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6/10/18 05:46:53 |
Name | 팟저 |
Subject | 문학과 문학성 |
뮤지션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에 관한 시시비비를 듣고 말하는 와중 대상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이해와 태도의 차이 때문인지 이야기가 자꾸 겉도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럼에도 서로 합의할만한 지점은 있으니 [문학상은 문학성을 평가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놈의 위화감에 대해 떠들려면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이조차 부정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이 글이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지점이 아닌 만큼 배제해도 무방할 겁니다. 1. 문학성을 추구하는 게 문학이다 2. 문학이 추구하는 게 문학성이다 1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뮤지션의 문학상 수상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을 겁니다. 그 문학성을 뭐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허나 2번에게라면 논의의 여지도 없지요. 앞뒤를 뒤집은 두 진술이 특정 사례 앞에서 극단적인 입장 차를 보이는 건 여기 시간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1번이 의식적인 플라톤주의자만을 가리키지 않는 이유인데요. 하지만 '의식적인'이란 수사를 굳이 붙이는 건, 또한 시간 때문이지요. 문학적 이데아로서 문학성을 개별 사례의 집합인 문학보다 앞서 상정하는 이들을 생각해봅시다. 이 부류를 의식적 플라톤주의자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의 '문학성'에 시간은 개입하지 않지요.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건 개별 작품이 자신의 문학성에 부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이지, 그 문학성에 대한 회의가 아닙니다. 한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문학(이란 사례)의 변화에 따라 문학성을 재구성한다면 그를 의식적 플라톤주의자라고 말하긴 어렵겠죠. 편의상 그중 1번에 해당하는 이들을 역사주의자라 부르겠습니다. 역사주의자는 문학이 추구했고 추구하는 것에 비추어 문학성을 사유합니다. 그들에겐 기원전의 문학도, 18세기의 문학도 문학이며 그 각자의 관계는 비교적 동등합니다. 역사주의의 문학 개념에서 과거의 문학들은 오늘날의 문학을 경유하지 않고도 문학성과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맺습니다.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을 두고 호메로스와 사포를 언급했다는 스웨덴 한림원은 이 역사주의에 해당할 겁니다. 모두 2번과 무관한 이야기죠. 2번에게 과거의 문학과 현대의 문학은 동등하지 않습니다. 과거 문학은 현대 문학의 기반에 불과하며, 결코 그 문학성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문학성이란 현대 문학의 문학성이지 문학이 추구했던 것과는 무관합니다. 역사주의에 있어 과거의 문학은 의문의 여지없이 문학이지만 이들에겐 그저 '문학이었던 것'이죠. 이들의 세계에서 개별 작품이 문학이냐 아니냐는 오늘날 문학이란 이름으로 향유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지 않은 과거의 문학이라면? 문학이 아닙니다. 과거의 문학에서 오늘날의 문학성을 찾으며 이를 문학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역사주의의 태도는 이들에게 키치일 뿐입니다. 기저에 깔린 태도며 역사주의에 대한 입장 등을 고려하여 이들을 구조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네, 위 도식에 비춘다면 전 구조주의자입니다. 스스로 구조주의자라고 하다니 참 기분 더러운데 달리 적당한 표현이 없으니 별수 없네요. 제게 밥 딜런은 문학이 아닙니다. 문학성이란 말을 쓴다면 그것이 철저히 문학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문학(혹은 문학이었던 것)과 유비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가당할 겁니다. 그 점에 한정한다면 밥 딜런은 문학성을 갖습니다. 영화 버드맨이나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그런 정도로요. 실제 문학 작품과 비교한다면? 차라리 귀여니 소설이 밥 딜런의 노래보다 더 문학적일 겁니다. 적어도 귀여니가 쓰는 이모티콘은 문자 매체의 표현 가능성 중 하나니까요. 단지 그녀가 넓힌 지평은 일시적 유행으로 끝났고 선택받지 못했을 뿐이죠. 반면 밥 딜런의 노랫말 어디를 읽어봐도 거기엔 멜로디도, 발성도 없습니다. 밥 딜런의 노래를 그 가사에 한정하여 접근하는 건 그 작품에 대한 온전한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죠. 설혹 일정한 목적을 위해 그 관심 대상을 한정한다고 할지언정, 이는 음악의 영역이지 문학의 영역이라고 할 순 없지요. 귀여니 소설에 적당한 리듬감과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 만든다고 생각해보죠. 없는 멜로디를 만들어 넣는 것 이전에 그 이모티콘은 인간의 구강 구조로 표현이 불가능하니 모두 떨어져나갈 겁니다. 밥 딜런을 문학으로 즐긴다는 건 그런 겁니다. 역사주의자들이라면 중세 시대까지 구전 문학이나 곡조가 붙었을 서사시를 근거로 들지 모르겠네요. 스웨덴 한림원이 호메로스와 사포의 사례를 든 것처럼요. 허나 말했다시피 제게 이는 문학이었던 것일 뿐입니다. 밥 딜런의 문학상 수상은 사진의 회화상 수상과 다를 바 없어요. 호메로스와 사포? 과거의 특정 시점, 회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현실의 모사였다는 점을 들어 그 기능을 실제로 구현했으니 사진을 두고 회하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습니다. 사진이 회화보다 덜 떨어진 예술이란 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현대 회화계가 그리 기능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엄연히 회화와 사진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기능합니다. 둘을 같은 미술로 묶을 수 있을지언정 둘은 같지 않아요. 임의의 관점 속 공통점이 존재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요. 아, 앤디 워홀 같은 사례가 있으니 이쯤에서 제 이야기가 '역사주의적 논거로 밥 딜런을 문학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걸 강조하고 넘어가야겠네요. 앤디 워홀을 회화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위에서 말했듯 적어도 그 근거를 논할 때 과거 회화의 기능이었던 현실의 모사 따위를 운운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하지만 밥 딜런은 그렇지 않죠. 밥 딜런에게 문학적 의의라는 게 있다면 그건 철저하게 과거 문학, 혹은 기존 문학과 유비성 하에서 성립합니다. 그러니 그의 문학상 수상은 세평과 달리 파격이 아닙니다. 반면 앤디 워홀은? 화가로서 그에 대한 판단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회화의 틀을 부수고 그 지평을 넓혔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죠. 파격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고요. 밥 딜런도 넓히기야 넓혔죠. 시적 가사를 통해 포크송에 대한 인식을 유행가에서 파인 아트에 버금가는 무언가로 끌어올렸죠. 헌데 그가 넓힌 건 문학의 지평이 아니라 음악의 지평이라는 게 문제죠. 몇세기 전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밥 딜런이 문학이었을 수 있겠죠. 그 특성상 악보에 적히기보단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거나 편집되더라도 노랫말 위주로 전해졌을텐데 그런 식으로 전해졌다면 분명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판소리를 비롯한 구전 문학이 그러하듯요. 하지만 지금은 21세기고, 밥 딜런은 20세기에 활동했으며, 그의 예술은 LP와 테이프, CD, 음원 등을 통해 전해집니다. 거기엔 멜로디와 목소리가 담기죠. 매체가 달라진 겁니다. 매체의 변화는 당연히 예술의 변화도 추동하죠. 산업 체계를 바꾸고 이는 향유 방식을 엎어버리는걸요. 사진기의 발명이 회화를 바꾸었단 건 중등 미술 교과서에도 실리는 상식입니다. 문학이라고 여기서 자유롭진 못하죠. 단지 기보법의 발전과 민스트럴의 존재로 인해 그 과정이 회화만큼 극단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뿐, 레코더의 발명은 그 전후의 문학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노벨상 수상 리스트만 봐도 알 수 있죠. 시인의 수가 줄고 있습니다. 운문 문학이 단일하고 독립된 장르로 남아있으며 창작 시집이 근래에도 활발히 출판되며 일군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는 몇 되지 않습니다. 한국은 그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고요. 비슷하게 희곡가도 줄어드는 추세죠. 영화의 등장으로 연극 무대가 좁아졌으며 그 변천 과정에서 희곡과 달리 시나리오는 문학의 범주에서 상당히 멀어졌으니까요. 그럴 수밖에요. 희곡과 달리 시나리오는 독립된 예술로서 향유되지 않습니다. 장르가 갖는 한계로 인해 연극을 무대 위에서 즐기는 건 그 향유층들 사이에서도 제한된 경험이었고, 따라서 음유시인의 노랫말을 채집하여 훑던 것처럼 무대 밖에서 희곡을 읽는 이들은 많았지만 영화는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특성으로 말미암아 영화는 시나리오에서 굉장히 자유로운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예... 근년간 노벨 문학상 수상 리스트 대부분은 산문 문학, 소설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장 좀 보탠다면 오늘날 세계 문학계는, 세계 소설 장르 업계라고 일컬어도 무리가 없어요. 보편적이고 유의미한 교류가 일어나며 그 교류 속에서 장르내적 발전이 추동되고 이 단일한 계가 근시일 내에 별다른 부침 없이 유지되리라고 단언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 장르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되지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과거 운문 문학의 특징이며 고유의 미감을 표현한다며 평가받던 양식이며 장치들의 형성 및 변화 양상은, 정작 운문 문학보다 포크나 랩과 같은 음악 장르에서 더욱 잘 드러나죠. 아마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는 제 아무리 역사주의자라고 한들 운문 문학을 문학이라고 할 수 없게 될지 모릅니다. 희곡으로 말미암아 과거 분명 문학의 범주였던 대본/각본이, 영화의 발전으로 그 취급이 모호해졌듯 말이죠. 적어도 예전과 같은 것, 좀 더 정확히 말해 음악의 영역으로 들어간 게 문학으로서 창작되며 향유되진 않을 겁니다. 아니, 이미 그렇죠. 이러한 맥락 위에서 스웨덴 한림원의 결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일부 운문 문학 및 구전 문학의 전통을, 호메로스와 민스트럴, 판소리 등을 이미 멸종된 과거의 문학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거겠죠. 음원이 박제일 뿐인 노랫말조차 쓰인 말이 아니냐는 핑계로요. 하여 어떤 분들은 '너무 늦었다'고 말씀하시는 거고요. 물론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너무 늦은 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걸 돌려보겠다며 억지 쓰는 격입니다. 음악은 문학이 아니에요. 그 지경에 이르면 그건 진짜로 매체와 구분된 예술의 내적 본질 운운하는 플라톤주의자가 되는 꼴이에요. 포크송과 랩의 발전에 문학적 장치들이 발견된다고 해서 그걸 문학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밥 딜런을 문학가라 부르는 건 레너드 코언 말마따나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가장 높은 산이라 깃발 꽂는 격'이나 다름 없어요. 그 발전 양상이 과거의 문학과 유사한 과정을 밟는다고 한들, 그건 음악의 발전이지 문학의 발전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적 가사를 우겨넣어봐야 소리를 울려 시간을 인식케 하는 음악을 담을 수는 없어요. 예술 비평은 매체 분석에서 출발하고 결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당장 베르그송이나 몸젠, 무엇보다 처칠 등의 수상 사례를 통해 이미 스웨덴 한림원 자신이 때론 용인될만하고 때론 덜떨어진 방식으로 보여오지 않았나요?) 매체를 초월하여 예술이 어쩌고 저쩌고를 떠드는 순간 그건 예술을 종교화한 플라톤주의의 저열한 반복이 될뿐입니다. 과격하게 말해볼까요? 그동안 우리가 운문 문학이라고 말해온 많은 것들조차 그 시절에 레코더가 있었다면 문학이 되지 않았을 거에요. 영화의 발전을 문학의 발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요. 영화의 발전을 통한 문학의 발전이란 인히어런트 바이스와 같은 문학적인 장치를 효과적으로 영화화한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정반대죠. (여기서 사례로 꺼내기에 천변풍경은 그 장치의 승화 수준이 좀 떨어지지만)박태원의 천변풍경이나 로브그리예의 질투, 하일지의 경마장 연작, 그리고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와 같은 영화적인 양식에서 힌트를 얻은 문학 작품을 통해 문학은 발전하는 겁니다. 이때 우리는 다른 장르, 다른 매체가 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발전을 추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음악가에게 문학상 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요. 3
|
예술의 분류를 매체중심으로 가르는 것이 일반적일순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죠. 형태,형식,내재,외재등.. 그런면에서 강하게 주장하시는 설명이 그 근본적 차이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하시진 않는거 같아요. 제가 읽으면서 느낀건 결국 2번의 입장인 사람들은 문학상은 '문학'이라는 형식에게만 줘야한다는 입장인데 2번의 근거를 아무리 공고하게 주장한다 한들 문학의 형식적 구별보다 문학의 내재적 가치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에게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는게 아닐까 싶었네요. 전 예술의 경계라는게 실제 예술 내의 변화와 추동이 경계짓기보다 항상 빠르다고 생각하고 그 시차 때문에 외재적 형식보다 내재적 가치에 더 중점을 두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무비판적으로 좋은 수상이다 싶었는데 형식적 관점에서 문학상과 그 대상에 대한 경계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예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각자가 사이 좋게 공존하는 게 아니죠. 모든 작품이 그저 놓여만 있는 게 아닌 것처럼요. 각자 작품, 그리고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그 각자의 기준 속에서 쟁투합니다. 어느 것이 가장 현실에 부합하느냐, 예술 및 해당 세계의 양상을 잘 드러낼 수 있느냐에 대해서요. 특정 장르의 미적 지평을 넓히고 그 지평을 설득력 있게 굳힐만한 작품을 훌륭한 예술이라고 하는 것처럼, 특정 이론이 해당 장르와 업계가 기능하는 양상을 잘 파악할 때 그것을 훌륭한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플라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건 그저 플라톤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이를 기준으로 예술을 파악할 때 주창자 개인의 내적 만족을 제외하면 어떤 의미값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쟁론의 장이 예술 평론/비평이고 예술사, 미학 등이고요.
안 좋은 수상이라는 것에 대한 반박 논거를 보면 대충
'문학과 음악의 구획은 어차피 작위적이다.'라는건데 이런 논리면 세상에 안 좋은 수상은 없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이 작위적인데요. 이 층위에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냥 어떤 상이든 상 주는 사람 마음대로 상 주면 거기서 끝나는거지 뭘 더 생각해볼 껀덕지가 없습니다. 아니 이게 논의의 쟁점인지도 의문이네요. 그냥 '난 별로 관심이 없어' 정도의 수준인 것 같은데...
상은 그냥 실용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하나의 경제적 유인체계로서 작동하는 것이죠. 그러면... 더 보기
'문학과 음악의 구획은 어차피 작위적이다.'라는건데 이런 논리면 세상에 안 좋은 수상은 없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이 작위적인데요. 이 층위에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냥 어떤 상이든 상 주는 사람 마음대로 상 주면 거기서 끝나는거지 뭘 더 생각해볼 껀덕지가 없습니다. 아니 이게 논의의 쟁점인지도 의문이네요. 그냥 '난 별로 관심이 없어' 정도의 수준인 것 같은데...
상은 그냥 실용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하나의 경제적 유인체계로서 작동하는 것이죠. 그러면... 더 보기
안 좋은 수상이라는 것에 대한 반박 논거를 보면 대충
'문학과 음악의 구획은 어차피 작위적이다.'라는건데 이런 논리면 세상에 안 좋은 수상은 없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이 작위적인데요. 이 층위에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냥 어떤 상이든 상 주는 사람 마음대로 상 주면 거기서 끝나는거지 뭘 더 생각해볼 껀덕지가 없습니다. 아니 이게 논의의 쟁점인지도 의문이네요. 그냥 '난 별로 관심이 없어' 정도의 수준인 것 같은데...
상은 그냥 실용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하나의 경제적 유인체계로서 작동하는 것이죠. 그러면 노벨 문학상은 해당 영역의 작가들에게 문학계에 기여할만한 무언가에 대해 노력할만한 유인을 제공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일텐데 다른 걸 떠나서 밥 딜런은 그것과 거리가 멀죠. 대중음악이 무슨 보상이 부족합니까. 더군다나 밥 딜런은 이미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빨릴 때로 빨려서 헐 정도의 입지의 대중가수인데;
'문학과 음악의 구획은 어차피 작위적이다.'라는건데 이런 논리면 세상에 안 좋은 수상은 없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이 작위적인데요. 이 층위에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냥 어떤 상이든 상 주는 사람 마음대로 상 주면 거기서 끝나는거지 뭘 더 생각해볼 껀덕지가 없습니다. 아니 이게 논의의 쟁점인지도 의문이네요. 그냥 '난 별로 관심이 없어' 정도의 수준인 것 같은데...
상은 그냥 실용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하나의 경제적 유인체계로서 작동하는 것이죠. 그러면 노벨 문학상은 해당 영역의 작가들에게 문학계에 기여할만한 무언가에 대해 노력할만한 유인을 제공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일텐데 다른 걸 떠나서 밥 딜런은 그것과 거리가 멀죠. 대중음악이 무슨 보상이 부족합니까. 더군다나 밥 딜런은 이미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빨릴 때로 빨려서 헐 정도의 입지의 대중가수인데;
간단히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현대문학'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쓰시는 건지 약간 헷갈려요. contemporary 인가요 아니면 modern인가요?
오늘날의 문예 장르 구분은 주로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모더니즘 미학을 토대로 하는 것이지요. '예술로서의 문학'이 인정하는 장르는 소설, 시, 드라마예요. 그 가운데서 '소설'이 압도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장르인 것도 맞고요. 그렇다면 드라마- 퍼포먼스를 개입시키지 않으면 온전한 작품이라고 하기 힘든, 이미 시들어가고 있는 장르 - 는 팟저님의 논리에 따르면 문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희곡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 될까요?
오늘날의 문예 장르 구분은 주로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모더니즘 미학을 토대로 하는 것이지요. '예술로서의 문학'이 인정하는 장르는 소설, 시, 드라마예요. 그 가운데서 '소설'이 압도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장르인 것도 맞고요. 그렇다면 드라마- 퍼포먼스를 개입시키지 않으면 온전한 작품이라고 하기 힘든, 이미 시들어가고 있는 장르 - 는 팟저님의 논리에 따르면 문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희곡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 될까요?
네, 동양의 옛 시문학은 지금의 문학과 같은 궤에서 보긴 어렵다고 생각하네요. 그렇게 보는 것 자체도 오류라고 보고요. 이게 문학이란 말 때문에 헷갈리는 거 같은데 제가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지극한 협의로서, 예술로서의 문학입니다. 그리고 이 예술로서 문학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립되어 교육되고 퍼지고 어쩌고 한 건 근대 전후고요. 그런 만큼 그 이전 예술은 여러모로 지금과 같은 맥락에서 보긴 어렵다고 생각하네요. 동양의 시가든 서구 중세 바드의 노랫말이든 못나고 덜떨어지고 예술에 걸맞는 무언가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 더 보기
네, 동양의 옛 시문학은 지금의 문학과 같은 궤에서 보긴 어렵다고 생각하네요. 그렇게 보는 것 자체도 오류라고 보고요. 이게 문학이란 말 때문에 헷갈리는 거 같은데 제가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지극한 협의로서, 예술로서의 문학입니다. 그리고 이 예술로서 문학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립되어 교육되고 퍼지고 어쩌고 한 건 근대 전후고요. 그런 만큼 그 이전 예술은 여러모로 지금과 같은 맥락에서 보긴 어렵다고 생각하네요. 동양의 시가든 서구 중세 바드의 노랫말이든 못나고 덜떨어지고 예술에 걸맞는 무언가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현대에 있어 문학성을 논할 때 굳이 그런 것들까지 염두에 둘 이유는 없다는 거죠. 단, 이때 문학성이란 철저히 아카데미와 비평계에서 상정된 그것을 뜻하지, 개인이 문자화된 매체를 접할 때 원초적으로 느끼는 미적 감흥까지 포괄하진 않습니다. 그건 주제넘는 짓이죠. 애초에 이는 제가 말하는 문학의 영역도 아니고요. 그러니 그냥 그 모두를 얼버무린 무엇을 단일한 문학성으로 묶기보단 그냥 따로따로 냅두자는 생각입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노벨상에서 추구하는 문학이라 함은 팟저님이 언급하신 평론적 시각에서의 문학인지, 아니면 그저 읽을 거리로써의 문학인지는 한림원의 그들이 선택할 문제겠죠. 하지만 전 현대에서의 문학성이 무엇인가?하는 규정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나 싶어요. 현대라는 규정 자체가 주관적일 뿐더러 한시대에만 의미있는 것인데 굳이 이 시대에 의미있는 것과 의미없는 것을 나누고 벽 세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요.
뭐... 거기다 여담이지만 아카데미나 평론 쪽에서도 늘 새로운 걸 추구하기 보다는 옛문학의 재림하면서 가끔씩 복고적인 모습 보이며 좋아하지 않던가요? 예를 들어 칼 노래의 동인문학상 평 중에서 한자 문학의 미를 살렸다 뭐다 하면서 찬사했던 것처럼요.
뭐... 거기다 여담이지만 아카데미나 평론 쪽에서도 늘 새로운 걸 추구하기 보다는 옛문학의 재림하면서 가끔씩 복고적인 모습 보이며 좋아하지 않던가요? 예를 들어 칼 노래의 동인문학상 평 중에서 한자 문학의 미를 살렸다 뭐다 하면서 찬사했던 것처럼요.
본문에서 제시한 구분법이 잘 이해가 안돼요. 여러번 읽어봤는데 아직...;;
팟저님이 명명하신바 이름들을 보고 제가 받은 느낌은 이래요.
플라톤주의자 = 문학성이란 고고한 별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저 하늘에 떠있는 거고 그걸 추구하는 모든 게 문학인거야. 노래를 하든 똥을 싸든 뭔상관이야.
역사주의자 = 예전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그 별을 추구했었고 오늘날에는 저러이러한 방식으로 그 별을 추구했었지. 방식은 달라도 다 문학 아니겠어?
구조주의자 = 또각또각 글씨를 써서 추구해야만 문학이야. 그걸 소리내어... 더 보기
팟저님이 명명하신바 이름들을 보고 제가 받은 느낌은 이래요.
플라톤주의자 = 문학성이란 고고한 별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저 하늘에 떠있는 거고 그걸 추구하는 모든 게 문학인거야. 노래를 하든 똥을 싸든 뭔상관이야.
역사주의자 = 예전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그 별을 추구했었고 오늘날에는 저러이러한 방식으로 그 별을 추구했었지. 방식은 달라도 다 문학 아니겠어?
구조주의자 = 또각또각 글씨를 써서 추구해야만 문학이야. 그걸 소리내어... 더 보기
본문에서 제시한 구분법이 잘 이해가 안돼요. 여러번 읽어봤는데 아직...;;
팟저님이 명명하신바 이름들을 보고 제가 받은 느낌은 이래요.
플라톤주의자 = 문학성이란 고고한 별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저 하늘에 떠있는 거고 그걸 추구하는 모든 게 문학인거야. 노래를 하든 똥을 싸든 뭔상관이야.
역사주의자 = 예전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그 별을 추구했었고 오늘날에는 저러이러한 방식으로 그 별을 추구했었지. 방식은 달라도 다 문학 아니겠어?
구조주의자 = 또각또각 글씨를 써서 추구해야만 문학이야. 그걸 소리내어 읽거나, 읽으면서 춤을 추거나, 손짓을 하거나, 무엇보다도 특히 음을 붙이거나 하면 안돼.
대강 이런 느낌인가요?
제 인상이 맞다는 가정하에 그냥 1번을 내용파, 2번을 형식파라고 이름붙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플라톤주의자라고 하면 자꾸 플라톤의 시학詩學이 생각나고 역사주의자라고하면 제 필드에선 주로 상대주의자를 지칭할 때 쓰거든요 (의미는 역사에 의해 지배되는 거구 그래서 시대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지는거야 등등).
팟저님이 구조주의자라고 했을 땐 해당 작품(piece)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그 작품의 골격 (frame)을 주로 보겠다라는 의미로 쓰신 것 같은데 익히 아시겠지만 구조주의라는 이름이 말씀하고자하신 바에 잘 어울리지 않아서 -_-;;
팟저님이 명명하신바 이름들을 보고 제가 받은 느낌은 이래요.
플라톤주의자 = 문학성이란 고고한 별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저 하늘에 떠있는 거고 그걸 추구하는 모든 게 문학인거야. 노래를 하든 똥을 싸든 뭔상관이야.
역사주의자 = 예전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그 별을 추구했었고 오늘날에는 저러이러한 방식으로 그 별을 추구했었지. 방식은 달라도 다 문학 아니겠어?
구조주의자 = 또각또각 글씨를 써서 추구해야만 문학이야. 그걸 소리내어 읽거나, 읽으면서 춤을 추거나, 손짓을 하거나, 무엇보다도 특히 음을 붙이거나 하면 안돼.
대강 이런 느낌인가요?
제 인상이 맞다는 가정하에 그냥 1번을 내용파, 2번을 형식파라고 이름붙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플라톤주의자라고 하면 자꾸 플라톤의 시학詩學이 생각나고 역사주의자라고하면 제 필드에선 주로 상대주의자를 지칭할 때 쓰거든요 (의미는 역사에 의해 지배되는 거구 그래서 시대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지는거야 등등).
팟저님이 구조주의자라고 했을 땐 해당 작품(piece)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그 작품의 골격 (frame)을 주로 보겠다라는 의미로 쓰신 것 같은데 익히 아시겠지만 구조주의라는 이름이 말씀하고자하신 바에 잘 어울리지 않아서 -_-;;
팟저님이 오시기 전에 잠깐 제가 본문글을 읽고 이해한 내용을 말씀드려 볼게요. 팟저님이 구조주의자라고 하신 것은 형식주의(formalism)와는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거 같고요.
플라톤주의자는 문학의 본질/이데아('문학성')가 먼저 있고 모든 작품들은 이데아의 모상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문학의 이데아란 무엇인가가 주된 탐구 대상.
역사주의자는 문학의 이데아는 대체로 인정하되, 그 모상들을 주로 연구하는 자들. 호머든 딜런이든 문학의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은 없다. (개량적 플라톤주의)
구조주의자... 더 보기
플라톤주의자는 문학의 본질/이데아('문학성')가 먼저 있고 모든 작품들은 이데아의 모상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문학의 이데아란 무엇인가가 주된 탐구 대상.
역사주의자는 문학의 이데아는 대체로 인정하되, 그 모상들을 주로 연구하는 자들. 호머든 딜런이든 문학의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은 없다. (개량적 플라톤주의)
구조주의자... 더 보기
팟저님이 오시기 전에 잠깐 제가 본문글을 읽고 이해한 내용을 말씀드려 볼게요. 팟저님이 구조주의자라고 하신 것은 형식주의(formalism)와는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거 같고요.
플라톤주의자는 문학의 본질/이데아('문학성')가 먼저 있고 모든 작품들은 이데아의 모상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문학의 이데아란 무엇인가가 주된 탐구 대상.
역사주의자는 문학의 이데아는 대체로 인정하되, 그 모상들을 주로 연구하는 자들. 호머든 딜런이든 문학의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은 없다. (개량적 플라톤주의)
구조주의자는 (저는 제도주의자라고 하는 편이 이해가 좀더 잘 되지 않나 싶은데 뭐 이름 붙이기 나름이니까요...) '문학의 이데아'란 없고 실재하는 작품들과 비평들, 제도들의 현실적 역학관계로 문학장이 구성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
여기서 '현대문학'의 '현대'가 일반적 동시대성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문학/예술사상의 사조 내지 단계를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만일 contemporary라면 다뤄야 할 대상이 엄청나게 광범위해지게 되고, modern이라면 20세기 이후 전통적인 문학사의 이야기로 좁혀볼 수 있게 될 것 같고 그래요.
저는 아마 역사주의와 제도주의의 중간쯤?에 속하는데, 어느 주의 쪽으로 딜런을 만지든 그를 문학으로 보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후자의 입장으로 볼 때도 딜런은 영미에서 제도권 문학이 된 지 20년 이상 된 걸로 알고 있어서리... 노벨문학상은 그걸 추인했을 뿐이지요. 그 스스로가 하나의 제도로서 파워 게임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플라톤주의자는 문학의 본질/이데아('문학성')가 먼저 있고 모든 작품들은 이데아의 모상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문학의 이데아란 무엇인가가 주된 탐구 대상.
역사주의자는 문학의 이데아는 대체로 인정하되, 그 모상들을 주로 연구하는 자들. 호머든 딜런이든 문학의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은 없다. (개량적 플라톤주의)
구조주의자는 (저는 제도주의자라고 하는 편이 이해가 좀더 잘 되지 않나 싶은데 뭐 이름 붙이기 나름이니까요...) '문학의 이데아'란 없고 실재하는 작품들과 비평들, 제도들의 현실적 역학관계로 문학장이 구성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
여기서 '현대문학'의 '현대'가 일반적 동시대성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문학/예술사상의 사조 내지 단계를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만일 contemporary라면 다뤄야 할 대상이 엄청나게 광범위해지게 되고, modern이라면 20세기 이후 전통적인 문학사의 이야기로 좁혀볼 수 있게 될 것 같고 그래요.
저는 아마 역사주의와 제도주의의 중간쯤?에 속하는데, 어느 주의 쪽으로 딜런을 만지든 그를 문학으로 보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후자의 입장으로 볼 때도 딜런은 영미에서 제도권 문학이 된 지 20년 이상 된 걸로 알고 있어서리... 노벨문학상은 그걸 추인했을 뿐이지요. 그 스스로가 하나의 제도로서 파워 게임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아 지난번에 소개해 주셨던 책 있잖아요. <밥 딜런의 철학>. 서문이랑 첫번째 논문 몇 페이지만 조금 봤는데 서문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연구서가 <Dylan's Visions of Sin>이라고 2005년에 나온 저술이 있더라고요. 뭔가 기념비적인 저작인가 보다 하고 아마존에 쳐보니까 528페이지짜리... 분량이 좀 많네요.;;
하버드 고전학과에서도 2004년도부턴가 신입생 커리큘럼으로 밥 딜런 리딩을 지금까지 하고 있더군요. 옛날문학 하는 사람들이 딜런을 많이들 좋아하는 거 같아요. 딜런이 희랍 라틴 고전에서 샘플링해 써먹은 구절들도 연구하고 있고...
하버드 고전학과에서도 2004년도부턴가 신입생 커리큘럼으로 밥 딜런 리딩을 지금까지 하고 있더군요. 옛날문학 하는 사람들이 딜런을 많이들 좋아하는 거 같아요. 딜런이 희랍 라틴 고전에서 샘플링해 써먹은 구절들도 연구하고 있고...
극작가도 희곡가가 아닌 이상 극작가만 하던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요. 본문 읽으셨으면 아실텐데 전 본업이 극작가인 문학가가 받는 것도 마땅찮은 입장이긴 합니다. 다만 모더니즘 문학 도식에서 이를 문학이라고 하고 이게 작금의 문학과 완벽하게 동일시되진 않을지언정 꽤 지배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그건 어쩔 수 없지... 정도에 가깝고요. 음, 뭐 다른 이들이라면 하시는 말씀이 맞을 겁니다. 만약 스웨덴 한림원이 "앞으로 극작가에게 문학상을 수상하지 않겠다"라고 발표한다거나 그랬으면 지금 이상으로 오만 난리가 났겠죠.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문학작품으로 읽혀도 문제가 없듯이 노래의 가사가 딱히 노래를 통하지 않고 텍스트만으로서 읽혀질수 있고, 그 텍스트에 문학성이 담보된다면 문학이라가고 생각할 수 있다예요. 밥 딜런을 세익스피어에 비교하는건 아니지만, 어째든 밥 딜런의 경우에 텍스트를 음악에서 분리해내고, 그게 문학성을 인정받을 정도의 텍스트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영미권에서 문학으로서 인정받는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그의 텍스트가 음악에 너무 강하게 결합해있어서 사람들이 텍스트를 분리해내는데 거부감을 많이 느끼는것 같아요.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하네 음악과 텍스트를 결합시킨건 그의 능력이 그만큼 출중해서 그런거겠죠.
다만 그의 텍스트가 음악에 너무 강하게 결합해있어서 사람들이 텍스트를 분리해내는데 거부감을 많이 느끼는것 같아요.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하네 음악과 텍스트를 결합시킨건 그의 능력이 그만큼 출중해서 그런거겠죠.
아 그리고 "그의 텍스트가 음악에 너무 강하게 결합해있어서 사람들이 텍스트를 분리해내는데 거부감을 많이 느끼는것 같아요.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하네 음악과 텍스트를 결합시킨건 그의 능력이 그만큼 출중해서 그런거겠죠."라고 하셨는데... 만약 거부감 없이 분리해낼 수 있다면 뮤지션으로서 덜떨어진 거거나, 아니면 음악이란 장르 자체가 예술로서 의미가 없는 거겠죠. 그래픽 노블에 대해서도 저는 같은 생각입니다. 전 그래픽노블을 즐겨보진 않습니다만 단일한 예술 장르로서 인정받고자 한다면 기존 예술과 얼마나 접점이 많은가가 아니라 도리어 다른 예술이 그동안 건드리지 못한 미감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네요. 기존 예술과 얼마나 유사하냐로 어필하려드는 건 예술이 아닌 키치가 보일 태도죠.
그 양식만이 주는 특정한 쾌감은 쾌감이고, 그 속에 포함된 하나의 양식을 분리해 낼 수 있고, 그것이 독립된 작품으로 기능할 수 있어서 독립하고 그 독립된 작품이 다른 양식의 작품에서 주는 쾌감을 줄 수 있다면 다른 양식으로 판단할 수 있겠죠. 밥 딜런의 경우에 가사를 음악에서 완전히 분리해서 텍스트만 놓고나서, 문학작품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것이고요. 그게 정말로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인가 하는건 비평가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고, 저는 별 생각없고요. 어째든 저는 그의 음악을 빼놓고 종종 가사만 따로 떼서 읽곤 하는데, 음악과는 상관없이 제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그래요. 그리고 음악은 또 음악대로 제게 즐거움을 주고요. 뭐가 문제라는건지 이해가 안가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나보다라고 하고 지나가는게 좋을것 같네요.
새의선물 님// 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문제가 아니라 그게 제도화된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면 제도 차원에서 충분히 문학장을 형성할만한 장르여야한다는 게 제 말입니다. 님께서 위에 언급하신 엔리오 모리꼬네처럼요. 그렇게 즐기는 게 보편화되어 있다면 이건 문학이라고 부를만할 겁니다. 그 시점이 된다면 문학상을 받건 뭘하건 문제될 게 없겠고요. 문학상의 역할은 무엇이 문학인지 규정하는 게 아니라 이미 문학인 것의 문학성을 판단하는데 있다고 전 생각하는데요.
오페라 대본만 따로 떼어 읽으며 문학적 향취를 느낄 수야 있겠죠. 전 그런... 더 보기
오페라 대본만 따로 떼어 읽으며 문학적 향취를 느낄 수야 있겠죠. 전 그런... 더 보기
새의선물 님// 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문제가 아니라 그게 제도화된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면 제도 차원에서 충분히 문학장을 형성할만한 장르여야한다는 게 제 말입니다. 님께서 위에 언급하신 엔리오 모리꼬네처럼요. 그렇게 즐기는 게 보편화되어 있다면 이건 문학이라고 부를만할 겁니다. 그 시점이 된다면 문학상을 받건 뭘하건 문제될 게 없겠고요. 문학상의 역할은 무엇이 문학인지 규정하는 게 아니라 이미 문학인 것의 문학성을 판단하는데 있다고 전 생각하는데요.
오페라 대본만 따로 떼어 읽으며 문학적 향취를 느낄 수야 있겠죠. 전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제도권 문학상의 대상이 되려면 그 대본에 담긴 문학적 역량의 수준이 어떠하냐를 따지기 이전에 과연 오페라의 대본이 오페라와 구별되어 연극의 희곡마냥 독립된 장르로서 향유되지 그렇지 않은지부터 보아야한다는 것이죠. 후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대체 문학상이 문학상일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말 잘했던 오바마는 평화상이 아니라 문학상부터 받았어야하나요.
오페라 대본만 따로 떼어 읽으며 문학적 향취를 느낄 수야 있겠죠. 전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제도권 문학상의 대상이 되려면 그 대본에 담긴 문학적 역량의 수준이 어떠하냐를 따지기 이전에 과연 오페라의 대본이 오페라와 구별되어 연극의 희곡마냥 독립된 장르로서 향유되지 그렇지 않은지부터 보아야한다는 것이죠. 후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대체 문학상이 문학상일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말 잘했던 오바마는 평화상이 아니라 문학상부터 받았어야하나요.
말씀하신바에 대체로 동의해요.
제가 '형식파'라고 했던 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군영. 전 형식미를 추구하겠다 뭐 이런 의미에서 형식파라는 명칭을 썼던 건 아니에요. 팟저님이 대체로 음/퍼포먼스/반주 같은 지면(紙面) 외적 요소가 주는 심미감을 최대한 배제하는 쪽으로 문학의 정의를 세밀화(articulate) 하려고 하시는 것 같아서 '아 그렇다면 음의 유무, 퍼포먼스의 유무 등 창작과 소비의 형태가 문학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주요한 기준이라고 주장하시는 건가'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명명해봤던 거예요.
'제도주의'에 대한 설명은 토마스 쿤과 피에르 부르디외를 섞어놓은 것 같은 인상이군요. 말씀하신대로라면 저는 제도주의자인 것 같아요.
제가 '형식파'라고 했던 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군영. 전 형식미를 추구하겠다 뭐 이런 의미에서 형식파라는 명칭을 썼던 건 아니에요. 팟저님이 대체로 음/퍼포먼스/반주 같은 지면(紙面) 외적 요소가 주는 심미감을 최대한 배제하는 쪽으로 문학의 정의를 세밀화(articulate) 하려고 하시는 것 같아서 '아 그렇다면 음의 유무, 퍼포먼스의 유무 등 창작과 소비의 형태가 문학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주요한 기준이라고 주장하시는 건가'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명명해봤던 거예요.
'제도주의'에 대한 설명은 토마스 쿤과 피에르 부르디외를 섞어놓은 것 같은 인상이군요. 말씀하신대로라면 저는 제도주의자인 것 같아요.
넹. 형식파(한국어 조합이 되니까 꽤 유머러스한 단어가 되네요 형식이가 사람 이름 같아서;;), 포멀리즘이라고 하면 문학생태계에서는 주로 비평 사조상 러시아 형식주의와 모더니즘 신비평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뭐랄까 그쪽 자장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좀 멀리 떨궈놓는 단어...라는 느낌이라서요. 설명하신 부분은 형식주의적 독법과 비슷해요. 형식주의자와 신비평가들도 역사주의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맞고요. 근데 문학의 이데아를 거부하는 사람들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고 좀 다른 방식으로 문학의 이데아를 분유하는 사람들 같아요.
2... 더 보기
2... 더 보기
넹. 형식파(한국어 조합이 되니까 꽤 유머러스한 단어가 되네요 형식이가 사람 이름 같아서;;), 포멀리즘이라고 하면 문학생태계에서는 주로 비평 사조상 러시아 형식주의와 모더니즘 신비평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뭐랄까 그쪽 자장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좀 멀리 떨궈놓는 단어...라는 느낌이라서요. 설명하신 부분은 형식주의적 독법과 비슷해요. 형식주의자와 신비평가들도 역사주의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맞고요. 근데 문학의 이데아를 거부하는 사람들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고 좀 다른 방식으로 문학의 이데아를 분유하는 사람들 같아요.
20세기의 아카데미를 넘어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마 대개가 제도주의자 그룹에 속할 거예요. 양심상(?) 그러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제가 둘 사이 중간쯤이라고 한 것은, 저는 아무리 천지가 개벽해도 신경숙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뭐 그런 고집스런 뜻이에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현대 문학에서 '소설'이 나아가 닿은 성취의 첨단을 뒤로 후퇴시키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런 점에서는 형식파 - 제도주의에 속하는 셈이지요. 역사주의는 배척하지 않되, 현대 이론의 틀에서 보더라도 유의미한 성취를 보이는 정전들만 긍정하고 싶고요. 반대로 신비평 식의 close reading 대신에 distant reading을 이야기하면서 대중문학/베스트셀러를 연구하는 프랑코 모레티 같은 세계체제론자-제도주의자도 있고... 관점은 다양 다양하지 않겠어요.
20세기의 아카데미를 넘어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마 대개가 제도주의자 그룹에 속할 거예요. 양심상(?) 그러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제가 둘 사이 중간쯤이라고 한 것은, 저는 아무리 천지가 개벽해도 신경숙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뭐 그런 고집스런 뜻이에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현대 문학에서 '소설'이 나아가 닿은 성취의 첨단을 뒤로 후퇴시키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런 점에서는 형식파 - 제도주의에 속하는 셈이지요. 역사주의는 배척하지 않되, 현대 이론의 틀에서 보더라도 유의미한 성취를 보이는 정전들만 긍정하고 싶고요. 반대로 신비평 식의 close reading 대신에 distant reading을 이야기하면서 대중문학/베스트셀러를 연구하는 프랑코 모레티 같은 세계체제론자-제도주의자도 있고... 관점은 다양 다양하지 않겠어요.
사실 엄격하게 제도주의를 고수한다면 이미 아카데미에서 연구되고 있는 밥 딜런을 문학이네 아니네하는 게 웃긴 일이죠. 보편문법이론에서 맞춤법 지적질하는 거랑 비슷한 이야기니... 그런 점에서 보면 전 역사주의도 제도주의도 아니고 차라리 형식주의자들이 지니는 플라톤주의적 태도에 가까울 겁니다.(하기사 개개인을 엄밀하게 밀어붙이면 종국에 플라톤주의가 아니게 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 구조주의자란 표현을 쓴 건 이런 이유도 있고요. 실제로는 별반 관심없다에 가깝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문학을 규정한다면 제도주의적 개념 틀을 이용... 더 보기
사실 엄격하게 제도주의를 고수한다면 이미 아카데미에서 연구되고 있는 밥 딜런을 문학이네 아니네하는 게 웃긴 일이죠. 보편문법이론에서 맞춤법 지적질하는 거랑 비슷한 이야기니... 그런 점에서 보면 전 역사주의도 제도주의도 아니고 차라리 형식주의자들이 지니는 플라톤주의적 태도에 가까울 겁니다.(하기사 개개인을 엄밀하게 밀어붙이면 종국에 플라톤주의가 아니게 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 구조주의자란 표현을 쓴 건 이런 이유도 있고요. 실제로는 별반 관심없다에 가깝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문학을 규정한다면 제도주의적 개념 틀을 이용해, 일정 규모 이상의 문학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장르여야하지 않겠느냐...는 정도겠네요. 뭐, 위에서 모더니즘이 아니라 동시대성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그 미래주의적 성격 때문이고요.
아시겠지만 실제 전 뭐가 문학이고 뭐가 문학이 아닌지 큰 관심이 없긴 해요. 제 관심사는 지극히 협소하여 소설 형식 쪽에 치중해있거든요. 다만 말을 해야하다보니 이런저런 입장들을 취합했을 뿐이죠. 그리고 전 사실... 아카데미 차원이 아니라면 밥 딜런이, 정확히 말하면 밥 딜런이 표방하는 노랫말이 문학장을 형성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에요. 개개인의 문학적 경험이라면 모르겠으나 과거 셰익스피어나 유진 오닐의 희곡집을 읽던 것과 달리 노랫말 가사만을 따로 채집하여 그것만 읽는 향유층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상한 짓거리죠. 소설책도 오디오북으로 읽는 세상에 음원 냅두고 가사만 읽고 즐기며 그게 본래의 퍼포먼스와 구획되어 단일한 장르라고 할만치 보편적인 양상인지요.(과거 연극을 누워 손짓만 하면 눈 앞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전래와 같은 희곡 향유층이 있었을지)
아시겠지만 실제 전 뭐가 문학이고 뭐가 문학이 아닌지 큰 관심이 없긴 해요. 제 관심사는 지극히 협소하여 소설 형식 쪽에 치중해있거든요. 다만 말을 해야하다보니 이런저런 입장들을 취합했을 뿐이죠. 그리고 전 사실... 아카데미 차원이 아니라면 밥 딜런이, 정확히 말하면 밥 딜런이 표방하는 노랫말이 문학장을 형성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에요. 개개인의 문학적 경험이라면 모르겠으나 과거 셰익스피어나 유진 오닐의 희곡집을 읽던 것과 달리 노랫말 가사만을 따로 채집하여 그것만 읽는 향유층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상한 짓거리죠. 소설책도 오디오북으로 읽는 세상에 음원 냅두고 가사만 읽고 즐기며 그게 본래의 퍼포먼스와 구획되어 단일한 장르라고 할만치 보편적인 양상인지요.(과거 연극을 누워 손짓만 하면 눈 앞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전래와 같은 희곡 향유층이 있었을지)
저도 시나 드라마를 잘 알지 못해요. 향유하기에 장벽이 좀 더 높은, 소설의 까칠한 자매들 정도로 생각하지요. 대체로 소설을 읽을 때보다 독자의 적극성이 훨씬 많이 요구되고 물질적 정신적 조공도 많이 바쳐야 보답이 돌아오는... 소설이 워낙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융합하는 장르다 보니 원래 자매들의 몫이었던 지참금도 자기 걸로 땡겨와 써 버리곤 하는데(사실 그러다 소설에 다 먹힐 가능성도 높고), 어쨌든 자매들이 최대한 자기 영역에서 버텨주는 게 문화 전반에서 소설의 역장을 강화하는 데도 플러스가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문학상을 시인... 더 보기
저도 시나 드라마를 잘 알지 못해요. 향유하기에 장벽이 좀 더 높은, 소설의 까칠한 자매들 정도로 생각하지요. 대체로 소설을 읽을 때보다 독자의 적극성이 훨씬 많이 요구되고 물질적 정신적 조공도 많이 바쳐야 보답이 돌아오는... 소설이 워낙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융합하는 장르다 보니 원래 자매들의 몫이었던 지참금도 자기 걸로 땡겨와 써 버리곤 하는데(사실 그러다 소설에 다 먹힐 가능성도 높고), 어쨌든 자매들이 최대한 자기 영역에서 버텨주는 게 문화 전반에서 소설의 역장을 강화하는 데도 플러스가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문학상을 시인들이 수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밥 딜런을 '시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읽기 시작하면 시를 읽는 거죠 뭐. 셰이머스 히니를 읽어도 산문 읽는 식으로 독해하면 시를 읽었다고 하기 힘들잖아요. 그것이 저의 고충인데, 저는 산문적인 인간이라 소위 시적인 정신으로 시를 읽는 게 불가능하더군요.
밥 딜런 가사는 당연히 문학이죠.
가사가 문학이 아닐리가 있겠습니까.
근데 밥 딜런 주려면 투팍도 주고 전스틴 비버도 주고 아이유도 주고 엑소 유재석 하와 수 처진달팽이 자이언티 제와피 그리고 댓글시인 제페토 옆집 문창과 지망생 동네 기타 잘 치는 아저씨 다 줘야 돼요.
물론 다 줄 수 없으니까 그 중 학술원 할배들도 용납할 수 있는 음악의 신을 선정해서 대표로 준 건데 이렇게 주는 게 맞나 싶긴 하죠.
일종의 '세례', 스웨덴 학술원이 성숙하고 치열하며 저항정신을 표현한 락음악에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함'으로 느... 더 보기
가사가 문학이 아닐리가 있겠습니까.
근데 밥 딜런 주려면 투팍도 주고 전스틴 비버도 주고 아이유도 주고 엑소 유재석 하와 수 처진달팽이 자이언티 제와피 그리고 댓글시인 제페토 옆집 문창과 지망생 동네 기타 잘 치는 아저씨 다 줘야 돼요.
물론 다 줄 수 없으니까 그 중 학술원 할배들도 용납할 수 있는 음악의 신을 선정해서 대표로 준 건데 이렇게 주는 게 맞나 싶긴 하죠.
일종의 '세례', 스웨덴 학술원이 성숙하고 치열하며 저항정신을 표현한 락음악에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함'으로 느... 더 보기
밥 딜런 가사는 당연히 문학이죠.
가사가 문학이 아닐리가 있겠습니까.
근데 밥 딜런 주려면 투팍도 주고 전스틴 비버도 주고 아이유도 주고 엑소 유재석 하와 수 처진달팽이 자이언티 제와피 그리고 댓글시인 제페토 옆집 문창과 지망생 동네 기타 잘 치는 아저씨 다 줘야 돼요.
물론 다 줄 수 없으니까 그 중 학술원 할배들도 용납할 수 있는 음악의 신을 선정해서 대표로 준 건데 이렇게 주는 게 맞나 싶긴 하죠.
일종의 '세례', 스웨덴 학술원이 성숙하고 치열하며 저항정신을 표현한 락음악에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함'으로 느껴지기도 하구요.
저에게는 스웨덴 학술원이 일종의 의사표현을 한 것으로 느껴져요. 고은이나 하루키같은 2류들을 줄 바에야 무시하고 밥 아저씨를 주겠다는 의지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도 선정하지 않고 지나가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가사가 문학이 아닐리가 있겠습니까.
근데 밥 딜런 주려면 투팍도 주고 전스틴 비버도 주고 아이유도 주고 엑소 유재석 하와 수 처진달팽이 자이언티 제와피 그리고 댓글시인 제페토 옆집 문창과 지망생 동네 기타 잘 치는 아저씨 다 줘야 돼요.
물론 다 줄 수 없으니까 그 중 학술원 할배들도 용납할 수 있는 음악의 신을 선정해서 대표로 준 건데 이렇게 주는 게 맞나 싶긴 하죠.
일종의 '세례', 스웨덴 학술원이 성숙하고 치열하며 저항정신을 표현한 락음악에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함'으로 느껴지기도 하구요.
저에게는 스웨덴 학술원이 일종의 의사표현을 한 것으로 느껴져요. 고은이나 하루키같은 2류들을 줄 바에야 무시하고 밥 아저씨를 주겠다는 의지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도 선정하지 않고 지나가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학부때 음악론(맞나...)이라는 2학점 짜리 수업을 들었더랬어요. 고대시대부터 현대시대까지의 음악론이 어떻게 변해왔나에 대해 공부를 한거죠. 시대가 바뀌면서 기술 혹은 종교 혹은 다른 종류의 예술과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음악론이 변했는지에 대해 논했었는데, 현대시대에 와서 강사의 설명톤이 좀 이상해지더군요.
마르셀 뒤샹의 샘,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이후로 예술의 정의가 바뀐다면서, 평론가 및 전문가들이 인정한 작품들만 예술이 될수 있다고 하더군요. 근거는, 아무나 저런식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예술로 받아들일수는 없는거 아니... 더 보기
마르셀 뒤샹의 샘,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이후로 예술의 정의가 바뀐다면서, 평론가 및 전문가들이 인정한 작품들만 예술이 될수 있다고 하더군요. 근거는, 아무나 저런식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예술로 받아들일수는 없는거 아니... 더 보기
학부때 음악론(맞나...)이라는 2학점 짜리 수업을 들었더랬어요. 고대시대부터 현대시대까지의 음악론이 어떻게 변해왔나에 대해 공부를 한거죠. 시대가 바뀌면서 기술 혹은 종교 혹은 다른 종류의 예술과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음악론이 변했는지에 대해 논했었는데, 현대시대에 와서 강사의 설명톤이 좀 이상해지더군요.
마르셀 뒤샹의 샘,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이후로 예술의 정의가 바뀐다면서, 평론가 및 전문가들이 인정한 작품들만 예술이 될수 있다고 하더군요. 근거는, 아무나 저런식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예술로 받아들일수는 없는거 아니냐? 정도만 얘기하고 넘어가더라고요. 납득이 잘 안가서, 강사님께 제가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이 쓰인 논문 혹은 책을 소개해 주실수 있느냐고 메일로 여쭤보니, 강의 종료후 1달반뒤에 답장이 왔어요. 영문으로 된 책 3권을 권하시더군요 -_- 보란건지 말란건지.
제 느낌을 말하면 이 글에서 논하는 제도주의가 위에서 말한 예술의 정의와 맥락상 큰 차이는 없어보이고, 그렇다면 대중들을 설득하기엔 너무나 어려울거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종종 개 거지 같은 퀄리티의 랩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실력파로 인식되는 래퍼들 보면 짜증나기는 해서 어떤 느낌인지는 짐작할수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한국말 랩에 대해서는 누군가를 평가할 만큼의 지식은 갖췄다고 생각하거든요.)
마르셀 뒤샹의 샘,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이후로 예술의 정의가 바뀐다면서, 평론가 및 전문가들이 인정한 작품들만 예술이 될수 있다고 하더군요. 근거는, 아무나 저런식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예술로 받아들일수는 없는거 아니냐? 정도만 얘기하고 넘어가더라고요. 납득이 잘 안가서, 강사님께 제가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이 쓰인 논문 혹은 책을 소개해 주실수 있느냐고 메일로 여쭤보니, 강의 종료후 1달반뒤에 답장이 왔어요. 영문으로 된 책 3권을 권하시더군요 -_- 보란건지 말란건지.
제 느낌을 말하면 이 글에서 논하는 제도주의가 위에서 말한 예술의 정의와 맥락상 큰 차이는 없어보이고, 그렇다면 대중들을 설득하기엔 너무나 어려울거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종종 개 거지 같은 퀄리티의 랩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실력파로 인식되는 래퍼들 보면 짜증나기는 해서 어떤 느낌인지는 짐작할수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한국말 랩에 대해서는 누군가를 평가할 만큼의 지식은 갖췄다고 생각하거든요.)
리쾨르를 읽은 현상학도들이 빡쳐서 우스개소리로 이런 말을 하죠. "시의 현상학은 예술, 꿈의 현상학은 정신분석, 그리고 우주 현상학은 그걸 제외한 모든 것이다..." 우주 현상학이 다루는 대상이 신-사랑-종교 등인데 이런 개념이 분명 지칭하는 바는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워낙 달리 쓰이니까 그냥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모든 게 사랑이다' 이런 헐리웃스런 엔딩으로 가기 마련이지요. 예술에 대입하면 "예술하는 것들이 예술이라고 하니 예술이다"겠네요. 아무나 뒤샹이나 존 케이지 놀음하면 안 되니까...라서는 아니고요, 그외에 달리 정의할 방법이 없으며 저렇게 바라보는 게 실제 예술이란 자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하니까, 에 가깝습니다.
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