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1/31 21:18:28
Name   化神
Subject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냐.
일 년에 세 번 만나는 사촌동생은 나보다 8살이 어리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태어났고 나보다 키는 작지만 덩치는 더 크고 힘은 세지만 말은 없다. 대학교에 갔고 군대는 가고 싶어하지 않는 그 동생은 평생을 안산에 살았다.

백부님 말씀에 곧잘 대꾸하는 나와는 다르게 내 동생부터 사촌 동생들까지, 백부님 시선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이다. 어디갔냐고 부르면 그때야 살짝 기어나와서 어디 도망가지 않고 집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뒤 다시 숨는다. 묻는 질문에나 들릴듯 말듯하게 대답하는 그 모습이 지켜보는 사람마저 숨 넘어갈 듯 갑갑하여 묻는 사람도 이내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그 동생에게 백부님은 또 말을 걸었는데 이번에는 그 주제가 자못 심상찮다.

"그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냐."

거실에 앉아서 제사상에 올릴 호두를 까던 사람들이 심각해진다. 그냥 묻는 질문이 아닌데. 눈 앞이 깜깜해졌다.


평소같으면 둘러대고 피하기 바빴을 사촌 동생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꾸했다.

"대통령이 잘못했습니다."

"뭐?"

"대통령이 잘못했습니다."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래?"

"잘못한 거 많습니다."

"그래?"

백부님의 질문은 나에게로 넘어왔고, 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백부님의 의도대로 대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넓은 집에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본인과 뜻이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 백부님은 그 때부터 이 빨갱이 공화국의 현실에 개탄하며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여왕을 변호하기 시작했는데 그 논리가 익히 알려진 그 논리였다.

측근에게 물어본 것이다. 조작이다. 김영란법 때문에 언론이고 검찰이고 노조고 한통속으로 작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논리를 알게 되었다.

  대통령은 왕이다. 왕이 곧 법이다. 계엄령을 내려서 탱크로 광화문을 밀어버리라고 해야하는 힘을 가진 왕이다. 국민들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 국민을 잘못 가르쳐서 이모양이다.


일제가 패망을 앞두던 1945년에 태어나서 왕이라는 존재는 책에서만 보셨던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도 왕이라서 그렇게 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집안에 가장 큰 어른에게 불사이군의 충성을 시험할 깜냥을 부리기에는 정유년 새해가 아까웠다.


그럴수 있었다. 역도의 무리가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궁궐을 에워싸 여왕을 끌어내리려 하니 지방 촌로라도 상경해 힘을 보태야 하건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노신만을 탓할 뿐인 70대의 노인에게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말씀드려봤자 머리에 먹물 넣은 불충한 것들의 감언이설일 뿐이었다.

그러나 거짓에 대한 믿음에 뿌리박고 선 논리가 계속 잘려나가는 것을 견디다 못한 백부님은 이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렸다.

"대통령이 하는 것을 따르는게 충이야! 언제적 세월호인데 팔뚝에다 세월호 세월호 새겨가지고 돌아댕겨 댕기기를, 지들 부모가 죽어도 삼년상 안치를 것들이!"


아이고 백부님.

처음부터 그랬다. 놀러가다 죽은 걸 왜 대통령이 책임지냐고 역정 낼 때 마다 내 사촌 동생은 자리를 피했다. 사촌 동생은 안산에 있었고 세월호가 가라앉던 그곳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비록 학교가 같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는 중학교 때 친구들, 초등학교 때 친구들, 어릴때 부터 알던 친구들이 있었다. 학원에서 보던 친구들이었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을 때, PC방 갈 때, 길 가에서 우연히 만나면 인사하던 그런 친구들이었는데 한 순간에 사라졌다.

교복 입은 아이들이 장례식장에 와서 어디를 먼저 가야할 지를 얘기하던 곳이 안산이었다. 사촌 동생은 그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아이들은 말을 잃었고 저마다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처들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 사람을 앞에두고 그런 말을 했다.

사촌 동생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일어섰다. 처음으로 그 녀석이 자못 당당히 대꾸하는 것을 봤는데 앞으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냐.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282 일상/생각어떤 미국악당 25 눈부심 16/12/02 4271 0
    1104 기타어떤 똥휴지회사의 잔머리 16 눈부심 15/09/26 8950 0
    6050 일상/생각어떤 대화. 15 벤젠 C6H6 17/08/03 3665 13
    6479 음악어떤 남자가 여자를 떠내보내는 장면, 鏡 1 틸트 17/10/29 4867 5
    3474 일상/생각어떡하지? 너어~? 50 Darwin4078 16/08/08 5639 0
    4730 일상/생각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냐. 16 化神 17/01/31 3662 7
    7851 여행어두운 현대사와 화려한 자연경관 - 크로아티아 12 호타루 18/07/15 4607 20
    14615 경제어도어는 하이브꺼지만 22 절름발이이리 24/04/23 2320 8
    3136 일상/생각어느날의 질문 52 ORIFixation 16/06/27 3951 0
    2542 일상/생각어느날의 술자리 12 ORIFixation 16/04/05 4196 2
    12976 일상/생각어느날의 상담 사례 기록 - 01 2 dolmusa 22/07/07 2865 18
    6122 일상/생각어느 흔한 여름 날 3 二ッキョウ니쿄 17/08/17 4318 16
    2280 의료/건강어느 핵의학과 의사가 말하는 온라인 의료상담 23 damianhwang 16/02/24 7234 0
    11276 일상/생각어느 택배 노동자의 한탄 11 토비 20/12/26 4097 32
    14894 의료/건강어느 큰 병원 이야기 12 꼬앵 24/09/03 1392 0
    10654 일상/생각어느 이민자가 보는 시스템적인 문제 12 풀잎 20/06/06 4765 19
    12278 일상/생각어느 유서깊은 양반가문 이야기. 16 Regenbogen 21/11/16 4377 35
    4416 일상/생각어느 옛날 이야기 2 뜻밖의 16/12/20 3757 0
    5325 기타어느 영어무식자의 영어평균자(?)가 된 수기 4 dOnAsOnG 17/03/30 3949 5
    6416 스포츠어느 연예인의 악수회 2 키스도사 17/10/14 5231 0
    2909 일상/생각어느 시골 병원 이야기 35 Beer Inside 16/05/28 4441 10
    6778 영화어느 스타워즈 키드의 분노 23 No.42 17/12/18 5502 11
    2886 정치어느 소아성애자의 고백 27 피자맛치킨버거 16/05/25 23373 6
    154 기타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오 65 레지엔 15/06/01 12040 1
    2339 일상/생각어느 면접 후기와 유리천장 12 깊은잠 16/03/05 5403 8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