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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6/21 02:08:17 |
Name | 뤼야 |
Subject | 진화한 라푼쩰 - 토마스 핀천 [제49호 품목의 경매] |
이 글은 미국작가 토마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1966)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썼던 당시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막 완독했던 차여서 들뢰즈식의 용어가 일부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맥락상 어렵게 이해될 만한 구절은 없습니다. 블로그에 끄적인 글이라 반말투입니다.<div><br></div><div><br><br><a href="http://imgur.com/JEU6sSP"><img src="http://i.imgur.com/JEU6sSP.jpg" title="source: imgur.com"></a><br><br>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오이디푸스가 긴 여정을 마치고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근친했다는 이야기를 라푼쩰의 설화와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에 동시에 대입시켜 보는 것이다. 들뢰즈식으로 이야기해서 오이디푸스의 욕망적 생산(사회적 생산과는 다른)은 아버지와 정확히 일치하기에 어머니의 성城으로 귀속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만약 오이디푸스가 들뢰즈식의 산책자로서, 라푼쩰을 찾아나선 이름 모를 왕자처럼 자신의 욕망을 탈코드화된 영토에 기입할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근친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왕국은 널려있는데 굳이 어머니를 범할 필요는 없다. 근친은 곧, 오이디푸스의 욕망이 아버지(역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오이디푸스 설화는 욕망의 코드를 정확히 아버지와 일치시킬 수밖에 없었던 아들의 비극을 그린 것이이며, 아버지의 코드(역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탈코드화의 실패)은 부자父子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br><br>다시 이야기해서 오이디푸스가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에 실패한 이유는 신탁때문이며, 이것은 곧 역사를 살피는 일이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받은 신탁은 그의 욕망의 코드가 아버지와 정확히 일치하리라는 예언이며 이것은 아버지 라이오스(역사)의 자기복제를 은유한다. 예언(신탁)을 살피는 일은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며, 아버지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는 일이다. 이것은 맑스가 이이기하는 바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자인한 그에게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그가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신탁은 오이디푸스를 역사적으로 만들며 오이디푸스가 가짜 유물론자로서 여정(결국은 실패한 사회적 생산을 찾아나선 여정)을 마쳤을 때 그는 복제된 라이오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br><br>그러므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른다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등록된 오이디푸스적 욕망은 외부를 전유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에게 눈은 불필요한 것이다. 즉, 그의 방황이 얼마나 길고 험했던 간에 그는 들뢰즈적 산책자가 아니며, 그 어떤 사회적 생산도 그에게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가 차라리 세이렌의 소리에 취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이디푸스의 여정이 아무리 길고 험하다 한들 결국 그것은 완벽하게 닫힌 결말이며, 자가당착이고, 유전자의 교환이 없는 완벽한 자기복제의 은유인 것이다.<br><br>이제 설화 속의 라푼쩰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라푼쩰의 성城은 음경의 거푸집이다. 라푼쩰은 버지니티의 성에 갖혀 성의 주인을 기다린다. 성은 항상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다. 즉, 성에는 문이 없지만 라푼쩰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면 성에 오를 수 있다. 설화속에서 왕자는 라푼쩰의 버지니티를 획득한 댓가로 눈이 멀게 되지만 라푼쩰의 눈물로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즉, 설화속 라푼쩰의 신탁은 '머리를 늘어뜨려라!'라는 주문을 듣는 것. 관능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되는 셈이다.<br><br><br><br><a href="http://imgur.com/fA9qZQt"><img src="http://i.imgur.com/fA9qZQt.jpg" title="source: imgur.com"></a><br>레메디오스 바로 [지구의 덮개를 수 놓으며] (1961)<br><br>[사태가 진전됨에 따라, 그녀는 결국 많은 것들에 눈을 뜰 것이다. 피어스 인버라리티나 그녀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아니지만, 이번 일이 있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어떤 것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었다. 이번 일에서 자신이 어떤 중개나 완충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결국엔 다시 고립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영사 기계가 제대로 조정하지 않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초점이 맞지 않는 영화를 볼 때처럼, 모든 것이 선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호기심 많고 사색적인 라푼첼처럼 마술에 걸려 자신이 살고 있는 키너릿 어몽 더 파인스에서, 그리고 안개 속에서 포로가 되어, "자, 당신의 머리카락을 내려뜨리시오."라고 말해 줄 누군가를 찾는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왕자가 피어스임이 드러났을 때, 그녀는 기꺼이 머리핀을 빼고 고상한 머리카락을 눈사태처럼 속삭이듯 내려뜨렸다. 다만 피어스가 반쯤 올라왔을 때,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는 사악한 마법에 걸려 거대한 가발이 되어 버렸고 그는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지닌 피어스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많은 신용카드 중 하나를 사용해 탑의 자물쇠를 연 다음, 소라 모양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왔다. 사실 그 사악한 속임수가 좀 더 자연스럽게 그에게 드러났더라면 처음부터 아예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조차도 그 탑 속의 감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했다.]<br><br>위에 인용하는 바, 에디파 마스(빠르게 발음하면 오이디푸스처럼 들리는)의 버지니티를 획득한 사람은 옛 애인인 피어스이다. 그런데 에디파의 머리카락은 설화 속의 라푼쩰과는 달리 어쩐지 부실하다. 라푼쩰과 달리 에디파의 긴 머리는 가발이며, 그것은 벗겨지기를 일삼아 결국 피어스는 신용카드(자본주의의 미국을 상징하는)로 문을 열고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온다. 머리카락이 라푼쩰의 그것과 같은 에디파의 관능이라지만, 에디파의 것은 가발이므로 언제든 썼다가 벗었다 할 수 있다. 오!!! 장하도다. 진화한 라푼쩰! 에디파는 레메디오스 바로의 [지구의 덮개를 수 놓으며(1961)]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이것은 왕자가 채 죽기도 전에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왕자(피어스)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역시나 진화된 라푼쩰의 모습이 아닐까?<br><br>이후 평범한 중산층의 가정주부로 살던 에디파에게 옛 애인 피어스의 부음이 들려온다. 피어스의 부음은 에디파의 신탁이 깨어졌음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는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이 듣지도 못한 신탁대로 움직이지만, 에디파는 깨진 신탁을 듣고 거듭나는 것이다. 애인 피어스의 유언집행자가 되어 즉, 자신이 신탁의 주인이 되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잡음들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트리스테로를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에디파가 눈뜨게 되는 기이한 세상은 절대적인 진리가 부재한, 마치 생명의 코드인 DNA처럼 원본과 복제본이 역전된 관계로 이루어져있다. 오이디푸스의 세상이 신탁에 의한 일원一元(역사)의 세상이라면 에디파의 세상은 다원多元(해체된 역사)의 세상인 것이다. <br><br>그러므로 에디파의 여정은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의 이행이며, 주술(이분법적 사고관)에 걸려 지구의 덮개를 수놓고 그 세상에 다시 자신이 갇히는 폐쇄적인 위치에서 끝없이 열린 세계로, 다양성으로, 열린 결말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에디파가 피어스의 유산(결국 그것은 원래 그녀의 것인데)을 찾는 과정에서 세상에 눈뜨는 여정은 그녀가 진화된 라푼쩰이며, 들뢰식의 산책자로서의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능동적 과정이다. 오이디푸스의 결말이 자기복제의 의한, 즉 내부와 외부를 완벽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의 자가당착적 종말인데 반하여, 에디파가 나아가는 세계는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까지 한 '여성적인 포용과 교류'의 세상이다. 산책자에게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없다는 들뢰즈의 말은 에디파에게 내려진 새로운 신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br></div><div><br></div>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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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다우트]의 알로이시스는 완고한 종교 전통의 수호자로 보입니다만, 정작 그녀 역시 남성 카르텔이 지배하는 종래의 사제단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모순적이지요. 밤새 몰아치는 광풍에 질색하지만 이미 내심으로는 자신이 풍파 속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고요. 죽은 남편 대신 십자가로 초월됨을 택했으며 의심 대신 확신을 택했습니다만 세상은 그녀를 앞질러나가고, 가발의 자유로운 탈착 속에 그녀 자체가 풍화되어 버리죠. 관능 없는 그녀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풋내나는 신참 수녀의 동정과 위로 뿐입니다. 그러니 깨어진 신탁을 두고 눈물을 흘릴 밖에요. 알로이시스가 에디파를 만났다면, 밀러 부인이 보여준 것 이상의 불가해함과 맞닥뜨렸겠지요.
오이디푸스왕에 대한 해석은 정말 천양각색이군요.
‘로고스’를 발달시키는 것은 ‘휘브리스’를 범하는 것이다라는 고전적 해석부터
가장 널리 알려진 프로이트의 해석 - 성장의 과정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죄책감에 눈을 찌르는 행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근대적 주체성의 자리로서의 오이디푸스.
(신형철이라면(개인적으로 신형철을 좋아해서 참...) ‘몰락 이후의 첫 표정’이 문학이라 했으니 문학의 자리라 말하겠지요)
뭐 이정도야 접해온 해석이지만, ‘자기생산을 거듭하는’ 닫힌 세계로서의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에 대한 해석은 처... 더 보기
‘로고스’를 발달시키는 것은 ‘휘브리스’를 범하는 것이다라는 고전적 해석부터
가장 널리 알려진 프로이트의 해석 - 성장의 과정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죄책감에 눈을 찌르는 행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근대적 주체성의 자리로서의 오이디푸스.
(신형철이라면(개인적으로 신형철을 좋아해서 참...) ‘몰락 이후의 첫 표정’이 문학이라 했으니 문학의 자리라 말하겠지요)
뭐 이정도야 접해온 해석이지만, ‘자기생산을 거듭하는’ 닫힌 세계로서의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에 대한 해석은 처... 더 보기
오이디푸스왕에 대한 해석은 정말 천양각색이군요.
‘로고스’를 발달시키는 것은 ‘휘브리스’를 범하는 것이다라는 고전적 해석부터
가장 널리 알려진 프로이트의 해석 - 성장의 과정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죄책감에 눈을 찌르는 행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근대적 주체성의 자리로서의 오이디푸스.
(신형철이라면(개인적으로 신형철을 좋아해서 참...) ‘몰락 이후의 첫 표정’이 문학이라 했으니 문학의 자리라 말하겠지요)
뭐 이정도야 접해온 해석이지만, ‘자기생산을 거듭하는’ 닫힌 세계로서의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에 대한 해석은 처음 접했습니다. 들뢰즈를 읽지 않아 종종 텍스트들을 보다보면 마주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었는데, 약간 알듯(말듯) 합니다.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제49호 품목의 경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로고스’를 발달시키는 것은 ‘휘브리스’를 범하는 것이다라는 고전적 해석부터
가장 널리 알려진 프로이트의 해석 - 성장의 과정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죄책감에 눈을 찌르는 행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근대적 주체성의 자리로서의 오이디푸스.
(신형철이라면(개인적으로 신형철을 좋아해서 참...) ‘몰락 이후의 첫 표정’이 문학이라 했으니 문학의 자리라 말하겠지요)
뭐 이정도야 접해온 해석이지만, ‘자기생산을 거듭하는’ 닫힌 세계로서의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에 대한 해석은 처음 접했습니다. 들뢰즈를 읽지 않아 종종 텍스트들을 보다보면 마주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었는데, 약간 알듯(말듯) 합니다.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제49호 품목의 경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사를 분석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거칠고 단순한 툴에 속합니다. 라캉의 정신분석이나 지라르의 삼각형같은 툴도 자주 사용되지요.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문학을 해체하여 문학이 주는 근원적인 쾌감을 만족시키는 방법과는 괴리가 있습니다. 문학이 세상이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듯, 이러한 툴은 문학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일 따름이지요.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인지 자신이 없네요.
대체로 고전적 서사의 경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현대에 이르러선 그 양상이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제가 사용한 들뢰즈식의 해석도 그런 양상 중 하나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대체로 고전적 서사의 경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현대에 이르러선 그 양상이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제가 사용한 들뢰즈식의 해석도 그런 양상 중 하나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가장 적합한 방법은 현상학적 접근법이 아닐까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인 김사과의 [미나]를 예를 들어 말씀드려볼께요.
이 작품의 줄거리는 작품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반인륜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인공인 수정이 한때 절친이었던 미나를 부엌칼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내용이니까요.
이 작품을 두고 독자들 사이에 있었던 설왕설래는 이런 것입니다.
한국의 입시위주의 교육이 낳은 폐해를 그린 듯 하나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굉장히 초... 더 보기
제가 좋아하는 작품인 김사과의 [미나]를 예를 들어 말씀드려볼께요.
이 작품의 줄거리는 작품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반인륜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인공인 수정이 한때 절친이었던 미나를 부엌칼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내용이니까요.
이 작품을 두고 독자들 사이에 있었던 설왕설래는 이런 것입니다.
한국의 입시위주의 교육이 낳은 폐해를 그린 듯 하나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굉장히 초... 더 보기
창작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가장 적합한 방법은 현상학적 접근법이 아닐까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인 김사과의 [미나]를 예를 들어 말씀드려볼께요.
이 작품의 줄거리는 작품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반인륜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인공인 수정이 한때 절친이었던 미나를 부엌칼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내용이니까요.
이 작품을 두고 독자들 사이에 있었던 설왕설래는 이런 것입니다.
한국의 입시위주의 교육이 낳은 폐해를 그린 듯 하나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굉장히 초보적이고 낮은 차원의 것이죠.
모순 투성이의 세계를 경멸하는 방법으로 입시제도에 완벽하게 적응한 수정의 유일한 친구인 미나는 친구의 자살을 계기로
세계에 대한 포즈를 경멸에서 동정으로 바꿉니다. 이때, 수정은 미나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정은 미나를 갖고 싶고 결국 그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미나를 죽이게 되지요.
현상학적 심리접근법으로 보았을 때 미나의 선택은 반인륜적인 것도 아니고 잔인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미나]라는 작품의 서사안에서는 그것이 진리인 셈이지요.
인물의 행위를 작품외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작품 안에서의 진실로 이끄는 것,
즉, 행위의 적절성 여부는 작자가 지향한 뜻과의 동등성에 의해 결정되는 방법이 현상학적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방법이 창작자가 가져야할 가장 적절한 입장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품인 김사과의 [미나]를 예를 들어 말씀드려볼께요.
이 작품의 줄거리는 작품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반인륜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인공인 수정이 한때 절친이었던 미나를 부엌칼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내용이니까요.
이 작품을 두고 독자들 사이에 있었던 설왕설래는 이런 것입니다.
한국의 입시위주의 교육이 낳은 폐해를 그린 듯 하나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굉장히 초보적이고 낮은 차원의 것이죠.
모순 투성이의 세계를 경멸하는 방법으로 입시제도에 완벽하게 적응한 수정의 유일한 친구인 미나는 친구의 자살을 계기로
세계에 대한 포즈를 경멸에서 동정으로 바꿉니다. 이때, 수정은 미나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정은 미나를 갖고 싶고 결국 그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미나를 죽이게 되지요.
현상학적 심리접근법으로 보았을 때 미나의 선택은 반인륜적인 것도 아니고 잔인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미나]라는 작품의 서사안에서는 그것이 진리인 셈이지요.
인물의 행위를 작품외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작품 안에서의 진실로 이끄는 것,
즉, 행위의 적절성 여부는 작자가 지향한 뜻과의 동등성에 의해 결정되는 방법이 현상학적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방법이 창작자가 가져야할 가장 적절한 입장이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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