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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4/14 23:12:38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짧각짧각 보다가 어제사 다 봤어요. 본대로 느낀대로 감상평. 직접인용 + 코멘트 형식으로 후기를 남겨볼께요.


...............................................


"대한민국은 이제 '난민촌'이 아닌데도, 많은 국민이 여전히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다."

유시민씨는 간혹 이렇게 주어진 현상에서 키워드를 정제精製해내는 재능이 있어요.

"대한민국의 변화를 추동한 힘은 대중의 욕망이었다."

맞아요.

"한글은 쉽게 익힐 수 있는 과학적인 문자다." + "수억의 중국 민중이 침묵하고 있었을 때 우리가 먼저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3.1 독립투쟁을 벌였다. 우리 민족처럼 격렬하고 끈질기게 외부 침략자에 대항한 민족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끙... 이건 '본서는 역사책이 아니라 대중서임'이라는 자백과 같아요. 책임있는 사가라면 저렇게 무책임한 말을 뱉어선 안돼요.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 지금 나는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이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유시민씨의 정치이력을 생각해봤을 때 그가 이정도의 고백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였어요.

"2013년 6월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쪽이 자주성이 결여되어서'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는다고 거듭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주'이념]은 지금까지도 북한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반면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어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독재의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 한복판에서 [주사파主思波가 탄생한 배경에는] 바로 이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이 놓여 있었다."

맞아요. 제 개인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90년대 중반~00년대 중반인데, 이 10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한국사회를 휩쓸었던 공격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이에요. 전 누군가가 이에 관한 연구서를 내주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마침 유시민씨가 비슷한 언급을 해줘서 기뻤어요. 다들 어렴풋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누가 박사논문 하나 내주겠다는 희망이 들어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들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로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사형수들은 '나는 깡패입니다'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플래카드를 들고 덕수궁에서 출발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해야 했다. 이것은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장면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한국 정치문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화풀이'라고 하고 싶어요. 그냥 사람들이 화가 좀 많고, 그거 풀 곳이 마땅치 않으니 눈에 잘 보이는 적당한 표적을 정해서 시원하게 풀어버리죠. 헌데 어렵게 찾은 표적을 나 혼자 쓰는 건 너무 저효율이에요. 그래서 그 표적을 크고 잘 보이게 만들어서 만인이 함께 화풀이용으로 쓸 수 있게 만들지요. 화풀이 행위의 증폭(amplification)과 집단성(collectivity)이 그 특징이라고 좀 있어보이는 말로 정리해볼 수 있어요.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문화적/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 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 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민주화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신동아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헤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동시다발적/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작년말 촛불시위가 한참 치성할 때 비폭력투쟁에 대한 논쟁이 잠깐 있었었지요. 본서는 2014년작인데 마치 미래라도 내다본 듯 시사점이 있네요.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김종필씨 이야기에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다들 아시지요? 김재규씨의 말이에요. 고작 40년 전인데 문어를 쓰는 뽐새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요. 요즘은 저렇게 조어(措語)로 고민한 티가 나는 문장이 많지 않아요. 그냥 만연체로 풀어버리고 말지요. 생각해보면 예전 같았으면 호헌護憲이라고 할 걸 요즘은 '개헌반대'라고 두 배로 길게 말하더라구요. 오늘날 누가 유신헌법을 만들었다면 '새로이 헌법♡' 같은 해괴한 조어를 들고나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한자쓰던 시절의 간명함이 더 좋아보이는 걸 보면 저도 수꼴이 다 됐나봐요.

"1983년 5월 군에서 제대했을 때 나는 '학습 지진아'였다. <공산당선언>과 <자본론> 말고는 읽은 책이 별로 없었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스탈린, 트로츠키 등 유럽과 중국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책과 논문을 싸들고 문경새재에 있는 시골마을에 들어가 석 달 동안 고시 공부하듯 읽었다. 모두 영어나 일본어 복사본이었다. 그런데 다 읽고 하산해보니 세상은 더 멀리 나가 있었다. 그런 논문은 모두 유행이 지났고 주체사상 학습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후배들과 어렵게 약속을 잡아 토론을 했다. 주제는 '휴전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한국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였다.
나는 휴전선이 사실상 국경선과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한반도에는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개의 국가가 있다. 남한의 혁명은 남한 민중이, 북한의 혁명은 북한 민중이 스스로 할 일이다. 서로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두 지역의 혁명이 관계를 맺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전체주의 독재국가고 남한은 자본주의 체제를 가진 군사독재국가다. 북한은 자주성이 높지만 남한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반쪽짜리 주권국가다. 대한민국을 더 자주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북한 사회를 바꾸는 것은 북한 사람들이 할 일이다. 그렇게 말했다.
한 번 더 만나 대화를 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그다음 약속 장소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잘린'것이다. 내가 '구제 불가능한 자유주의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6월 민주항쟁 때 대중이 선택한 구호는 '독재타도 민주쟁취', '호헌철폐 직선개헌'이었다. 그때 거리시위에서 청년들은 '헌법제정민중회의'나 '미군철수 양키고홈'을 외칠 수 없었다.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대놓고 면박을 주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이 대중의 욕망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의 '혁명전사'들도 대중의 욕망을 무시하지 못했다."

"학생운동의 대세를 장악한 NL 계열의 조직에는 구국학생연맹, 애국학생회, 구국학생동맹과 같은, 민족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 붙었다. 공개조직은 '반미자주화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처럼 반미와 민주화를 결합한 이름을 짓는 게 유행이었다. 구국救國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쓰던 말이었지만 대한민국을 미제 식민지라고 보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매력이 있는 단어였다."

"그가 '강철서신'으로 운동권의 스타가 되었을 때, 학생운동 선배들은 그 유행에 휩쓸린 후배들을 간곡하게 말렸다. 북한이 무늬만 사회주의 국가일 뿐 실제로는 개인숭배와 독재가 일상화된 전체주의 왕조국가라는 것은 굳이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일에 몰두했던 사람들이 '북한인권운동가'로 전향해 그때 북한과 어울리지 말라고 말렸던 사람들을 '종북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인간의 부박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유시민씨는 NL에 대해 할 말이 참 ㅋㅋㅋ 많지요 ㅋㅋㅋㅋ. 나중에 통합진보당史 같은 거 쓰시면 정가주고 살 의향 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나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표출된 세대 간의 투표 성향 차이가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정치적 대립을 넘어서는 철학적/문화적 분립이자 역사의식의 대립이라고 주장했다. 기성세대를 사로잡은 것은 욕망, 그것도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과 분단 상황이 강요한 대북 증오와 공포감이었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그들보다 더 강하게 자기 존중과 자아 실현의 욕망, 그리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공감에 끌린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앞날에 무엇인가 진보적인 변화가 찾아들려면 그 동력은 이들 젊은 세대가 지는 '고차원적 욕망'과 공감의 능력일 것이다."

분석이 천근淺近해요.

이 문단은 에필로그에서 등장하는데, 프롤로그에서 제시했던 매슬로우 5단계 욕구이론을 반복하면서 본서를 일관하는 줄기 노릇을 해주어요. 말하자면 종지宗旨인 셈이에요. 

(매슬로우 이론은 여기서..)

그러니까 본서를 정말 간단히 요약하자면 전후 세대는 물질욕구 충족의 시대를 살았고 지금 우리 세대는 자아실현욕구 충족의 시대를 살고 있다,지금 장년층은 (아마도 50대 이상?) 야수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야수가 된 이들로 물욕과 공포의 노예이다. 따라서 인간의 시대를 살고 있는 후속세대에게 기대를 건다는 이야기예요.

끙....

언제적 매슬로우 5단계론을 가져와서, 게다가 저렇게 무턱대고 용감하게 세대별로 배분을....




우리나라 노년층에 대한 심층기술(thick description)로는 (제가 과문하지만) 이런 게 있다고 들었어요.


아직 못읽어본 책인데 인터뷰만 봐도 느낌이 좋아보여요. 최현숙씨는 노인들의 사회적 행동의 능동성 (agency)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자기 실존을 걸고 덤빈 것 같아요. 반면에 유시민씨의 노인관은 상대방이 모두 시대적 한계와 권력의 오작동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세뇌된 이들이라는 인상을 주지요. 말하자면, 그들에게서 agency를 빼앗은 거예요. 이래서야 어떻게 상대를 이해하겠어요.
 
분석의 시비를 떠나서 이건 그냥 좀 더 예쁜 포장지로 포장한 정동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워요. 이정도 인식과 판단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기라도한다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불행일 거예요.




[총평]

본문만 보면 나쁜 점만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좋은 점도 그에 못지 않게 많았어요. 디테일도 잘 챙겼고, 저자의 고민도 잘 보여요. 그 고민의 방향 및 결론에 동의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요. NL파트는 그 챕터만 따로 떼서 팔아도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흥미진진했어요.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우리 아짐/아재 여러분이 굳이 사서 볼 필요는 없겠지만, 저처럼 어린 아해들에겐 그 자체로도 얻을 게 있을 뿐더러 더 나아가 적당한 스파링 파트너(heuristically) 역할도 맡아줄 책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두 번 읽을 책은 아닌 듯하니 인근 공립도서관에 주문 넣고 빌려보시길 권하며 이만 리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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