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7/08/20 10:37:25 |
Name | 알료사 |
Subject | 갈림길과 막다른길 |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에서 요약발췌 하였습니다. . . 중국 작가 루쉰은 1923년 가을부터 1925년 봄까지 북경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의 소설사 수업을 듣던 학생 중의 하나가 쉬광핑이었다. 당시 쉬광핑은 군벌과 결탁해서 학교를 수구적으로 이끌어가던 총장에게 맞서 싸우던 학생들의 대표였다. 처음에 학생들은 열심히 싸웠으나 곧 학교 측의 회유로 분열되고 말았다. 쉬광핑은 당시 교육계의 타락과 졸업 후 안정된 지위에 연연해서 쉽게 타협하는 학생들의 처신에 울분을 토하며 평소 누구보다도 강직하다고 믿었던 루쉰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모호한 답변은 사양이라는 협박?과 함께..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기를 청하는 학생에게, 중국 사회의 불의에 대한 울분과 동료에 대한 낙담을 토로하는 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루쉰은 교육계에 대한 쉬광핑의 울분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이 건넬 말이 미래에 대한 거짓 위로, 즉 성직자가 고통받는 이들에게 건네는 '내세에서의 구원' 같은 것이 될까 염려한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신도 쓰디쓴 현실을 위로해줄 '설탕' 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백지 같은 답안지를 내는 수밖에 없겠다>고 고백한다. 그의 답변은 포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별수 없다'라는 답변을 한 뒤 루쉰은 <이제부터는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는 나만의 철학에 대해 말하려고 하니 참고하라>며 답장을 이어나간다. 설탕의 도움 없이 쓴맛을 쓴맛 그대로 느끼며 나아가는 루쉰의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부딪히게 될 난관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림길, 즉 기로에 서는 겁니다. 갈림길 앞에서 묵적(묵자) 선생은 슬피 울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면 울며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갈림길 입구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내가 갈 길을 정하여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자비로운 이를 만나면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역시 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랑이를 만나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나무가 없다면? 할수 없지요. 호랑이에게 통째로 삼켜진다 한들 어쩌겠어요. 하지만 나도 호랑이를 한번 깨물 수는 있을 겁니다. 두 번째 난관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완적(위나라 시인)은 통곡을 하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막다른 길 또한 갈림길에서와 마찬가지로 헤쳐 나가야지요.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길은 나는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운 좋게도 이제껏 그런 난관은 겪어보지 못했기도 하구요. 쉬광핑. 당신은 <무작정 앞서는 용사>일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참호 안에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도 하다가> 불시에 총성이 울리면 즉각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십시오. 세상에는 그런 참호전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나약한 태도가 아닙니다. 뭔가를 단번에 해결지으려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나약함에 가깝습니다. 먼 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초조해 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 . . 이 편지를 계기로 루쉰은 쉬광핑과 사귀고 동거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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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 생각나네요. 강연록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의 결말부입니다.
(전략)...정치는 확실히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만, 머리로만 하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념윤리가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윤리가로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윤리가로, 또 언제는 책임윤리가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지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지적할 수 있습니다. <비창조적> 흥분의 시대인 오늘날 - 여러분들은 비창조적이지 않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아무튼 ... 더 보기
(전략)...정치는 확실히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만, 머리로만 하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념윤리가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윤리가로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윤리가로, 또 언제는 책임윤리가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지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지적할 수 있습니다. <비창조적> 흥분의 시대인 오늘날 - 여러분들은 비창조적이지 않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아무튼 ... 더 보기
베버 생각나네요. 강연록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의 결말부입니다.
(전략)...정치는 확실히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만, 머리로만 하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념윤리가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윤리가로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윤리가로, 또 언제는 책임윤리가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지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지적할 수 있습니다. <비창조적> 흥분의 시대인 오늘날 - 여러분들은 비창조적이지 않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아무튼 흥분이 항상 진정한 열정인 것은 아닙니다 - 갑자기 곳곳에서 신념윤리가들이 아래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다수 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으며,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나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뽑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나는 우선 그들의 신념윤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내적인 힘이 어느 정도인지 묻습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이들 열 명 중 아홉은 스스로 주장하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낭만적 감흥에 도취하고 있을 뿐인 허풍선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인간적으로 나의 관심을 끌지 않으며 또 나를 추호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한 성숙한 인간이 - 나이가 많고 적고는 상관없습니다 -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정으로 그리고 온 마음으로 느끼며 책임윤리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떤 한 지점에 와서, "이것이 나의 신념이오. 나는 이 신념과 달리는 행동할 수는 없소."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비할 바 없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인간적으로 순수한 것이며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내적으로 죽어 있지 않는 자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이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10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 나 자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때는 이미 반동의 시대가 시작하였을 것이라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10년 후 그때, [여러분들 중의 많은 사람이, 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도, 바라고 희망했던 것들 중 과연 무엇이 성취되어 있을까요? 아마 '전혀 아무 것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거의 아무 것도 성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이것이 나를 완전히 좌절시키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안다는 것은 물론 내적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아무튼 10년 후 그때,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자신을 진정한 <신념정치가>라고 느끼며 이 혁명이라는 도취상태에 동참하고 있는 자들은 과연 무엇이 (이 말의 내적 의미에서) <되어> 있을까요? 나는 그것이 궁금합니다...(중략)
...여름의 만개가 아니라, 일단은 등골이 오싹한 어둠과 고난에 찬 극지의 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이 밤이 서서히 물러가고 난다면, 그때는 지금 겉보기에 그렇게도 풍성히 봄을 구가하고 있는 사람들 중 과연 누가 아직도 살아 있을까요? 세상과 직업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고 덤덤하게 감수하고 있을까요? 아니면(그리 드문 일도 아닙니다만) 그럴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신비주의적 현실도피에 빠져들거나 또는(흔히 있는 개탄스러운 현상이지만) 단지 유행에 따라 이런 신비주의자 행세를 억지로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모든 경우에 대해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위의 상황에 빠진 자들은 자기 자신의 행동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며,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감당해 낼 능력도 없었으며, 또 이 세상에서의 일상을 감당해 낼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람들간의 형제애를 도모하고 그저 자신의 일상적 임무에 열심히 몰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며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이면서 또한 - 매우 소박한 의미에서 - 영웅인 자만이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도 영웅도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희망과 좌절조차 견디어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아직 가능한 것마저도 달성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해 베버는 56세로 단명하고, 10여 년 뒤 나찌가 집권하죠.
(전략)...정치는 확실히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만, 머리로만 하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념윤리가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윤리가로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윤리가로, 또 언제는 책임윤리가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지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지적할 수 있습니다. <비창조적> 흥분의 시대인 오늘날 - 여러분들은 비창조적이지 않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아무튼 흥분이 항상 진정한 열정인 것은 아닙니다 - 갑자기 곳곳에서 신념윤리가들이 아래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다수 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으며,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나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뽑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나는 우선 그들의 신념윤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내적인 힘이 어느 정도인지 묻습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이들 열 명 중 아홉은 스스로 주장하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낭만적 감흥에 도취하고 있을 뿐인 허풍선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인간적으로 나의 관심을 끌지 않으며 또 나를 추호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한 성숙한 인간이 - 나이가 많고 적고는 상관없습니다 -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정으로 그리고 온 마음으로 느끼며 책임윤리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떤 한 지점에 와서, "이것이 나의 신념이오. 나는 이 신념과 달리는 행동할 수는 없소."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비할 바 없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인간적으로 순수한 것이며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내적으로 죽어 있지 않는 자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이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10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 나 자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때는 이미 반동의 시대가 시작하였을 것이라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10년 후 그때, [여러분들 중의 많은 사람이, 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도, 바라고 희망했던 것들 중 과연 무엇이 성취되어 있을까요? 아마 '전혀 아무 것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거의 아무 것도 성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이것이 나를 완전히 좌절시키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안다는 것은 물론 내적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아무튼 10년 후 그때,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자신을 진정한 <신념정치가>라고 느끼며 이 혁명이라는 도취상태에 동참하고 있는 자들은 과연 무엇이 (이 말의 내적 의미에서) <되어> 있을까요? 나는 그것이 궁금합니다...(중략)
...여름의 만개가 아니라, 일단은 등골이 오싹한 어둠과 고난에 찬 극지의 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이 밤이 서서히 물러가고 난다면, 그때는 지금 겉보기에 그렇게도 풍성히 봄을 구가하고 있는 사람들 중 과연 누가 아직도 살아 있을까요? 세상과 직업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고 덤덤하게 감수하고 있을까요? 아니면(그리 드문 일도 아닙니다만) 그럴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신비주의적 현실도피에 빠져들거나 또는(흔히 있는 개탄스러운 현상이지만) 단지 유행에 따라 이런 신비주의자 행세를 억지로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모든 경우에 대해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위의 상황에 빠진 자들은 자기 자신의 행동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며,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감당해 낼 능력도 없었으며, 또 이 세상에서의 일상을 감당해 낼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람들간의 형제애를 도모하고 그저 자신의 일상적 임무에 열심히 몰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며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이면서 또한 - 매우 소박한 의미에서 - 영웅인 자만이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도 영웅도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희망과 좌절조차 견디어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아직 가능한 것마저도 달성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해 베버는 56세로 단명하고, 10여 년 뒤 나찌가 집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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