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3/19 21:34:55
Name   아침
Subject   여지를 남기며
갑자기 싸이월드 들어갈 일이 생겨서 천 년 만에 로그인 했다가 옛날에 쓴 짧은 소설(?)을 발견했네요.
자기 글 읽고 다음 편이 궁금해지면 막장인가요? ㅎㅎ
8년 전의 나야, 다음 편을 써 줘.

소설 제목이 '여지를 남기며'예요. 주인공 이름이 '여지'라서. 두 여자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이네요.


- 니가 만약 꽃을 받고 싶어했다면 난 꽃을 줬을거야.
그게 뭐가 어렵겠어. 그런데 넌 꽃을 좋아하지 않잖아.
- 언니는 쓸데없이 심각하다니까. 전 꽃도 좋은데요?
- 그렇겠지. 하지만 책이라도 좋았겠지? 또 초콜렛이어도. 아니면 뭐든.
- 언니가 내 생일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난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언니가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난 벌써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꽃 그림이 있는 책을 받았는데 펼쳐보니 초콜렛이 들어있는 걸 발견한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그녀는 나지막히 웃었다.
- 그럼 이렇게 말하자. 난 벌써 선물을 세 개나 했지? 하지만 내가 준비한 선물은 원래 네 개야.
그러니까 말해봐. 니가 정말 받고 싶은 선물을.
나는 그녀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았다.
- 나는...
그녀의 진지함에는 강요하는 힘이 있었다.
- 나는 ...
그녀는 재촉하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말하라니 정말 모르겠네요. 난 필요한 게 없나봐요
, 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 약속을 주세요.
- 어떤 약속을?
-  언니가 줄 수 있는 것을 주세요.
언니는 무엇을 약속해주고 싶어요?
- 난이도가 높구나.
- 쉬운 여자 아니니까요.
악의 없는 웃음이 공기를 잔물결처럼 흔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단어를 골랐다.
- 너를 좋아했어.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 그건 약속이 아닌데요.
- 약속이야. 그 사실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 정말 지켜질까요?
- 아마. 미련이 많은 여자니까.
- 거짓말. 저번에는 헤어지면 미련이 없다고 했잖아요.
- 사별하면 미련이 없다고 했지. 헤어진 사람은 죽은 것과 같아서.
- 나도 언젠가 죽을까요?
-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쉽게 죽었어. 성격 차이로 죽고, 오해로 죽고, 질투로 죽고, 돌연사에 자연사까지.
- 저한테 언니는 아주 오래 살 것 같은데요.
- 너도 그래. 고령화 사회잖아.
그녀의 대꾸에 나는 다시 한 번 잔잔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벽시계를 보며 이제 일어서야겠다고 말하자 문득 마지막으로 꼭 해야할 말이 생각났다.
- 언니,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사귀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해주세요. 지금 무엇이 끝나고 있는 거죠?
나의 질문 앞에서 그녀는 성실한 학생처럼 진지했다.
-  내가 너한테 괴롭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  제가 괴롭혔으니까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또 그 반대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응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무언가가 시작된 것은 내 쪽이었다.
- 끝나 보면 알겠지? 정말 무엇이 끝났는지는.
그녀가 마침내 답을 구한 듯 했다.
다행히도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날씨와 교통에 관한 무난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카페를 나섰다.
다음날 나는 그녀의 배웅을 나가지 않았고 그녀가 지구의 반대편에 잘 도착했다는 얘기를 건너서 들었다.
1년 반 동안 겨우 여섯 통의 이메일과 두 번의 국제 전화가 오갔다.
그 중 몇 개는 아주 길었고 나머지는 간단한 안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도 그러했으므로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다만 그녀의 귀국 소식만이 반가우면서도 생경했다.
돌아오다니.
마치 멀리 있었던 것처럼.




3
  • 춫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598 기타투표하였습니다 2 김치찌개 17/05/09 3020 6
11676 게임[LOL] 5월 15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2 발그레 아이네꼬 21/05/15 3020 1
13185 기타왜 통합적 사고가 중요하고, 아는 것을 연결하는 힘이 중요할까요? 1 조기 22/09/27 3020 3
4470 일상/생각옛날 이야기 - 2 4 tannenbaum 16/12/29 3021 7
8652 게임[LOL] 12월 19일 수요일 오늘의 일정 2 발그레 아이네꼬 18/12/18 3021 0
5201 영화이번 주 CGV 흥행 순위 3 AI홍차봇 17/03/16 3022 0
7772 스포츠180630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추신수 시즌 15호 2점 홈런) 3 김치찌개 18/06/30 3022 2
9057 음악My deadly virus 4 바나나코우 19/04/11 3023 3
5235 창작여지를 남기며 6 아침 17/03/19 3025 3
5880 도서/문학지난 달 Yes24 도서 판매 순위 3 AI홍차봇 17/07/03 3025 0
4746 창작오늘이 아닌 날의 이야기 (3) 10 새벽3시 17/02/02 3026 6
12415 도서/문학[독후감] '시드 마이어'를 읽고 나서 2 *alchemist* 22/01/07 3027 1
6589 스포츠171112 오늘의 NBA(스테판 커리 22득점 9어시스트) 김치찌개 17/11/14 3028 1
8020 스포츠180808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오타니 쇼헤이 시즌 12호 3점 홈런) 김치찌개 18/08/08 3028 0
11217 기타2020 GSL 슈퍼 토너먼트 시즌2 결승전 우승 "조성호" 2 김치찌개 20/12/13 3028 0
11388 기타2021 GSL 슈퍼 토너먼트 시즌1 결승전 우승 "조성호" 2 김치찌개 21/02/01 3028 0
12890 정치투표는 안했지만 선거 평가를 보고 쓰는 생각 영원한초보 22/06/05 3028 2
12970 오프모임7월 16일 토요일 오후 세 시 노래방 모임 어떠세요. 41 트린 22/07/05 3028 3
3661 스포츠[8.27]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오승환 1이닝 0실점 시즌 13세이브) 김치찌개 16/09/08 3029 0
6678 스포츠171129 오늘의 NBA(르브론 제임스 21득점 12리바운드 6어시스트) 김치찌개 17/11/29 3029 1
5744 스포츠170605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에릭 테임즈 시즌 15호 솔로 홈런) 5 김치찌개 17/06/05 3030 0
5056 일상/생각지하철 예수쟁이(1) 6 맑은샘물 17/03/03 3030 2
12106 오프모임구글 meet 벙입니다.(~22일 19시까지) 2 보리건빵 21/09/22 3030 1
12277 오프모임[끝!] 수요일 저녁에 음(mm)벙 어때요? (11/17 20시-22시) 16 BitSae 21/11/15 3031 1
2728 창작[마감완료] 조각글에 참여하실 멤버를 찾습니다! 9 얼그레이 16/05/02 3033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