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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6/24 07:36:45 |
Name | 뤼야 |
Subject |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박가분 그리고 장정일 |
평소에 가라타니 고진을 자주 인용하여 가라타니 고진 전문가쯤으로 행세하는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아마도 이야기의 최초 발단이 아닌가 싶네요. 작가 장정일은 더 이상 소설은 발표하고 있지는 않지만 [독서일기]시리즈나 [장정일의 공부] 등의 책을 통해 자신이 읽은 책의 서평 등을 모아 펴내왔죠. 저는 그의 책읽기 스타일을 좋아해서 [독서일기]를 쭉 보고 참고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조영일이 펴낸 평론집 [세계문학의 구조]라는 책에 대해 장정일이 비판하고 나선 일이 생깁니다. 2011년도의 일입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기사를 아래 링크합니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76 장정일의 기고를 대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이란 민족국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근대 민족국가는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하여 문학이 필요했겠지요. 근대문학은 '민족국가 만들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주조(세뇌)하고 국어 확립에 일조하는 동시에, 국가에 대한 비판자 구실을 하게됩니다. 그럼 지금의 사정은 어떨까요? 민족국가가 전 세계 규모에서 완수되고, 문학 자체가 대학(국가)이나 출판 제도(자본)에 포획된 오늘에는 근대문학이 지탱될 수 없겠지요. 가라타니 고진은 민족국가 체제의 지구적 성립과 더불어 문학의 정치적 구실도 소진했다면서,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게 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참으로 많이 응용되고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이제 '문학이 끝났다'는 선언이 절대 아닙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근대문학을 넘어선 문학의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지요. 한편 조영일는 자신의 책 [세계 문학의 구조]를 통해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장정일에 따르면 이것은 반복이지만 높은 차원이 아닌 저열한 반복에 그치고 말죠. 평소에 가라타니 고진을 들먹이지 못해 안달하면서 가라타니 고진에게 이렇게 빅엿을 먹이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저는 조영일을 싫어하기 때문에(문학에 신경숙이 있다면 비평계에는 조영일이 있지요) 이 책을 읽지는 않았는데, 대략 장정일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국가를 국가답게 만드는 가장 뛰어난 서사가 '전쟁 서사'라는 것은 상식이 된 지 오래이므로, 조영일의 논리가 우승열패의 제국주의 논리라는 것은 굳이 지적하지 않겠다. 다만 정규군이 나서야만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영일의 순진함이다. 총포가 동원되지 않는 의식 속의 전쟁을 신채호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역사의 원리로 정식화했고, 나쓰메 소세키는 그것을 실제의 전쟁에 뒤지지 않는 '평화 전쟁'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피아의 구별과 대치만으로도 근대국가나 근대문학을 조성하는 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우스꽝스럽게도 이 논쟁에 박가분이 끼어듭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서울대 운동권 핵심인물중 하나인 제 지인이 박가분을 직접 만나 그와 좋은 시간(?)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몇년전에 박가분의 블로그에서 문학서평 하나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말도 못하게 한심한 서평이라 뭐라 반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까줘야할지 모를 정도였지요. 그런 그가 이 논쟁에 끼어들고 장정일에게 '지적 사형선고'를 내리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지인의 소식이 결코 달갑지 않았지요. 다 좋습니다. 장정일의 주장이 그른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무지하여 조영일이라는 문학비평의 천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지적 사형선고'를 내리겠다고 선언하다니, 좌파진보논객으로 불리우는 그의 오만함은 과연 어디까지였을까 새삼 소름이 끼쳐오더군요. 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이 좌파논객의 추락은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어제 잠자리에 들기전에 정말 수년만에 그의 블로그에 가보았습니다. 역시나 오만방자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더군요. 데이트폭력 사건이 알려지고 난 후, 한윤형의 전 여자친구였던 문일요씨도 저와 한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문일요씨의 이야기는 지인을 통해 여러번 들을 적이 있는데, 그녀가 한윤형의 전여자친구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가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한때 맑시즘에 경도된 적이 있는 제 애인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제가 한창 블로그를 열심히 하던 시절에 제 애인이 제 블로그에 들러 제가 남긴 서평에 건방지기 짝이 없는 덧글을 하나 남겼습니다.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애인이 제게 그때의 일을 아주 많이 미안해 합니다. 자신의 이해가 부족했다 순순히 시인하더군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자세.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그 자세에 오만함이 묻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법칙을 들먹이며 개개인을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중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제가 매우 좋아하는 소설인 [영혼의 산]의 작가인 가오싱젠은 그의 책 [창작에 대해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작가는 정치적 간섭을 넘어서 인간 삶의 곤경을 증언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특정한 정치의식에 매이지 않아야하고, 사회정의라는 추상성에 매달려서도 안된다. 작가는 도덕주의의 화신이 아니며, 법관도 아니다. 광기에 싸인 구세주 노릇도, 자기연민도 작가의 본연은 아니다. 문학은 개인이 사회라는 커다란 흐름에 대항하는 방식인 것이지요. 또한, 얼마전에 완독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문학이 이데올로기나 사회질서의 회유에서 출발한다면, 문학의 문제는 얼마나 잘못 제기된 것인가. 사람들은 회유되지만, 작품들은 회유되지 않는다. 언제나 작품들은 잠든 새 젊은이를 찾아내어 그의 잠을 깨울 것이요, 또 작품들의 불을 끊임없이 더 멀리 가져가고 있다. (중략)위대한 작가는 자기 작품의 정통적/전제군주적 기표를 갈라지게 하며 지평선에 있는 혁명 기계를 필연적으로 부양하는 흐름들을 그려내고 흐르게 하기를 마지않는 자다. 이것이 문체요. 또는 차라리 문체의 부재, 즉 탈통사론, 탈문법성이다. (중략) 오히려 언어 활동은 언어를 흐르게 하고 유통시키고 또 폭발시키는 것, 즉 욕망에의해 규정된다. 왜냐하면 문학은 전적으로 분열증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요. 생산이지 표현이 아니다. 캬~ 들뢰즈 진짜 멋있지 않나요? 크크크 근데 죽었어요. ㅠㅠ 제가 멋있어 하는 남자들은 어째 죄다 유부남이거나 죽었거나 한 걸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남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떠벌리는(그것도 저열한 방식으로) 문학평론가와,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거칠고 조악한 자신의 잣대를 함부로 휘두르는 좌파지식인이 앞으로 어떤 말을 지껄이며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보일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아침에는 기분좋은 이야기로 시작해야 하는데 써놓고 나니 죄송하네요. 문학덕후가 또 아침부터 열받아서 손가락운동질을 시작했구나 하고 가볍게 받아들여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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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sns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한윤형이 나중에 이 문제에 한마디 남겼다는 사실만 알고 나머지는 알지 못해요. 다만 로쟈가 이 문제에 대체적으로 균형잡힌 비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링크를 못찾겠네요. 저는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좋아하긴 하는데 저와 생각이 다를 때도 많아요. 다만 장정일은 솔직하긴 하죠. 재밌는 건 제가 장정일의 글 중 가장 안좋게 생각했던 한 책의 서평에 대해 올린 글에 애인이 최초로 제 블로그에 족적을 남겼었죠. 말하자면 장정일을 까다가 애인을 알게 된거죠. 물론 그의 생각은 장정일하고는 또 다른 궤에 있었지만요. 크크크 사람일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잣대를 함부로 휘두르는 모든 사람이 좌파는 아니겠지만 문학과는 척을 질 수 밖에 없다고는 생각합니다. 일단 좌든 우든 인간의 모든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지요. 들뢰즈가 좌파지식인들에게 비판받는 지점도 들뢰즈 철학의 기본 방향이 구조적이라기보다 탈구조적이기 때문이고요. 음... 제 지인의 경우 자기 잣대를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은 전혀 아니에요. 저를 대할 때, \"너는 너만의 세계가 있고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쯤 되는 방식이고, 저는 \"너는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선언적 ... 더 보기
자신의 잣대를 함부로 휘두르는 모든 사람이 좌파는 아니겠지만 문학과는 척을 질 수 밖에 없다고는 생각합니다. 일단 좌든 우든 인간의 모든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지요. 들뢰즈가 좌파지식인들에게 비판받는 지점도 들뢰즈 철학의 기본 방향이 구조적이라기보다 탈구조적이기 때문이고요. 음... 제 지인의 경우 자기 잣대를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은 전혀 아니에요. 저를 대할 때, \"너는 너만의 세계가 있고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쯤 되는 방식이고, 저는 \"너는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선언적 인간] 내가 못하는 것을 해주어 고맙다\" 이쯤의 입장이죠.
아마도 오로지님이 박가분과 개인적 친분이 있으신 듯한데, 그의 자아가 그의 글 속에서 너무 비대해진 느낌입니다. 막상 만나보면 그렇지 않다니 작금의 사태가 더 안타깝구요.
그리고 오로지님이 말씀하신대로 학자들의 라벨링에 관한 문제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아카데미(인문학)와는 상관없이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실험실에서 토해가며 유기화학실험한 기억밖에는 없어요. 인문학계의 잘못된 관행은 자생된 어떤 담론도 없이 그저 라벨링에만 열중하는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오로지님의 고귀한 공부를 응원합니다.
경험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오로지님이 박가분과 개인적 친분이 있으신 듯한데, 그의 자아가 그의 글 속에서 너무 비대해진 느낌입니다. 막상 만나보면 그렇지 않다니 작금의 사태가 더 안타깝구요.
그리고 오로지님이 말씀하신대로 학자들의 라벨링에 관한 문제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아카데미(인문학)와는 상관없이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실험실에서 토해가며 유기화학실험한 기억밖에는 없어요. 인문학계의 잘못된 관행은 자생된 어떤 담론도 없이 그저 라벨링에만 열중하는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오로지님의 고귀한 공부를 응원합니다.
경험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교점은 존재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까뮈만 해도 훌륭한 운동권이던 시절도 있었구요. 샤르트르는 훌륭한 문학가죠. 그렇지만 운동을 함께 할수는 있더라도, 서로간에 닿을 수 없는 지점은 존재한다고 봅니다. 문학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문학에는 있다고 봐요. 그걸 인정하는 순간 운동이 흔들리고, 그걸 인정하지 않는 순간 문학의 가치 중 하나가 사라지는 상충지점에서 둘은 반목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을 읽을 때는 문학가나 운동권의 차이가 감춰질 수 있겠지만, 까뮈의... 더 보기
당연히 교점은 존재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까뮈만 해도 훌륭한 운동권이던 시절도 있었구요. 샤르트르는 훌륭한 문학가죠. 그렇지만 운동을 함께 할수는 있더라도, 서로간에 닿을 수 없는 지점은 존재한다고 봅니다. 문학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문학에는 있다고 봐요. 그걸 인정하는 순간 운동이 흔들리고, 그걸 인정하지 않는 순간 문학의 가치 중 하나가 사라지는 상충지점에서 둘은 반목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을 읽을 때는 문학가나 운동권의 차이가 감춰질 수 있겠지만, 까뮈의 전락을 읽을 때 운동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거야, 어차피 삶이 개같으니까 아무것도 하지말자는거냐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또 운동하는 사람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을 때는 어떨까요. (초등학생인)롤리타와 관계를 맺고, 롤리타가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때 다시 관계를 하겠다라는 문장에서 책을 덮지 않을까요? 혹은 해당 소설은 유아성도착자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며 비난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방탕한 미국에 대한 비판이 숨겨져 있다라는 식의 허무맹랑한 평론을 늘어놓겠죠. 본문에 나온 좌파지식인이 초등학생인 아이와 섹스를 하고 싶을수도 있다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운동하는 사람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을 때는 어떨까요. (초등학생인)롤리타와 관계를 맺고, 롤리타가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때 다시 관계를 하겠다라는 문장에서 책을 덮지 않을까요? 혹은 해당 소설은 유아성도착자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며 비난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방탕한 미국에 대한 비판이 숨겨져 있다라는 식의 허무맹랑한 평론을 늘어놓겠죠. 본문에 나온 좌파지식인이 초등학생인 아이와 섹스를 하고 싶을수도 있다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제 글이 레이드님께 그렇게 읽혔다면 제가 글솜씨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박가분이 내린건 문학적 사형선고가 아니고 \'지적 사형선고\'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시면 좋겠습니다.
문학적 사형선고는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거고, 만약 박가분이 그런 것을 내렸다면 저는 이것보다 더 세게 그를 비난했겠지요.
제가 박가분이 좌파라고 해서 좌파가 답이 없다고 읽으셨다면 오해입니다만,
문학의 존재론과 좌파의 존재론이 분명 평행선이라는 것은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만약 이 둘을 구분할 수 없다면, 그는 문학을 제대로 모르거나,... 더 보기
박가분이 내린건 문학적 사형선고가 아니고 \'지적 사형선고\'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시면 좋겠습니다.
문학적 사형선고는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거고, 만약 박가분이 그런 것을 내렸다면 저는 이것보다 더 세게 그를 비난했겠지요.
제가 박가분이 좌파라고 해서 좌파가 답이 없다고 읽으셨다면 오해입니다만,
문학의 존재론과 좌파의 존재론이 분명 평행선이라는 것은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만약 이 둘을 구분할 수 없다면, 그는 문학을 제대로 모르거나,... 더 보기
음... 제 글이 레이드님께 그렇게 읽혔다면 제가 글솜씨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박가분이 내린건 문학적 사형선고가 아니고 \'지적 사형선고\'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시면 좋겠습니다.
문학적 사형선고는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거고, 만약 박가분이 그런 것을 내렸다면 저는 이것보다 더 세게 그를 비난했겠지요.
제가 박가분이 좌파라고 해서 좌파가 답이 없다고 읽으셨다면 오해입니다만,
문학의 존재론과 좌파의 존재론이 분명 평행선이라는 것은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만약 이 둘을 구분할 수 없다면, 그는 문학을 제대로 모르거나, 좌파의 이론에 밝지 않다고 여깁니다.
굳이 들뢰즈나 가오싱젠, 까뮈, 콜린 윌슨 등 수많은 문학의 이론가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입니다.
문학에도 운동권 사고가 들어있다고 하셨는데, \'운동권 사고\'라는 것이 위에 가라타니 고진이 이야기하는
근대문학의 도구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문학은 프로파간다가 아닙니다.
제 지인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녀는 서울대 운동권의 핵심 브레인입니다. 이론가지요.
그녀가 문학적 감수성이 없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녀는 약관의 나이에 세상에 이름을 알린 사람이지요.
그녀는 문학의 존재론을 깊이 깨우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이론과 등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맑스를 선택한 겁니다.
저는 그녀를 존중하고, 그녀가 답이 없다고 생각해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박가분이 내린건 문학적 사형선고가 아니고 \'지적 사형선고\'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시면 좋겠습니다.
문학적 사형선고는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거고, 만약 박가분이 그런 것을 내렸다면 저는 이것보다 더 세게 그를 비난했겠지요.
제가 박가분이 좌파라고 해서 좌파가 답이 없다고 읽으셨다면 오해입니다만,
문학의 존재론과 좌파의 존재론이 분명 평행선이라는 것은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만약 이 둘을 구분할 수 없다면, 그는 문학을 제대로 모르거나, 좌파의 이론에 밝지 않다고 여깁니다.
굳이 들뢰즈나 가오싱젠, 까뮈, 콜린 윌슨 등 수많은 문학의 이론가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입니다.
문학에도 운동권 사고가 들어있다고 하셨는데, \'운동권 사고\'라는 것이 위에 가라타니 고진이 이야기하는
근대문학의 도구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문학은 프로파간다가 아닙니다.
제 지인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녀는 서울대 운동권의 핵심 브레인입니다. 이론가지요.
그녀가 문학적 감수성이 없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녀는 약관의 나이에 세상에 이름을 알린 사람이지요.
그녀는 문학의 존재론을 깊이 깨우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이론과 등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맑스를 선택한 겁니다.
저는 그녀를 존중하고, 그녀가 답이 없다고 생각해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단순한 문학계와 운동권의 당파성으로 말미암을 것이라면 본문과 (특히 논지가 구체화되는 뤼야님과 할머님의)덧글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문학과 정치 참여의 영역을 구획할 때 본문 속에서 끌어오는 계기는 \'철부지 좌파논객\'이 아니라 그 논객을 한다리 건너 알고 지낸다는 지인분이고, 이를 통해 문학인과 운동권은 사고의 베이스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걸 지시할 뿐이죠. 그 차이에 대해 할머님이 댓글란에서 풀이하고 있고요.
여기서야 문학과 좌파라고 하지만, 사실 정치/사상/이념에 대한 예술적 반영에 대한 논쟁은 인류와 예술의 오랜 역사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이에서 미적 의식과 정치 의식 사이의 범주가 구획되거나, 그 구획 자체가 문제시되거나 했구요.
여기서야 문학과 좌파라고 하지만, 사실 정치/사상/이념에 대한 예술적 반영에 대한 논쟁은 인류와 예술의 오랜 역사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이에서 미적 의식과 정치 의식 사이의 범주가 구획되거나, 그 구획 자체가 문제시되거나 했구요.
콜라에는 페놀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두산이 페놀을 낙동강에 몰래 흘려보냈을 때 활동가들이 두산이 만든 코카콜라에 페놀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봤는데요. 이 말을 문학가가 문학의 형식으로 말하면 브루주아민주주의 차원에서는 문학가가 자기 저술을 저지당할 가능성이 없어요. 하지만 같은 말을 활동가가 하면 소송 당할겁니다.
혁명가가 시인의 말을 할 때는 각오하고 하는겁니다. 시인을 동원할 수는 없지만 시어를 동원할 수 있어요. 이 때 시인은 혁명가의 말을 반복함으로써 이 시어를 문학의 천상세계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위험한 존재죠. 어떻게 이 세계로 끌어 내린건데 말이죠.
두산이 페놀을 낙동강에 몰래 흘려보냈을 때 활동가들이 두산이 만든 코카콜라에 페놀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봤는데요. 이 말을 문학가가 문학의 형식으로 말하면 브루주아민주주의 차원에서는 문학가가 자기 저술을 저지당할 가능성이 없어요. 하지만 같은 말을 활동가가 하면 소송 당할겁니다.
혁명가가 시인의 말을 할 때는 각오하고 하는겁니다. 시인을 동원할 수는 없지만 시어를 동원할 수 있어요. 이 때 시인은 혁명가의 말을 반복함으로써 이 시어를 문학의 천상세계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위험한 존재죠. 어떻게 이 세계로 끌어 내린건데 말이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지적 사형선고라는 걸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참 오만하네요.
\'지적 사형선고\'의 원조 사르트르도 그 예후가 좋지 못했는데 말이죠. 레비스트로스한테 탈탈 털렸죠.
일전에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를 보다가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던 적이 있어 책을 덮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관련된 이야기를 접하지 않아서 장정일이나 박가분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몰랐네요.
좌파와 문학가가 평행선을 달린다는게 어떤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좌파... 더 보기
\'지적 사형선고\'의 원조 사르트르도 그 예후가 좋지 못했는데 말이죠. 레비스트로스한테 탈탈 털렸죠.
일전에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를 보다가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던 적이 있어 책을 덮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관련된 이야기를 접하지 않아서 장정일이나 박가분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몰랐네요.
좌파와 문학가가 평행선을 달린다는게 어떤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좌파... 더 보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지적 사형선고라는 걸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참 오만하네요.
\'지적 사형선고\'의 원조 사르트르도 그 예후가 좋지 못했는데 말이죠. 레비스트로스한테 탈탈 털렸죠.
일전에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를 보다가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던 적이 있어 책을 덮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관련된 이야기를 접하지 않아서 장정일이나 박가분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몰랐네요.
좌파와 문학가가 평행선을 달린다는게 어떤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좌파는 ISM, 그러니까 대의, 거대담론,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이야기하지만,
문학은 그렇지가 않죠.
신형철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쓴 글을 한번 가져와봅니다.
왜 서사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들이 있다.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판단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에만 겨우 얻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리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지적 사형선고\'의 원조 사르트르도 그 예후가 좋지 못했는데 말이죠. 레비스트로스한테 탈탈 털렸죠.
일전에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를 보다가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던 적이 있어 책을 덮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관련된 이야기를 접하지 않아서 장정일이나 박가분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몰랐네요.
좌파와 문학가가 평행선을 달린다는게 어떤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좌파는 ISM, 그러니까 대의, 거대담론,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이야기하지만,
문학은 그렇지가 않죠.
신형철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쓴 글을 한번 가져와봅니다.
왜 서사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들이 있다.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판단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에만 겨우 얻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리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저는 사실 박가분이 이름을 알려서 책을 내기 전에 그가 관심을 가졌던 대륙철학과 관련된 글을 보러 종종 들르곤 했습니다. 특히나 쟈크 랑시에르에 관한 그의 해석은 무척이나 탁월해서 그의 글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길이 뜸해지게 되었죠. 그가 유명세를 얻고 책을 내고... 그동안 소식을 전혀 모르다가 지인을 통해 박가분이 펴낸 책과 그를 만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정일과의 논란도 알게 되었죠. 그때 제가 얼마나 분개했는지 제 애인은 압니다. 그의 오만방자함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박가분의 말이 옳고 ... 더 보기
저는 사실 박가분이 이름을 알려서 책을 내기 전에 그가 관심을 가졌던 대륙철학과 관련된 글을 보러 종종 들르곤 했습니다. 특히나 쟈크 랑시에르에 관한 그의 해석은 무척이나 탁월해서 그의 글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길이 뜸해지게 되었죠. 그가 유명세를 얻고 책을 내고... 그동안 소식을 전혀 모르다가 지인을 통해 박가분이 펴낸 책과 그를 만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정일과의 논란도 알게 되었죠. 그때 제가 얼마나 분개했는지 제 애인은 압니다. 그의 오만방자함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박가분의 말이 옳고 그름은 제 안중을 떠났죠. 흐흐흐 제가 다혈질이라서요. 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지요. 활동가들은 \'역사는 당연히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는 당위를 내세웁니다. 제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저는 그 어떤 당위에도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이라서인듯 싶습니다. 항상 주신 글 감사히 읽습니다.
오 맞습니다.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야말로 \'근대문학\'의 종언이죠. 선비님의 지적이 온당합니다. 마르코폴로님 말씀대로 이것은 단지 \'근대문학\'의 종언일뿐, 고진의 주장은 \'문학전체의 죽음\'을 이름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드린다는게 비약이 되어버렸네요.
기사에 따르면 장정일은 고진을 읽으면서 더욱 강렬하게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고진이 이야기한 \'사소설\' 이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문학을 대신함에서 장정일이 읽어낸 이야기겠지요.
누군가에게 지적을 당할 줄 알았는데... 더 보기
기사에 따르면 장정일은 고진을 읽으면서 더욱 강렬하게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고진이 이야기한 \'사소설\' 이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문학을 대신함에서 장정일이 읽어낸 이야기겠지요.
누군가에게 지적을 당할 줄 알았는데... 더 보기
오 맞습니다.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야말로 \'근대문학\'의 종언이죠. 선비님의 지적이 온당합니다. 마르코폴로님 말씀대로 이것은 단지 \'근대문학\'의 종언일뿐, 고진의 주장은 \'문학전체의 죽음\'을 이름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드린다는게 비약이 되어버렸네요.
기사에 따르면 장정일은 고진을 읽으면서 더욱 강렬하게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고진이 이야기한 \'사소설\' 이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문학을 대신함에서 장정일이 읽어낸 이야기겠지요.
누군가에게 지적을 당할 줄 알았는데 당하고 나니 오히려 후련합니다.
아침에 잠도 안깬 상태에서 글을 쓰고는 일하다 점심시간에 보니
이게 고진이야기인지, 문학의 존재론 이야기인지, 박가분 너 두고보자는 이야기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가더라고요.
결론은 세개다 실패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흐흐흐
조영일의 책은 저도 읽지 않았습니다. 기사내용만을 보자면 \'세계문학\'의 선언은 고진이 아니라 조영일이 하고 있는 것 맞지요.
선비님의 이야기가 다 맞습니다. 그런데 장정일이 여기에서 문제시 삼는 것은 이게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열등하게 반복한 것,
그 반복이라는 게 우리의 근대문학이 망한(?) 것은 바로 우리에게 국민작가가 없는 것, 국민작가가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전쟁의 경험이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먹이고 있는 지점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였죠. 기사에서 장정일이 조영일을 비판하는 지점에 대해 제가 충분히 공감했고 박가분과의 논쟁은 sns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내용을 잘 모릅니다.
다만, 그 논쟁이 내용이 어떤 것이든 논쟁의 상대에게 \'지적 죽음\'을 선언했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화가 났었다는 이야기를 쓴다는게 비약이 심한 글만 남았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기사에 따르면 장정일은 고진을 읽으면서 더욱 강렬하게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고진이 이야기한 \'사소설\' 이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문학을 대신함에서 장정일이 읽어낸 이야기겠지요.
누군가에게 지적을 당할 줄 알았는데 당하고 나니 오히려 후련합니다.
아침에 잠도 안깬 상태에서 글을 쓰고는 일하다 점심시간에 보니
이게 고진이야기인지, 문학의 존재론 이야기인지, 박가분 너 두고보자는 이야기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가더라고요.
결론은 세개다 실패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흐흐흐
조영일의 책은 저도 읽지 않았습니다. 기사내용만을 보자면 \'세계문학\'의 선언은 고진이 아니라 조영일이 하고 있는 것 맞지요.
선비님의 이야기가 다 맞습니다. 그런데 장정일이 여기에서 문제시 삼는 것은 이게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열등하게 반복한 것,
그 반복이라는 게 우리의 근대문학이 망한(?) 것은 바로 우리에게 국민작가가 없는 것, 국민작가가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전쟁의 경험이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먹이고 있는 지점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였죠. 기사에서 장정일이 조영일을 비판하는 지점에 대해 제가 충분히 공감했고 박가분과의 논쟁은 sns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내용을 잘 모릅니다.
다만, 그 논쟁이 내용이 어떤 것이든 논쟁의 상대에게 \'지적 죽음\'을 선언했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화가 났었다는 이야기를 쓴다는게 비약이 심한 글만 남았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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