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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1/08 23:18:27
Name   눈시
Subject   여요전쟁 - 3. 의군천병
1. 시작
현종 원년, 1010년에 큰 일이 벌어집니다. 5월에 하공진과 유종이 여진족에 쳐들어 갔다가 패하는 일이 일어났고, 열받아서 고려에 조공을 바치러 온 95명의 여진인들을 몰살시켜 버린 것이죠. -_-; 목종 때부터 여진족들이 자기들을 내쫓는 것에 반항하긴 했지만, 대다수의 여진족은 아직도 고려 편을 들고 있었습니다. 발해 덕분에 거란보다는 고려와 가까웠고, 유목과 농경이라는 국가의 특성상 자기네와 비슷한 거란보다는 차이 나는 고려가 편했죠. 거란이랑 가까워지면 흡수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고려로서도 거란과 적대하고 압록강을 확보한 이상 여진족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현종은 그들을 섬으로 귀양 보냅니다.

하지만 이 여진족들은 거란에 가서 고려를 쳐 주기를 호소합니다. 마침 정말 좋은 명분이 있었죠. 찬탈, 목종 시해였죠. 얼씨구나 좋구나 하면서 거란은 바로 사신을 보내 따집니다.

10세기 말 발해 부흥 움직임을 확실히 막고 고려의 확장 역시 막은 거란은 서쪽으로 눈을 돌려 송을 공격합니다. 이는 1004년 전연의 맹으로 끝나죠. 국경은 어떻게 하고 송이 형, 요를 동생으로 하며 송은 요에 많은 물자를 "하사한다"는 것으로요. 이제 거란의 눈은 다시 동쪽으로 돌려졌습니다. 필요한 건 명분, 찬탈은 최고의 명분이 돼 주었고, 그걸 청한 게 여진이라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여진족을 확실히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급선무였으니까요.

반대도 없었던 건 아닙니다.

"(나라는 피폐하고 먹을 건 없고) 도이(島夷-_-)의 소국은 성루가 완고합니다. 무로는 이기지 못할 것이니, 만일 손해를 보고 후회할까 두렵습니다."

이미 고려에 사신을 보냈던 7월, 요 성종은 총동원령을 내리며 고려를 칠 준비를 했습니다. 대장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 병력은 내세우기로는 40만이었고, 스스로를 의군(義軍) 천병(天兵)이라 칭했습니다.

2. 정면 승부
"아냐 아냐 니들 죽이러 온 거 아냐. 강조만 내놔. 그럼 다 봐줄게"
"그러시든가"

고려가 군사를 물리기를 한 번 요구했지만, 그게 통하지 않을 거란 건 양 쪽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강조는 스스로 30만 대군을 일으켜 나갑니다. 뭐 -_-; 이 거란의 40만처럼 고려의 30만도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천천히 얘기해보죠.

거란이 처음 노린 곳은 흥화진, 그 곳은 2차 여요전쟁의 영웅 양규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흥화진을 구원하러 출진한 최사위의 병력은 패했구요. 일단 기세 좋게 오긴 했지만 흥화진을 본 순간 요 성종도 많이 당황했을 겁니다. (...)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왠 우주방어가 완비돼 있었으니까요. 결국 그는 회유책을 택합니다.

"아니 내가 딴 생각이 있어가 온 게 아이고, 강조 금마만 넘기라. 다 느그들 위해서 의리 때문에 온 기다. 넘길래 디질래?"

이에 양규는 참으로 간곡한 답장을 보냅니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는 마땅히 간흉을 제거해야 될 것이요, 아버지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모름지기 절조를 굳게 지켜야 하니, 만약 이 이치를 어긴다면 반드시 그 앙화를 받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민정을 굽어살피어 마음을 돌리소서. 크게 하늘의 그물을 열어 주시면서 하필 조작이 먼저 품안에 들어오기를 구하십니까. 병거를 돌리셔야 우리 용사들의 복종을 얻으실 것입니다"

뭔가 간곡한 데 참 은근히 까고 있죠.


속마음은 이랬을 거구요.

요 성종은 한 차례 더 항복하라 협박했지만 양규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종은 40만 중 20만을 현 의주 지역에 두어 이들을 견제하게 한 후 남하합니다. 절반이나 떼어 20만으로 내려온 것, 그런데도 양규 등 강동 6주의 병력이 후방에서 활개를 친 점 등을 보면 과연 40만 대군이 맞을까 의문이죠. 송과 전쟁할 때도 20만 이상을 동원한 적이 없거든요.

이 때 강조는 대군을 이끌고 통주에서 맞섭니다. 강을 사이에 둔 야전이 시작됐습니다. 강조는 세 곳의 물이 모이는 것, 三水에 하나, 서쪽의 산에 하나, 성 앞에 하나씩 진을 두고 맞섭니다. 거란이 여러 차례 공격해 왔지만, 여기서 그들은 신병기를 보게 되죠.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검차劍車. 기다란 나무에 방패를 여러 개 달아 적의 화살을 방어했고, 창이나 검을 꽂아 접근전을 못 하게 했으며, 뒤에서 고려군은 안전하게 활을 쏠 수 있었죠. 헌데 이게 말이 끌고 거란군을 여러 차례 포위했다니 기동성도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참으로 신묘한 병기였습니다. 거란의 주력은 궁기병, 귀주대첩 때문에 쩌리 취급 받지만 바로 이들이 송을 계속 압박하고 요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준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결전병기였겠죠.

꽤나 상황이 좋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강조는 계속된 승리로 자만에 빠져 버렸죠.

3. 고려군 전멸
열 받은 거란군은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삼수의 진이 격파되고 거란군은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죠. 이는 급히 강조에게 전해집니다. 헌데... 강조의 대답이...

"입 안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니 마땅히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

당시 강조는 알까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탄기彈棊라고 하는데, 바둑알로 하는 그거요. -_-; 적이 더 밀고 오자 두 번째 보고가 오는데, 그제야 놀라면서 맞서려 했지만 이미 늦었죠. 역시 지나친 게임은 안 좋은 거죠. (...)

재밌는 건 이 때 강조가 급보를 들은 직후 목종의 귀신을 봤다는 것이죠. "네 놈도 끝이다. 천벌을 피할 수 있겠냐" 목종의 귀신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괴력난신에 가까운 얘기를 고려사에 넣은 걸로 봐서 조선에서도 어지간히 강조 싫어했나 봐요. 강조는 귀신에게 무릎 끓고 빌다가 거란군에 잡힙니다.

헌데 바로 뒤에 전혀 다른 얘기가 나오죠. 이건 좀 이따 하기로 하고, 거란은 이렇게 고려군을 대파, 목을 벤 것만 3만여 급에 달했고 수많은 군량과 무기를 노획했다고 합니다. 마치 여당전쟁에서 15만 고구려군이 대파됐듯, 이 때 고려의 주력군은 소멸됐습니다. 이후 전쟁에서 고려는 쭉 수세에 몰리게 됐습니다.

강동 6주의 우주방어에 이은 청천강 방어선, 이는 마치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처럼 뚫리는 순간 지옥의 문이 열린다는 게 이 2차 침공으로 인해 고려도 확실히 알게 되죠. 거란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현재 북한도 마찬가지일 걸요? -_-a 중국과 전쟁이 날 경우 청천강이 뚫린다면........ 데프콘을 봅시다 ^_^)

요 성종은 끌려 온 강조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지만 강조는 이렇게 답 하죠.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다시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성종이 여러 차례 달랬지만 강조는 요지부동이었고, 살을 찢으면서 물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성종은 같이 잡혀 온 이현운에게 묻죠. 이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두 눈으로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 마음을 가지고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

이를 들은 강조는 분노하여 그를 발로 찼다고 합니다. 포박까지 풀어 줄 정도면 강조를 꽤나 달랬던 모양입니다만... 요지부동이었죠. 결국 강조는 처형 당합니다.

바보 같은 모습이 나오다가 갑자기 충의의 화신이 된 강조, -_-a 이 때문에 알까기에 빠졌다는 얘기는 스킵하고 정말 작전의 미스가 아닐까 하는 얘기도 나옵니다. 강조가 한 말이 한 턴만 더, 아니 한 판만 더 하자는 게 핑계가 아니라 정말 거란군을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거라는 거죠. 목종의 귀신까지 가면 더 의심이 가긴 합니다.

어쨌든, 방심이었든 작전 미스였든 이 때 거란군은 강조의 예상을 뛰어넘은 기동으로 고려군을 전멸시킵니다. 포위냐 돌파냐의 싸움에서 후자가 이긴 것이고, 쌈싸먹기를 하려다 터져버린 거죠. (...)

무신정권의 시초처럼 느껴지는 강조, 그래도 이런 면에서 어느 정도 옹호는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를 명분으로 삼고 오는데 직접 나섰고, 한 번에 포로로 잡힌 것을 보면 선봉은 아니더라도 안전한 곳이 아닌 전장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최소한 자기 목숨보다는 고려를 생각했구요. 후에 무신정권, 특히 최씨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죠. 뭐 오히려 최씨들이 이런 강조를 보고 자기 목숨을 더 생각했던 걸지도요.

이 전투로 고려군이 모두 소멸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승기를 탄 거란군이 다시 공격하자 김훈, 김계부 등이 완항령에서 매복했다가 역습을 가하거든요. 하지만 거란의 대군을 막을 정도의 역량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30만도 강조가 이끈 병력들만 30만인지, 강동 6주에 있던 병력을 합쳐 30만인지, 아예 전국에서 30만을 일으킨 다음 어느 정도의 병력만 이끌고 간 것인지 참 애매하죠 -_-;

요 성종은 강조의 편지로 꾸며 다시 흥화진에 항복을 요구하지만, 양규는 왕명이 아니라고 스팸 처리합니다. 이에 성종은 통주로 가서 역시 항복하기를 권했지만, 중랑장 최질과 홍숙이 거부합니다. 다만 곽주에서는 조성유가 도망가면서 성이 함락되구요. 요 성종은 이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어차피 목표는 강조가 아니었죠. 고려에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주면 안 됐습니다. 무조건 남으로 진격, 이것이 그의 명령이었습니다.


안북도호부사 박섬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청천강 이남은 무주공산이 됩니다. 거란은 미친 듯한 속도로 남진을 시작했죠. 고려 건국 이래 최악의 위기가 시작됐습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2차 여요전쟁의 개막이었죠.

한 가지 고려에 희망이었던 것은 흥화진부터 통주, 귀주에 이르기까지 고려가 열심히 쌓은 강동 6주가 곽주 빼고는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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