도 물리쳐주는 아름다운 동네였다. 금각사에 오기 전에는 두어 시간을 기다려 장어 덮밥을 먹었다. 뭘 먹기 위해 두 시간이나 기다린 것도 처음이고,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에 가 본 것도 처음이었다. 교토는 어디든 붐볐다. 비가 오는 평일임에도 그러했다. 붐빈다는 건 교토가 가진 수 많은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물리쳐내는 개념이었다. 옛날에 왔으면 더 좋았겠군, 하고 생각했다. 유명하고 또 유명해져서 아마 내년쯤에는 빌보드 차트 1위를 찍지 않을까 싶은 관광지란 그런 곳이다.

가족 여행을 끝내고 도쿄에 왔다. 가와사키에서 한바탕 일을 해치우고, 잘 곳을 정할 시간이었다. 요코하마로 갈까, 도쿄로 갈까. 어차피 내일부터 도쿄에 있을 거니까, 오늘은 요코하마로 결정했다. 열두 시가 다 되어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비가 미친듯 오고 있었고, 나는 체력과 정신 모두가 사라진 상태로 호텔에 짐을 던져두고 동네 바를 찾았다. 요코하마에 대해 아는 건 두 개 뿐이에요. 꽤 옛날 노래 '부루라이토 요코하마'하고, 칵테일 '요코하마'. 라는 내 말에 옆에 앉아있던, 따로따로 온 두 명의 아저씨는 엄청난 반가움을 표했다. 뭐, 브루라이토 요코하마를 안다고? 요즘 일본 젊은이들도 별로 관심 없을 노랜대. 둘은 요코하마 음악과 요코하마라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요코하마 음악사를 읊으며(타워레코드가 처음 생긴 세 곳 중 하나가 요코하마였다거나, 요코하마 블루스의 역사라거나 하는 것들) 각각 술을 한 잔씩 사주었는데, 살아오며 대략 서른에서 쉰 곳 정도의 일본 바에서 마셔보는 동안, 바텐더가 아닌 옆자리 손님에게 공짜 술을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뭔가 술을 받은 보답으로 나도 요코하마에 대한 사랑을 어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방금 요코하마에 도착했고, 요코하마에 대해 아는 거라곤 저 둘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대체 요코하마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그날 구글 맵을 뒤적거리다 알게 되었다. 가나가와의 요코하마. 아 가나가와. 요코스카가 여기서 가깝죠? 요코스카 출신 아티스트 좋아했어요. 히데.

히데? 엑스와 요코스카 사벨 타이거즈의 히데? 히데 좋지. 뭐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한 아저씨가 말했다. 옛날에는 히데 박물관도 있었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나도 알아요. 가고 싶었는데, 결국 못 가봤네. 뭐 그렇게 술을 마셨다. 자리를 파할 때 쯤, 한 아저씨가 카톡을 물어왔다. 업무차 한국에 가끔 가곤 하는데, 술 마실 데나 좀 알려달라면서. 우리는 그렇게 카톡 친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히데였고, 그의 프로필 사진은 기타를 메고 있는 젊은 시절의 본인 사진이었다. 나는 그렇게 히데라는 이름을 쓰는 전직 기타리스트를 두 명 알게 되었다.

도쿄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꽤 오래 전 그들이 서울에 사는 동안 우리는 술친구였고, 몇 년 후 그들은 도쿄에 정착했다. 3년 전에도 도쿄에서 만나 신주쿠 골든 가이에서 한바탕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이번에도 신주쿠였다. 대충 맥주를 마시고, 이제 어디로 갈꺼야. 또 골든 가이냐? 는 내 질문에 그들은 굉장히 안 좋은 표정을 지었다. 골든 가이, 망했어. 백인 관광객들이 다 망쳐놨지. 백인 대표로 사과할께. 그리고 우리는 신주쿠의 그저 그런 떠들석한 바에서 서울에서 마시던 것처럼 죽어라 마셨다. 그들은 서울에 살 때의 다른 술친구들에 대해 물었다. 그때 결혼 준비하느라 스트레스가 상당해 보였던 그 친구는 잘 살고 있어? 응.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직업을 살짝 바꿨지. 비슷한데 좀 더 좋은 걸로. 그때 맨날 술처먹고 난동부리던 걔는 뭐하냐? 놀랍게도, 좋은 신문사에 취직해서, 훌륭한 업무 수행을 하고 있지. 등등. 등등. 그 친구는 뭐해? 음. 누군지 모르겠다. 사라졌어.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뭐.

다음 날 홀로 골덴 가이에 갔다. 거리의 입구에서부터 술 취한 백인들이 무리지어 쏘오오 쌜리캔 웨잇 하며 떼창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 어느 가게건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다. 가까스로 찾은, 관광객이 없는 서너 군데에 들러 술을 마셨다. 바맨들은 모두 영어에 능숙했다. 현지인들은 모두 관광객에 지쳐보였다. 어제 친구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백인 관광객들이 다 망쳐놨지. 거리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사람들을 피곤하고 짜증나게 만들고. 그래서 이제 거기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아. 그나마 남아 있는 현지인들도 사람들에게 지쳐있고.' 그러니까, 만화 심야식당의 배경이 되었던, 아주 작은 바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물론 그때도 다른 방식으로 시끄러웠고 관광객도 많이 보였지만, 그런 골덴 가이는 이제 없다. 모든 바의 입구에는 영어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골덴 가이의 어느 술집에서 옆자리 누나와 떠들며 술을 마셨다. 그분은 오래 전에 제주도에 놀러갔었다고 하며, 그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날씨가 좋고, 한적한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사진 속의 그녀는 지금의 나보다 어려보였다. 그렇군요. 오래 전이죠? 지금 제주도는, 시끄럽고 붐비고 비싸요. 관광지로 엄청나게 개발되고, 투기가 이루어지고, 중국인들도 많이 오고 해서. 한국에 이런 농담도 있다니까. '제주도에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후쿠오카에 갔습니다.' 제주도. 제주도라. 나도 몇 년 전에 처음 가봤다. 대충 제주도 붐 초기, 라고 해야 하려나. 거기에 비수기가 겹쳐서 다행히 아주 시끄럽지는 않았다.

자연 경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기는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찾아가서 볼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무래도 도시의 경관이 좋다. 최근 몇 년 동안 세계의 아름다운 섬 몇 개가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관광객의 증가로 환경이 망가졌다, 고 한다. 슬픈 일이다. 물론 섬이 폐쇄되지 않았더라 할 지라도, 내가 거기에 갈 확률은 별로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뭐, 상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래도 도시의 경관이 좋으니까. 바 테이블에 그려지는, 도시의 사람들이 이루는 그런 경관.

친구들 중에 워너원의 극성 팬들이 몇 있다. 다들 정말로 극성이라 왜 이렇게 극성인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유통기한이 있는 그룹의 팬이란 건 그런 거야. 물론 모든 그룹은 사라지겠지만, 좀 다른 문제라고.

많은 곳들이 많은 것들이 마주쳤다면 좋았겠지만 마주치지 못했던 혹은 운이 닿아 잠시 마주쳤던 것들이 그렇게 사라져간다. 관광객 입장에서 관광객 때문에 관광지가 무너져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겠지만, 나는 나름 현지의 룰을 최대한 존중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테이블 차지에 대해 빡쳐서 형편없는 리뷰를 쓰지도 않고, 관광객을 받지 않으려는 가게에 인종차별적이라고 분개하지 않는다(물론 한국인, 을 받지 않는다면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될 것이지만). 물론 어떤 곳이 그대로 어떤 곳으로 존재해주길 바라는 건 정말로 오만한 타자적 사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고 정도는 조금 오만하고 타자적이어도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우리는 타자다. 물론 그래, 어차피 모든 건 사라진다. 대충 보낸 오늘 하루도 충만했던 며칠 전의 하루처럼 그냥 똑같이 사라져 없어질 것이다.

다음날 프랑스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옛날의, 전설과 상상 속의 골든 가이를 소개시켜줘서 정말로 고마워. 이제 그런 곳은 사라진 것 같지만. 프랑스인은 프랑스인답게 답했다. <슬픈 일이지만, 괜찮아. 관광객들도 조만간 다른 관광객들에게 지쳐서 거기 안 가겠지. 그러면 다시 옛 골든 가이가, 아니면 새로운 골든 가이가,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골든 가이가 새로 생길 테니까. 그때 또 가서 즐겁게 마시자고> 역시 대국의 기상이다.

귀국하여 밀린 뉴스들을 살펴보았다. 궁중족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머리인지 가슴인지, 어딘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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