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6/12/06 00:30:57 |
Name | 알료사 |
Subject | Too Much Love Will Kill You |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 어쩐지 내 이야기도 풀어 놓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게 말을 하다 보면 어디까지 나의 사생활을 이야기해야 하나 이런 고민이 있네요. 내 사랑의 대상인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주변 지인이 내가 쓴 글을 읽을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는게 ... 꽤 두렵습니다. 이럴때 대리만족으로 내가 알게 된 다른 사랑 이야기를 소개해 봅니다. 소설입니다. 요약발췌구요, 어떤 작품인지는 마지막에 밝히겠습니다. . . . 영업팀장으로 일하던 '필용'은 일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휘해야 했던 융통성들 - 주로 돈과 관련된 - 이 징계 사유가 되어 감봉 처분과 함께 시설관리팀으로 발령난다. 좌천이었다. . . . 필용은 그때부터 사내 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20분 거리에 있는 맥도날드를 찾았다. 햄버거를 먹다가 맞은편 건물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다.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관객 참여형의 부조리 연극 홍보였다. 필용은 놀랐다. 그것은 16년 전 '양희'가 쓴 대본이었다. 그때는 ㅋㅋㅋ 가 크크크 였다. . . . 양희는 필용의 과 후배였다. 이름과 얼굴만 겨우 알던 사이인데 종로의 어학원에서 같은 강의를 듣게 되었다. 매일 양희와 맥도널드에서 점심을 먹고 두세 시간쯤 대화했다. 필용과 양희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필용이 앞으로 펼쳐질 인생,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가질 수 있는 성취와 인정에 대해 상상하며 지냈다면 양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양희에게는 현재만 있었다. 하지만 그 현재는 생생하고 운동감 있게 펼쳐지는 상태가 아니라 안개처럼 부옇게, 뭔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게 풀풀 흩어지는 거였다. 생활 자체가 그랬다. 강의가 끝나고 맥도날드로 와서 필용이 뭘 먹을까 물으면 양희는 그날 주머이에 있는 돈을 모두 필용에게 주면서 가능한 걸로요, 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공허가 은은히 떠 있는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로. 양희의 손에서 구깃구깃한 천원, 이천원의 지폐가 필용의 손으로 옮겨오던 순간에 필용의 감정은 흔들렸다. 웬만해선 남에게 자판기 커피 한잔 사주지 않던 필용이 자기 돈을 보태 세트 메뉴 두 개를 가지고 올라가곤 했다. 그런다고 양희가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 . . 양희는 필용의 수다를 모두 들어주었다. 필용은 평소에도 허풍이 있는 편이었고 그때는 젊어서 더 심했는데 양희에게는 들킬까 안 들킬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자기 얘기를 했다. 양희는 질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선도 늘 부담스럽지 않게 필용을 비껴 있었다. . . . 양희가 쓰는 "나무는 크크크 하고 웃지 않는다"는 더럽게 재미없는 대본이었다. 양희와 만났던 구 개월 동안 꾸준히, 양희치고는 아주 열심히 썼다. . . . 어느날 양희가 느닷없이 사랑 고백을 했다. 그날도 필용이 자기 이야기에 도취되어 한창 떠들고 있었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양희가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라는 말을 이천원 쥐어주며 햄버거 부탁하던 톤으로 했다. 필용은 당황해서 어어 하고는 웃어버렸다. "사랑하면 어떻게 되지? 사귀나?" "어떻게 되냐구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냐구."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요." (아니... 너가 고백했잖아... ) 양희는 언제나 펑퍼짐한 건빵바지 차림이었고 남자들도 잘 안 입는 국방색 야상을 걸치고 다녔다. 신발은 언제나 운동화에 머리는 언제나 숏커트였고 화장도 안 하는 맨얼굴이었다. 필용도 건장한 이십대여서 언제나 여자가 고팠지만 양희는 아니었다. 여자친구로는 결격사유가 많았다.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필용은 황당했다. "사랑한다며?" "네. 사랑해요." "근데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네." "사랑하는거 맞아?" "네.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필용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가 났다.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피 같은 돈, 어머니가 한강 노점에서 만두를 팔아 쥐어 준 용돈을 보태 점심까지 사먹였더니. 꼬챙이처럼 마른 저 몸 속에, 반쯤 감긴 눈과 꺼칠한 피부와 부러질 듯한 손목과 있는 듯 없는 듯 판판한 가슴에 필용이 몇 달간 보인 선의가 속속들이 들어차 있을 텐데. 필용이 맥도날드를 나가는데도 양희는 잡지 않았다. 종로 거리에는 퀸의 Too much love will kill you 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는 노인들이 지루하게 낮을 견뎠다. 노래와 풍경 사이의 간극이 멀어지면서 필용은 슬퍼졌다. 무언가가 필용의 따귀를 갈기고 지나간거 같았다. . . . 다음날 양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학원에 나왔다. 강의가 끝나고 맥도날드까지 따라와 평소처럼 이천원쯤을 꺼내 선배 가능한 걸로요. 하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필용은 고민했다. 이대로 돈을 가지고 나가버릴까? 여섯 살이나 위인 남자를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줘? 하지만 그건 너무 좀팽이 짓이다. 그러면 양희는 굶겠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굶겠지. 귀찮게 혀를 안 움직여도 되고 안 씹어도 되니 옳다구나 하고 여기 앉아 지루한 대본이나 쓰겠지. 어제보다 더 마르고 쇄약해지는 줄도 모르고 그냥 무기력하게, 배는 고프고 창자는 쓰리구나 하면서 앉아 있겠지. 그래서 필용은 용서했다. 자기 안의 원망과 모욕감을 이겨내고 평소처럼 햄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전날보다 더 대화가 없었다. 필용이 말을 아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양희만 빼고 모든 세상이 흥밋거리였는데 오늘 이렇게 되니 모든 세상에서 양희만이 관심사가 되었다. 양희는 어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는 얼굴로 포장지를 접어내리며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비가 오내요. 하면서. "오늘은 어때? "오늘은 아는 선배가 극을 올려요." "아니 그거 말고." "별일 없는데." "아니 어제 말한 그거. 오늘도 그러냐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필용은 자신이 긴장하는 걸 느꼈다. 왜 긴장하나? 필용은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렇죠. 오늘도." 양희는 무심하게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듣자 필용은 실제로 탁자가 흔들릴 만큼 몸을 떨었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오늘도." . . . 필용은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 . . 그 후 필용의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필용은 유학이고 토플이고 나발이고 오직 양희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종로에 나왔거 맥도날드에서의 만남에 집중했다. 양희는 특별히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대본을 썼고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도 그대로였고 흩어지는 공허를 통해 아우라를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필용은 매일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양희에게 물었다. 물론 그 말만 하지는 않고 여전히 자기 자랑과 세상일에 대해 늘어놓았지만 그게 목적이 아니었다. 사랑하죠, 허스키한 목소리가 공기중에 은은히 흩어지며 맥도널드의 공기를 얼리고 달궜다. 양희와 헤어지면 양희의 한심한 외모, 생기없음, 무기력함, 가난에 대해 경멸했지만 다음날 점심때가 되면 또다시 사랑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장마가 시작되었을 무렵 다른 날과 다름없이 햄버거를 먹으며 앉아 있는데 양희가 깜빡 잊을 뻔했다는 투로, 아 선배 나 안 해요. 사랑. 이라 말했다. "안 해?" "네" "왜?" "없어졌어요." "없어? 아예?" "없어요." "시들해진 거겠지. 그게 어떻게 그렇게 단박에 사라지냐?" 필용은 무심하게 냅킨을 쥐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쓰나미. 실연의 쓰나미. "아닌데. 없는데." "너가 없다고 착각하는 거지. 그런 감정은 일순간에 없어지는게 아냐. 그런 건 찌개가 끓다가 끓다가 나중에 다 졸아서 냄비 바닥이 시커멓게 탈 때까지 계속되는 거야." "아니에요. 없어요." "너 은근히 매력 있어. 나는 너처럼 꾸밈 없고 소박한 애가 좋아." 필용은 인심 쓰듯 말했지만 양희는 반응이 없었다. 양희가 아무 말이 없자 필용은 그때까지 경멸했던 양희의 모든 점들을 유니크한 것, 평가받을 만한 것으로 칭찬했다. 하지만 양희의 <없음>은 달라지지 않았고 필용은 목 매달린 개처럼 헐덕거리면서 양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것들에 대해 사탕발림을 하다가 돌변해 물어뜯기 시작했다. "야 너. 최소한이라도 꾸미고 다녀. 널 위해서 하는 얘기야. 아이고 챙피해서. 젊은 시절 다시 안 와. 좀 있으면 값 떨어져. 그리고 연극도 좋고 가당찮은 대본도 좋은데 밥벌이는 해야지. 애가 어떻게 이천원으로 하루를 뻐대? 야! 나도 어려워! 나도 힘들어! 야이 씨, 너 그동안 나한테 받아먹은거 내놔. 일괄 계산하라고 이 계집애야!" 양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갈수록 필용은 더 심하게 퍼부어댔다. 양희가 맥도날드에서 나간 뒤로도 필용은 자기 말에 취해 마구 떠들다가 뒤늦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거리로 뛰쳐나갔다. 양희는 보이지 않았다. . . . 양희는 어학원에 안 나왔다. . . . 필용은 감기에 걸렸다.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다 말고 돌아와 약이라도 타다 주랴? 했다. 필용은 됐다 했다. 열이 삼십팔 도 넘게 오르고 오한에 떨면서도 병원은 안 갔다. 어머니가 장사에서 돌아와 밀가루 냄새 나는 손으로 필용의 이마를 짚으며 어쩌나, 병원 안 가냐, 하고 안타까워했다. "엄마" "왜" "엄마는 어떻게 나았어? 아플 때." "나 말이냐?" 어머니는 필용의 베개를 돋워주며 자부심 있는 목소리로 하느님이 구하셨지. 그리고 너처럼 잘난 아들도 낳았지. 했다. . . . 며칠 뒤 열이 내리자 필용은 친구에게 차를 빌렸다. 낮부터 내린 비는 그쳤지만 도시 전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갈까 말까 한번 더 생각했다. 과 후배에게 양희는 문산에 있다고 들었다. 거기서 양희네 가족이 오리,거위 농장을 하는데 장마로 피해를 봐서 내려갔다는 것이다. 필용은 가금류에 밀린 셈이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안 갈 수는 없었다. 그럼 문산까지 가서 양희를 만난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건 시작이었다. 연애와 사랑, 연민, 속박, 약속, 의무, 섹스의 시작이었다. 필용은 난생처음 무모함에 대해 생각했고 시동을 걸었다. 퀸의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를 들으며 가속 패달을 밟았다. 해보겠다. 말하겠다. 너의 허스키를 사랑해. 너의 스키니를 사랑해. 너의 가벼운 주머니와 식욕 없음을 사랑해. 너의 무기력과 허무를 사랑해. 너의 내일없음을 사랑해... . . . . . . . 2016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 중 일부입니다. 필용이는 무작정 차를 몰아 양희를 만납니다. 하지만 거기서 만난다고 뭐가 달라질게 있을까요? 양희 그 멋없는 아이가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릴까요? 개인적으로 무언가 갖추어진 사랑을 하기가 힘들더구요. 그래서 그냥 이거 저거 다 포기하고 제 한몸 건사하는 걸로 만족하고 사는데 이상하게 그럴 때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대 안하는데 찾아오는, 사랑이라기엔 좀 부족한 어떤 좋은 느낌. 그런데 거기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또 틀어지고 찌질해지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하지만 용서하려 해요, 언제나 서투른 나 자신을. 조금 더 나를 격려하고 무거운건 내려 놓고 시선을 옆으로 돌려 보고 쉬어 갑니다. 그렇게 다시 힘을 내서 냉소하기보다는 따뜻하게 미소 한번이라도 인사 한번이라도 더 건네고 싶으니까요.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