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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2/06 18:57:14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강의록] 조선 유교이야기
아는 형님이 미국 모 처에서 한국의 종교를 주제로 강의를 해야하는데 유교에 대해서 좀 알려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책을 추천해달라고해서 좀 뒤져봤는데 그다지 맘에 차는 게 없어서 그냥 제가 짧은 글 하나를 써서 보내버렸어요. 써놓고나니 그냥 묵혀두는 것보담 지금 어디라도 올려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수정보완후 티타임에 살포시 올려봅니다. 그분이 강의에 쓰신다고 하니 "강의록"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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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유교



유교를 이야기하려면 유교의 탄생부터 이야기해야 해요. 유교는 대략 전국시대(BC3~5세기) 때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최대의 현안인 국가운영(=경국 經國)에 대한 해법의 하나로 떠오른 사상조류였어요. 이들이 내놓은 대답의 핵심은 주(周)나라 체제 = 이상향, 그러므로 주나라를 회복시킬 게 아니라면 그냥 새로운 형태의 주나라를 만들면 된다는 거였지요.

주나라 체제의 코어에 해당하는 게 예제(禮制)질서였고, 그래서 이들의 논의는 주로 예(禮)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요. 예의 핵심은 제사였어요. 제사는 다른 이들과 함께 과거를 기억하는 의식(ritual)을 치름으로써 개별 구성원, 혹은 하위집단을 공동체, 혹은 상위집단으로 묶어주는 기능을 해요. 쉽게 말해서, 각자 사는 이들을 같이 사는 이들로 만들어주는 고도의 정치행위이지요. 그래서 이들에겐 국가 = 제사, 제사 = 국가였어요. 종묘에서 제사가 이어지는 한 국가는 있는 것이고, 제사가 끊어지는 순간이 곧 국가가 사라지는 순간이에요. 예루살렘에 있는 신전 및 거기서 치르는 제의(祭儀)가 무지무지 중요하게 다뤄지는 기원이전 유대사, 그러니까, 구약성서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이게 어떤 느낌인지 대강 이해가 될 거예요.

물론 유대교와 똑같지는 않아요. 아마 가장 큰 차이라면, 유교라는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상류층에 불과했던 반면 유대교 참가자는 유대인 거의 대부분이었다는 점일 거예요. 이 차이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유교는 내세를 약속하는 류의 종교가 아니었다는 데 있어요. 아니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데 내세를 약속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궁금해하실 수 있는데, 이게 좀 그래요. 유교인(?)의 입장에서 귀신이나 내세는... 부차적인 거예요. 제사는 그 행위를 수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에요. 귀신을 기쁘게 해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요. 어떤 인류학자는 이런 특징을 [바른행위(orthopractic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어요. 그 행위에 담긴 [바른이념 (orthodox)] 같은 건 별 상관 없고 그냥 그 행위를 규정에 맞는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의미에서요. 여튼 유교인들에겐 제사를 통해서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목적이요 나머진 다 수단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극소수의 정치참여층이 아니라면 유교식 제사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지요. 사실 가져서도 안 됐구요 -_-; (목적과 수단 간의 이 모호한 관계는 나중에 신유학(성리학)이 등장하고나서야 해결돼요. 신유학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만 꼭 유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종교를 원해요. 종교만이 채워줄 수 있는 어떤 것, 모 사회학자가 말한 바 종교재(宗教財: religious goods) 같은 게 있거든요. 내세도 필요하고 기적도 필요해요. 누군가는 병을 낫게 해줘야 하고, 누군가는 비가 오게 기도도 해줘야 해요. 삶이 고통스러우니, 누군가는 이런 실존적 고통 역시 해결해줘야 하구요. 중국인들 역시 이런 게 필요했겠지요? 이러한 수요는 다양한 종류의 민속신앙들이 채워줬어요. 기원후 3세기 경에 와선 교단화에 성공한 도교, 그리고 인도에서 넘어온 불교 역시 이 수요에 부응한 케이스였구요.

유교관료들 입장에선 도교나 불교나 기타민속신앙이나 다 뭔가 카테고리가 다른 친구들로 느껴졌어요. 그러므로 [몇 가지 합의]만 있으면 공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국정은 유교관료들이 운영할 테니 너희들은 신경쓰지 말고 병이나 고쳐주고 비 좀 내리게하고 하려무나 ^오^"

반면 도교/불교/민속신앙들 입장에선 서로가 같은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라이벌이었어요. 같은 범주에 잡히면 보통 이해관계가 겹치지요. 아이폰이 잘팔리면 갤럭시가 덜팔리듯, 도교가 잘나가면 불교는 덜 잘나가게 돼요. 그러니 서로 디스하기 쉽지 않겠어요? "제가 쟤보다 나아요. 쟤는 가짜임. 아무튼 가짜임."

물론 간혹 이 [몇 가지 합의]가 깨지는 일이 생기기도 해요. 종교는 여럿이 모여서 의식을 치르는 일이고, 그런 일을 치르다보면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정치적 장치들이 필요해요. 예컨대 규약도 필요하고 (말 안 들으면 얼차려), 약속도 필요하지요 (공동체에 투신하고 협조하면 내세에 뭔가 줌. 아무튼 줌.). 이런 장치--규약이나 약속 --들은 그 내용은 유교이념과 다르지만, 그 카테고리는 같은 것들이에요. 얘들이 간혹 역사적 우연에 힘입어 폭발력있는 단체나 운동으로 발전하곤 해요. 황건적의 난이라든가 백련교 뭐시기라든가 태평천국 어쩌구 하는 게 다 이런 종류지요. 그럼 뭐... 국가권력이 나서서 열심히 진압하거나 아니면 다른 군벌이 나타나서 얘들을 대신 진압하고 새 왕조를 세우던가 하게 돼요. 얘들 스스로 성공한 경우는... 아마 없었던 듯 'ㅅ' (여담이지만 작금의 중국 정부가 파룬궁 法輪功 같은 운동에 극도로 예민하게 구는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체제 전복 시도는 반드시 민간레벨의 종교결사에서 시작한다는 역사경험 때문이지요.)

이부분은 로마제국과 초기 기독교단과의 관계에 비겨볼 수 있어요. 제국의 통치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방해하지 않는 한 기독교단이 그 자체로 로마 지배층을 자극할 거리는 그다지 없어요. 그래서 기독교단이 로마의 통치질서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논의/합의가 안 되어있을 때는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다가도, 문제의 합의가 대략 이루어진 뒤에는 입장을 180도 바꿔서 제국의 국교가 될 수도 있는 거지요. 다만 바리새이라든지, 아니면 로마령 유대왕국의 지배층에겐 기독교단의 [존재 자체]가 굉장히 불쾌할 수 있어요. 사실상 같은 카테고리 소속이라서 정말 어지간해선 공존이 어렵지요.



여기까지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유교 = 정치].



2. 신유교


이렇게 양자가 공존하던 시대는 9세기경 부터 변하기 시작해요. 몇몇 유교엘리트들이 자기네 경전을 재해석하면서 불교/도교/민속신앙이 담당하던 역할을 빼앗아올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예컨대 불교나 도교는 이런저런 방식을 통해 내면을 수양함으로써 실존적 고뇌를 해결해준다고 하는데, 그거 유교 경전 탐독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 거지요. 당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문인 한유(韓愈)와 그 친구들이 스타트를 끊었고, 그 후로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 이들이 꾸준히 등장했어요.

11세기에 이르러 과거시험의 확대-->지식인 층의 폭발적 규모 성장이 맞물려 거물급 유교사상가가 연달아 나왔는데, 이들은 불교/도교를 전방위로 압박하기 시작했어요. "야, 늬들은 개인적인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고 사회적인 문제는 선비들에게 맡긴다고 말하잖아. 근데 그거 아닌데? 개인적인 문제도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데?" 이러면서요. 당시의 개념으론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하는데, 내면의 영역에서 성인이 되는 것과 사회의 영역에서 왕도를 실현하는 것, 두 마리 토끼를 유교 하나로 다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에요. 이들을 당대엔 도학(道學)이라고 불렀고, 조금 후대엔 이학(理學)이라고 불렀고, 나중엔 성리학(性理學), 구미권에선 신유학(新儒學)이라고 불렀어요.

이걸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과 비교해보자면, 음, 정치이념의 성화(聖化)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개념의 확장에 비겨볼 수 있어요. 과거에는 꽤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democracy) 혹은 그것의 실현 자체를 선(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회 운영의 효율성 측면에서 더 좋다든가, 왕공대작의 세금징수를 견제할 수 있어서 금전적으로 득이 된다든가 등등. 목적이라기보단 수단이었지요. 그런데 또 다른 이들은 민주주의 고유의 가치와 선이 있으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사는 삶 자체가 지고의 의미가 있다고 믿었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자'를 자칭했어요. 이들에게 있어 민주주의자로 산다는 건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는 것만큼 의미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민주시민으로서의 일상과 사회생활 (secular) 모두가 일종의 성스러운 (sacred) 행위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목숨도 걸고 분신도 하고 그랬지요. 철학자 허버트 핑거레트 (Herbert Fingarette)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책 제목을 "공자: 성스러운 세속 (Confucius: The Secular as Sacred)"이라고 지었어요. 많은 현대 한국인이 현실정치에 종교적으로 열광하는 데는 어쩌면 이런 맥락이 있을지도 몰라요.



다시 요약: 신유교=성속(聖俗)일치


3. 조선


어쨌든, 12세기, 남송의 주희(朱熹)가 위와 같은 도학운동을 집대성한 이후로 유교는 세상 만물에 대한 유일무이한 지식체계, 절대적 권위가 돼요. 이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지식은 유교의 언어, 유교의 용어를 통해서 매개되고, 해석되지요. 그게 내성이든 외왕이든, 자연학이든 의학이든, 문학이든 사학이든. 그리고 바로 이 버젼의 유교가 고려말 안향(安珦)에 의해 한반도에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이 버젼의 유교가 제대로 이해되고 적용될 때 까진 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유교는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거든요. 유교경전 하나만 믿고 살기엔 삶이 팍팍했고, 그래서 세종이나 세조처럼 지배층 내의 불교마니아가 여전히 많았어요. 그러던 그들이 성리학의 내성외왕 이념을 진정으로 실천해야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한게 어림잡아 16세기부터예요. 조광조(趙光祖)는 당시의 시대정신의 대변자 같은 인물인데, 성리학이념의 실현에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투철한 이데올로그였지요.

물론 조광조 하나가 시대를 이끌었다거나 불러왔다거나 한 건 아니었어요. 1498년부터 1545년 사이에 4대 사화(士禍)가 모두 일어났다는 건 이 때 조선의 재야 지식계층이 성리학을 아주 진지하게 취급하기 시작했고 (사림파), 그래서 성리학을 수단 정도로 생각했던 기존의 권력 최상층(훈구파)과 이념지향상의 차이가 발생했다는 걸 의미해요. 1519년, 기묘사화 (세 번째 사화) 로 유명을 달리한 젊은 조광조는 그 심볼이었구요.

조광조와 친구들의 목숨을 앗아간 기묘사화를 목격한 10대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황 (李滉)이에요. 그는 타고나기를 은둔형이기도 했지만 특히 이 때 젊은이들의 영웅이었던 개혁파 정치인들이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는지 목도한 이후로 벼슬살이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접어버렸어요. 그래서 한양에서 과거시험을 보고도, 합격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귀향해버렸지요. 그리고는 거의 평생에 걸쳐 조정의 부름을 마다하고 경전 연구에 매진해서, 조선 제일의, 국뽕 좀 보태서 당대 제일의 성리학자가 됐어요. 그의 명쾌한 해석, 체험에 바탕한 단단한 입론은 대단히 매력적이어서 정치적 연결고리를 초월해서 많은 선비들의 깊은 존경을 받게 돼요.

그리고 이제 노년이 된 이황의 명성을 듣고서 그를 방문한 20대 초반의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이(李珥)였어요. 이이는 안동에서 며칠을 머물며 이황과 대담을 나눴는데, 이황은 그의 명석함에 놀라면서도 지긋이 서재에 박혀 공부할 타입이 아니라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어요. 그도 그럴 게 이황의 천성이 방콕러였다면, 이이는 정치인이었거든요. 그래서 후에 이 젊은이를 평할 때 그다지 높이 치지 않았어요.

한편 이이 역시 이황에게 조금 실망했지요. 이이는 성인의 도를 천하에 펼칠 포부가 있었는데, 이 노인네는 그냥 혼자 공부하고 사는 걸로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래서 역시 그를 그다지 높이 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게 돼요. 그리고 그 유명한 아홉 번의 장원 급제를 하게 되고, 조선 제일의 정치-행정러가 됐지요. 그의 실무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남아있는 증언들에 의하면 몇 달에 걸쳐 교착상태에 있던 정책판단 같은 게 이이가 병든 몸을 이끌고 오랜만에 조정에 나오면 하루아침에 해결이 됐다고 하니 과연 남다르긴 했나봐요.

이처럼 내성 (內聖)의 방면을 이황이, 외왕 (外王)의 방면을 이이가 대표하면서 조선성리학은 드디어 어떤 경지(?)에 다다르게 돼요. 그 전까진 조선 사람이 성리학을 공부한다고 할 때 같은 조선사람의 저작을 연구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는데, 이후로는 집집마다 퇴계집/율곡집을 갖추게 되었으니까요. 오늘날로치면, 한국 대학들이 영문학 연구에 매진한지 300여년 만에 드디어 영문학 정전(canon)에 영원히 포함될 만한 작품을, 그것도 순수 국내파의 손으로, 두 편 정도 써낸 정도의 쾌거라고 보시면 돼요.

그 뒤론... 잘 모르겠어요 'ㅅ'; 잘나가던 시절 이후론 별로 재미가 없어서 공부를 열심히 안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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