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2/01 19:12:05
Name   기아트윈스
File #1   청어노걸대,_삼강행실도_(BL).jpg (69.3 KB), Download : 9
Subject   18세기 외국어교재 - 청어노걸대(清語老乞大)


노걸대의 老는 우리말 '선생' 정도의 의미요, 걸대는 키타이, 즉 '거란(契丹)'이에요. 거란이 세계사에 준 충격은 꽤 대단한 것이어서 나라 자체가 망한 후에도 북중국인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자리잡았대요 (참고로 항공사 케세이 퍼시픽의 Cathay도 이 '키타이'에서 온 말이에요. 케세이 퍼시픽 = 거란 태평양 항공....). 그래서 '노걸대'라는 제목은 '중국인양반 (Mr. Chinese)' 정도로 해석할 수 있어요.

이거시 무슨 책인고하면, 고려때 만들어진 중국어 교과서예요. 중국인들과 만날 일이 많은데 말은 다르니까 통역사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통역사는 보통 아쉬운 쪽에서 양성하지요. 그래서 조정에서는 양성소를 만들고 굴리는 데 투자를 꽤 해야 했고, 여기서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만든 교과서가 노걸대와 박통사(朴通事: 통역사 박씨)예요. 노걸대 첫 부분을 한 번 시험삼아 보자면,


大哥, 你從那裏來: 형씨는 어디서 오셨소?
我從高麗王京來: 나는 고려 왕경에서 왔소.
如今那裏去: 이제 어디로 가시려고 하오?
我往北京去: 난 북경으로 갈 거요.
你幾時離了王京: 당신은 언제쯤 왕경을 떠나오셨소?
我這月初日離了王京: 나는 지난 달 초에 왕경을 떠나왔소.


재밌쥬? 외국어 교재 내용이랄께 뭐 특별한 게 있겠어요. 결국 잡담인데, 천년이 지나도 잡담 내용은 그게 그거지요 ... 'ㅅ'
이 책들은 고려시대를 넘어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도 계속해서 업데이트됐어요. 중국어도 한국어도 계속 바뀌니까요. 그러다가 한 번 크게 갱신된 게 영조 즈음이었어요. 국제 정세의 변화로인해 이 때 몽골어와 만주어 버젼 노걸대를 편찬했거든요. 이 두 버젼의 노걸대를 각각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청어노걸대(淸語老乞大)라고 하고 구버젼의 노걸대를 한어노걸대(漢語老乞大)라고 불러요.

이 친구들은 수요가 제법 있던 텍스트여서 그런지 이런저런 판본이 꽤 많이 보존되어있어요. 중세 한국어, 몽골어, 만주어, 중국어 음운 연구에 있어 매우매우매우 중요한 자료들인데 참 다행한 일이지요.

그 중 청어노걸대는 이 세상에 딱 세 질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일본에, 하나는 프랑스에,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런던의 대영도서관 (BL) 에 보관되어 있어요.

얼마 전에 일이 있어 비엘에 다녀왔는데 저걸 보여주더라구요. 한 편으론 직접 보게 되어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조선놈이 흘러흘러 이역만리에 와있는 모습이 꼭 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개진개진했어요.



사진해설: 좌측이 청어노걸대, 우측이 17세기판 삼강행실도예요. 좌측 놈은 특이하게도 좌에서 우로 읽는데 그 내용이..

"이것흔 흙구들에 엇지하여 자리오? 만일 집자리 잇거든 여러닙 가져오라. 내집의 삿자리 업슴애 이세 낫집자리를 보내니 너희 하룻밤 의지하여 살라. 주인아 네블므드라. 내일 오경시에 일가리라. 오냐 그리하쟈. 나그네를 쉬라 내 문을 보삺히고 자리라. 오라 아직 가지 말라."

대충대충 이해가 되네요. 이제 적당히 말이 통한다는 걸 알았으니 타임슬립해도 안심.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823 일상/생각사..좋아하는 인물에 대해 말해봅시다. 50 기아트윈스 16/10/04 4264 0
    3833 일상/생각분사난(忿思難) 8 기아트윈스 16/10/05 4070 1
    3837 일상/생각[펌] 시대로부터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45 기아트윈스 16/10/06 4239 12
    3873 일상/생각인종차별에 관한 기사 하나. 24 기아트윈스 16/10/11 4001 2
    3876 일상/생각전직 호주 총리 만난 썰 40 기아트윈스 16/10/12 4597 8
    3936 일상/생각달팽이 20 기아트윈스 16/10/17 4710 4
    4043 육아/가정만 4세, 실존적 위기에 봉착하다. 54 기아트윈스 16/10/31 6117 21
    4100 방송/연예오늘 밤, 지구별 2(Planet Earth 2)가 발표됩니다. 19 기아트윈스 16/11/06 5575 0
    4115 정치시국 단상: 박대통령과 골룸 10 기아트윈스 16/11/08 3884 10
    4152 창작[한단설] 아브라함과 이삭 15 기아트윈스 16/11/14 3848 5
    4167 기타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외전): 지록위마 (指鹿爲馬) 26 기아트윈스 16/11/16 3618 0
    4243 역사몽골제국은 왜 헝가리에서 후퇴했을까 16 기아트윈스 16/11/27 5717 13
    8855 사회북한은 어떻게 될까 - 어느 영국인의 관점 83 기아트윈스 19/02/12 7599 77
    4347 일상/생각면접으로 학부신입생 뽑은 이야기 45 기아트윈스 16/12/10 4718 17
    4480 철학/종교산타가 없다는 걸 언제쯤 아셨어요? 42 기아트윈스 16/12/30 4812 8
    4612 음악등려군과 대북방송 이야기 17 기아트윈스 17/01/13 4622 7
    4741 역사18세기 외국어교재 - 청어노걸대(清語老乞大) 25 기아트윈스 17/02/01 5899 6
    4789 철학/종교[강의록] 조선 유교이야기 23 기아트윈스 17/02/06 5447 9
    4820 정치손학규 박사의 박사논문을 읽어보자 57 기아트윈스 17/02/09 6053 7
    5045 일상/생각3.1절 기념으로 국뽕이나 한사발 마셔봅시다 18 기아트윈스 17/03/02 3869 5
    4948 도서/문학책 리뷰 몇 개 28 기아트윈스 17/02/21 5158 12
    5071 문화/예술대영박물관 습격기 31 기아트윈스 17/03/04 5690 10
    5102 일상/생각아들이 더 좋다는 친구 30 기아트윈스 17/03/07 4014 10
    5196 일상/생각자존감이야기 45 기아트윈스 17/03/15 4786 20
    5268 일상/생각친구만들기 8 기아트윈스 17/03/23 3327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