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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25 21:16:34
Name   vlncent
Subject   바둑 프로기사라는 장래희망을 포기한 썰
내가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건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그건 권유라기 보단 어르고 달래기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7살짜리 어린애는 보통 부모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왜 아버지(혹은 부모님)가 내가 바둑 배우기를 원하셨는지는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바둑을 두실 줄 아시지만, 아버지는 전혀 두실줄 모른다. 아마 그 당시를 휩쓸었던 ‘바둑을 배우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의 영향이었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처음엔, 나는 바둑을 별로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다. ‘바둑은 고리타분한 노인네들의 게임’이라는 인식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7살짜리 꼬맹이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다행히도,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설득할지 아셨다. 딱 한번만 가보고 맘에 안들면 그만둬도 괜찮대서 가본 바둑학원은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엔 교실의 풍경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바둑이 재밌었으니까.

바둑은 입문하기까지가 무척 어려운 게임이다. 내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처음 바둑을 배우고 약 1년은 걸려서야 어설프게 한판을 둘 수 있었던 것 같다. 안타깝기 그지없게도, 대부분의 내 친구들-혹은 그 부모님들은 그런 과정을 견디지 못했다. 그 때문에, 내 바둑실력이 느는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끝까지 남아 내 상대가 되어준 몇몇 고마운 동갑내기 친구들과의 기억을 떠올려볼 때, 약간 빠른 편이었던 것 같긴 하다. 어쨌거나 이런 불분명한 기억은 별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3,4학년 때 6학년 형 누나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했던 경험이 내겐 더 의미가 있는 기억이다.
이런 표현은 다소 우습지만, 4학년은 내 전성기였다. 아직도 우리집에 남아있는 트로피 대부분은 4학년부 우승이라 써져있다. 대부분 유명하지 않은 대회지만, 나름 전국단위 대회인 것도 있다. 이 트로피들은 두가지 면에서 안타까움을 남긴다. 정말로 강한 프로지망생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최강부에 참가해야 해서 나와는 둬본 적이 없었다는 것과, 내가 4학년부터, 이 트로피들을 받기 시작하면서 프로기사를 꿈꿨다는 점이다.

내 사춘기는 4학년때 시작되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 때부터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4학년의 내게는, 후에 바둑과 상관없는 직업을 가진다는게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바둑. 바둑을 다루는 직업. 그중 프로기사보다 멋져 보이는건 없었다. 아마 실제로도 없을게다. 그 살떨리는 승부와 치열한 수 싸움, 신의 한수에의 탐구 과정에 경외감을 갖지 않을 자 누가 있을까!
그 후로 나는 쭉 프로를 꿈꿨지만 동기부터가 멋져 보인다는 상당히 단순무식한 이유니, 간절하고 절박하게 프로가 되기 위한 방법을 구했을리가 없었다. 지금처럼 열심히 둬서 짱짱 쎄지면 프로가 될 수 있을거다, 막연하게 이정도의 생각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나 스스로는 그때 벌써 이정도의 생각을 했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반대로 어머니는 내 소망을 듣고 진지하게 바둑학원 원장님과 상담을 해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은 딱 잘라서 반대하셨단다.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무섭도록 정확한 판단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프로를 지망해봤자 장그래밖에 더 됬을까. 하지만, 최소한 장그래는 시도할 기회를 얻었었다.
예전에 어떤 소설을 읽었었다.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가정이 있다는걸 알게 되어, 사랑을 고백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남자. 나는 그 남자의 심경을 안다.
하여튼, 6학년때, 학원들간에 열린 교류전에서, 프로를 지망하다 떨어져나온 아이와 둬볼 기회를 갖게됬다. 속된말로 발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짐작조차 안가는 패배는 상대와 내가 체급차이가 난다는걸 의미한다. 그 애 다음으로 내가 가장 강했다는걸 곱씹어봤지만, 위안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 후로 프로 바둑기사라는 장래희망은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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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아게하
    소중한 이야기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간흑인대머리남캐
    체급 차이.. 저는 대학때 비슷한 과정을 겪었는데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씀해주신 경험이 그 후 살아가는 데 있어 끼친 영향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vlncent
    음... 고닝이라 영향 운운할 깜냥이 안됩니다.
    일단 중학교때는 명지대에 바둑학과가 있어서 그곳에 관심을 가졌고, 지금은 인문계열로 진학을 희망하는 중인데, 이런 대답을 기대하신건 아닌것같고...
    결국 별거 없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시절 바둑특기생 친구들 셋이 있었는데, 재능...을 그나이때 결정짓는건 애매하다고 봅니다. 기본적인 묘수풀이를 수년간 반복하고 수백 수천장 기보를 외우고 프로기사들 대국을 복습하고 다시 프로기사밑에서 대국하고 교정받고 복습하고... 셋중 한명이 대학다닐때 그러드라고요. 둘은 뭐하고 사는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가 바둑도 돈이라고. 재능은 돈이 덜 들 뿐이고.... 문득 그런 얘기했던 기억이나네요.
    다양한 감정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절름발이이리
    감당하기 쉽지 않은 시련이었겠습니다.
    저도 한때 바둑에 한참 빠진 적이 있었죠. 저도 대략 초4학년때였는데... 전 대회에서 발렸습니다.
    그것도 불계패로 완벽하게 말이죠. 웃긴 게 그 뒤로 흥미가 팍 식어버리더군요. 나중에 대회결과를 보니 날 바른 사람이 우승;;
    그 뒤로는 바둑을 많이 두지는 않습니다. 그냥 가끔 두는 정도죠. 글에서 뭔가 삶이 느껴져서 좋네요.
    알고보니 상대가 이세돌이었다던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프로데뷔는 했던걸로 기억합니다...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어릴땐 나름 동네 수재급에 전남북도 통합 수학경시대회에서 2등까지 해봤었는데...

    학원 1년 후배가 처음 학원 들어올땐 평범한 성적이었는데 중 2때 대학 일반수학 수준을 뛰어넘는거 보고서 아 나는 그냥 평범하게 공부 아주 조금 잘하는 그냥 그런 학생중 하나구나, 라는걸 느꼈습니다. 그친구는 지금 프린스턴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땄더군요.
    darwin4078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시골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피아노 학원을 6년동안 다녔습니다. 4학년때쯤 학원 선생님이 어머니와 함께 저를 광주의 대학교 교수님이라는 분께 레슨차 데려갔습니다. 거기 다녀온 다음에 어머니가 웬지 피아노 학원에 시들하시더라구요. 그전에는 피아노 학원 안가면 무지 혼내셨는데, 그 이후로는 안가도 그냥 그러냐, 하시고...

    지금 생각해보면 레슨 하러 데려간게 아니고, 장래가 있는지 없는지 보러 간거 같애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아노 학원을 빼먹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6년동안 피아노 학원을 다닌 이유는 학원 간다고 하고 오락실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정말 열심히 다녔더랬죠.
    켈로그김
    저도 피아노학원 6년 다녔는데!!
    저도 오락실 + 피아노학원에 있던 소년중앙과 보물섬때문이었습니다.
    크크..

    하지만 아무도 저에게 레슨이라던지 대회같은걸 권하지는 않더라고요.. ㅡㅡ;
    darwin4078
    저는 피아노 하면서도 재미는 있는데 웬지 이건 좀 아닌거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오락실에서는 거의 왕대접을 받으면서 오락했어요. 심지어 오락실에 깡패들 많았잖아요. 근데 저는 돈뺏겨본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어찌어찌하다 깡패 두목 형이랑 오락 같이 하면서 친해져서요. ;;; 돈없이 오락실 가도 어려운데 깨달라, 같이 2인용해달라 막 그래서 그때 꿈이 오락 선수였어요. 낄낄...
    진짜 저보다 오락 잘하는 사람은 시골에서 못봤는데... 그랬는데... 고등학교 올라가서 광주로 가보니...ㅠㅠ 저는 그저 깡시골 촌놈이었슴다. ㅠㅠ 거기다 오락실 패러다임이 슈팅, 아케이드 게임에서 대전격투게임으로 넘어갔는데 그 흐름을 타지 못하기도 했고...ㅠ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바둑의 세계가 궁금해서 기초적인 룰 설명하는 책 사다가 잠깐 흉내내본 적이 있는데, 정말 어렵더라고요.
    바둑을 무척 좋아하던 사람으로 부터 바둑은 천재들의 게임이이고, 네가 책으로 만나는 천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들었던 기억이...
    소중한 경험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어요,
    바둑하시는 분들 이야기 들어보면 바둑만의 매력이 있다고는 하는데
    저는..어릴때 했던거라고든...알까기(?)크크크..
    vlncent님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릴때부터 큰 꿈을 생각할만큼
    잘성장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좋은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제가 아는 분도 도저히 유창혁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해서 바둑을 접은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다른 영역에서 엄청 대가가 되셨습니다만..
    마르코폴로
    유창혁을 이기지 못하겠다에서부터 이미 범상치 않으신 분 같네요.
    아케르나르
    과거 국내에서 유창혁 이길만 한 사람은 한손가락으로 꼽았을텐데....
    whenyouRome...
    유창혁을 이기려면 이창호 조훈현을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_-;; 지금은 공격수의 전설에 세계대회 우승까지 하신 기산데...;;;
    충암중 시절인지 고등 시절인지 바둑 같이 뒀다고 하더군요. 여튼 그양반 만나서 깨끗하게 미련을 버렸다고.. 지금 토론토 대학 교수로 계신다는.
    켈로그김
    저는 축구선수를 꿈꾸다가.. 나름 당시 팀에서 위치선정과 체력이 좋다고 감독한테 칭찬도 받고 했었는데..
    조병국이랑 맞부딫혀 보고 \'아 이건 내 길이 아니다\' 라는걸 느꼈습니다.

    체격과 상관없이 몸싸움엔 자신있었는데, 무슨 돌덩이에 부딫히는 느낌.. 근데 그 돌이 엄청 빨라.. 근데 그 돌이 기술도 좋아.. ㅡㅡ;;
    세계구조
    그래서 조병국은 결국 국대였잖습니까? 빅리거들은 그럼 어떤거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어렸을때 바둑을 뒀었고 동생도 프로기사로 활동하고 있어서 옛날생각도 나고 그러네요.

    다만...언급하신 재능부족에 관한 부분은 어릴적 글쓴분이 모르는 어른들만의 사정이 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포츠든 바둑이든 승자독식의 성향이 있는 직업들은 언제나 어려운것 같습니다. 공부는 중간이라도 가면 중간만큼 보상받는데 스포츠랑 게임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소설 읽고 링크 따라 유입됐는데 이 글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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