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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0/12 08:13:10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전직 호주 총리 만난 썰
1. 소개

디 아너러블 케빈 러드 (Hon. Kevin Rudd)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그리고 2013년에 잠시 호주 총리직을 맡은 노동당 정치인입니다. 역대 호주 총리중 유일한 리버럴이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할 정도로 리버럴이 좋아할 만한 정치적인 선택을 많이 내렸었어요. 그는 역사상 최초로 호주 원주민들에게 지난 세대의 과오에 대해 공식 사과한 총리이며 (역사 문제), 교토의정서에 서명한 총리이고 (기후 변화 문제), 재임 중 동성결혼을 지지했으며 호주 역사상 내각에 가장 많은 여성 장관을 임명한 총리이기도 해요 (젠더 문제). 현 캐나다 총리 쥬ㅣ스탱 트휘도의 못생긴 버젼 같은 느낌? 그래서 집권 초기엔 어마어마한 지지를 받았대요.

하지만 이것보다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부분은 이양반이 중국 전문가라는 점일 거예요. 호주국립대(ANU)의 동양학과 출신으로 중국어를 네이티브에 가깝게 구사할 뿐더러 심지어 사위 중 하나가 중국인이던가 그래요. 또 호주가 아태지역의 일부이며 따라서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집권기간 내내 부지런히 아시아 출장을 다녔대요.

여기까지만 보면 엄청 이상적인 정치인인데.... 2010년 즈음에 광공업 섹터에 대한 증세정책을 비롯해서 몇가지 정치적 오판을 하는 바람에 지지율이 뚝 떨어지게 되고, 노동당내 반대세력에게 밀려서 사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문제의 반대세력이 인기가 영 없어서 2013년, 선거를 앞두고 다시 총리직에 복귀! 하지만 신통치 않은 선거 성적표를 받고 다시 사임했어요. 호주 정치인으로서의 커리어는 마 여기까지였습니다.

그 후엔 국제문제 전문가 등으로 미국 등지에서 열심히 산 모양이에요. 특히 아태지역의 빅이슈인 북핵문제, 그리고 북핵을 둘러싼 미-중관계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대요. 원래가 외교관 출신인데다 달변이고 또 영어네이티브 + 중국어 구사자라는 엄청난 장점을 살려서 올 중반 즈음 과감하게 유엔사무총장직에 도전을 했는데,

자국의 반대로 출마 무산 -_-;;

잘은 모르겠지만 사무총장 경선 룰에 그런 게 있나봐요. 출신국가의 공식적인 승인-지지가 있어야 한다나. 헌데 현재 호주 정권은 보수당 정권이에요. 노동당 정권이었어도 당 내부에 적이 많아서 됐을까말깐데 보수당 정권에겐 어림도 없지요.


2. 왜 영국에 왔나

몰라요. 한가한가;;;


3. 강연 내용

강연 주제가 엄청 재밌는 거였어요. 대강 [미-중 관계: 북핵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있나?] 이런 제목인데 연사가 전 호주 총리라니 강연장은 자연스레 인산인해를 이루었어요.

저는 과연 [미-중] 관계에 역점을 둘지 [북핵]에 강조점을 둘지 궁금해하며 봤는데 처음엔 전자를 이야기하는 듯하더니 결국 강연의 대부분을 후자에 할애하더라구요. 팩트를 설명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걸 지루하지 않게, 흡입력 있게 설명하는 걸 보니 역시 '끕수가 높은 증치인이다' 이르케 말할 슈 있었어요.

문제는, 지루하지 않게 흡입력있게 설명한 팩트들이 받아적어놓고보니 다 나름 잘 알려진 것들이어서 별로 건질 만한 게 없다는 것;;

그나마 그 중 몇 가지 신선했던 팩트들은 1) 지난 2014년, 아시아지역 군비지출이 통계작성이후 처음으로 유럽지역을 추월했다는 것. 2) 북한은 이미 핵을 보유했다고 봐야하며 생산능력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연간 5기는 만들어낼 거라는 것.

그래서 자기가 보기엔 지금 당장은 시리아 등의 문제가 더 급해보이지만 궁극적으론 북핵문제가 차후 10년 간 세계의 주목을 받을 최대 현안이 될 거라고 믿는대요. 뭔진 모르겠지만 국격이 올라간 느낌이군요.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어떻게 내야하느냐.... 이게 사실 좀 처참하대요. 핵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때로부터 근 20여 년이 흘렀는데 그간 투입한 다방면의 모든 노력들 (외교적 압박, 경제제재, 유화책 기타 등등)이 모조리 말끔히 실패했다는 거예요. 안보리 결의안이 네 번 나왔는데 사실상 다 실패한 거래요.

그러다보니 한국은 싸드를 도입하고, 미/일은 이 결정을 지지하고, 러시아는 우려를 표하고, 중국은 이 일에 매우 빡쳐서 매우매우 이례적인 외교수사를 쓰고 그런 상황이래요.

자 그럼 우째야하는가, 여기서 케빈은 여섯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해요.



첫째. 암것도 안하고 가만 있는다. -->"지옥행 급행열차 (Train to Hell)"

둘째. 경제제재와 외교제재를 가한다. --> 해봤는데 안먹히잖아.

셋째. 6자회담으로 갑시다. --> 6자가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다른데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하거나 진화해서 맞추기가 어려움.

넷째. 북-미 양자 대화 --> 이게 가능성이 높은데 아마 안 될 이유가... 지난 2012년에 실제 오바마 행정부와 북한이 꽤 찐하게 대화를 했대요. 북경 외교가에서 북한 외교관과 미국 외교관이 같이 스타벅스 사먹으면서 이야기하면서 장밋빛 분위기가 흘렀는데... 12년 말과 13년 초에 미사일 쏘고 핵실험 하면서 으앙 망해버렸어요. 이 당시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이었는데 이 실패의 쓴 맛을 본지라 당분간은 가망 없지 않나 싶대요.

다섯째. 전쟁. --> 북한은 필시 망할 거래요. 하지만 상황에 따라 서울 거주민의 반은 죽을 각오를 해야한대요. 언제 전쟁을 할진 몰라도 북한이 수소폭탄을 만들어 배치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거 한 방에 서울에서 150만이 즉사, 500만이 크게 부상..... 그러므로 역시 불가능한 선택지.

여섯째. 다양한 방법으로 역내 긴장 완화. --> 자기가 보기엔 이거 밖에 없대요. 문제는 이걸 하려면 미국이 전향적인 자세로 북한 뿐 아니라 중국에게도 강한 유화정책을 써야한대요. 쌍방향 해법 (bilateral)이 불가능하면 단방향 (unilateral) 해법이라도 써야한다는 거지요. 유화책은 자고로 빅파워 쪽에서 먼저 써야 효과가 있는 법이래요. 왜냐하면 미국은 중국과 북한으로 인해 짜증은 날지언정 자기네가 지구상에서 순삭될 걱정은 안하지만 중/북, 특히 북한은 아주 진심으로 그걸 걱정하기 때문이래요.

관건은 미국이 중국을 설득하고, 중국이 북한에게 핵을 포기하도록 유인할 만한 토털 패키지를 제공할 수 있느냔데. 아마 안 될 듯.


4. 질의 응답

딱 "아마 안 될 듯" 하고 끝나버렸어요. 넘나 허무한 것. 그래서 질의응답시간이 되자 마자 관련된 추가 질문들이 나왔지요. 


첫째. 중국이 무얼 할 수 있으며 무얼 얻을 수 있느냐. 케빈이 말하길 중국은 미군과 국경만 공유하지 않으면 된대요. 따라서 북한문제가 안정되면 될수록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뗄 거라는 걸 분명히 해줄 필요가 있대요. 예컨대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싸드 뺄거고 남한 위주로 통일되면 미군이 완전히 철수할 것이다라는 메세지를 주라는 거지요. 한반도가 중-미간 완충지대가 되고 역내에 안정이 찾아온다면 중국 입장에서 나쁠 게 하나도 없대요.


둘째. 현 남한 대통령에 대해서. 자기가 두 번 정도 봤는데 북핵 문제에 관심이 많고 상황을 나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대요. 헌데 처음 봤을 땐 나름 유화적이었는데 최근에 봤을 땐 아주 화가 나있는 것 같았대요. 분위기가 와아아아안전히 (엄청 강조함) 달라보였대요.


셋째. 미 대선 결과가 어떤 영향을 끼칠까.

ㅎㅎㅎㅎㅎ

케빈: 우문이야. 트럼프가 이길 가능성이 없잖아.

여기서 뜬금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어요 ㅋㅋㅋ 그리고 그가 이어서 말하길

케빈: 정치인으로서 말하건대 이건 거의 확실해. 트럼프에겐 챤스가 없어. 전혀 그 판단력을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고,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당선 안 될 거야. 물론 내 예측이 틀릴 수도 있는데 그러면 내가 여기 다시 올테니 내 머리를 밟고 서줘용 (Stand on my head).

그리곤 이후로 힐러리 클린턴 이름을 부를 기회가 될 때마다 아예 President Clinton이라고 불러버렸어요. 자기 생각에 클린턴 대통령은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고 따라서 북핵문제에 대해 말이 안되는 판단을 내리진 않을 거래요.

넷째. 데니스 로드맨에 대해서 한 말씀.

ㅋㅋㅋㅋㅋ 아니 이걸 질문이라고 ㅋㅋㅋ

케빈: 트럼프 정부에서 최초의 주북한 미대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일단 대선부터가 가능성이 ㅋㅋㅋ



5. 총평


전 나쁘지 않게 봤는데 동석했던 제 옛 지도교수이자 한국사 전문가 아조씨는 불만이 많았어요. 자기가 보기에 케빈이 하버드 같은 데서 씽크탱큰지 나부랭인지 하는 미국인들이랑 너무 씐나게 놀아서 감이 떨어진 것 같대요. 북핵문제에 대해 알고 싶었으면 씽크탱크 머시깽이랑 이야기하지 말고 북한에 직접 가봤어야 한대요. 아마 열심히 가봤다면 북한은 절대절대절대절대절대절대 핵포기를 할 애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거고, 그러면 핵포기를 [조건]으로 이런 저런 유인책을 제시한다 어쩐다 하는 판타지는 접었을 거래요. 지금 북한은 핵즉시북 북즉시핵 (核即是北 北即是核) 이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래요.

또, 북한 처럼 언제 사고 칠 줄 모르는 애들한테 핵무기를 쥐어주면 위험천만하다는 생각도 조금 바꿔 볼 필요가 있대요. 파키스탄은 북한보다 체제안정성이 훨씬 떨어지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하고 지역 안보 상황도 훨씬 위태로운 애들인데 멀쩡히 핵무기 들고, *용케 안쓰고* 잘 있잖아요? 북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해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있으며, 따라서 광기보다는 나름 합리적인 고민을 해가며 장기를 두고 있는 플레이어로 봐야한대요. 그러므로, 물론 여전히 위험한 애들이긴 하지만, 갸들이 핵무기 있다고 막 쏴제낄거라는 공포 역시 판타지래요.

후드려 패죽이지 않는 이상 얘들 손에서 핵을 뺐는 게 불가능하고, 패려다간 초가삼간이 다 탈 것이며, 냅둬도 막 쏴제끼지 않을 거란 게 분명하다면? 그냥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정상 국가 (normal state) 취급해주고 평양에다가 미국 대사관 설치하는 게 제일 좋은 해법이래요 (로드맨: !?). 비유하자면, 쫓아내거나 패죽일 수는 없으니 열라 성격 드럽고 짜증나는 룸메를 참고 견디며 살고, 살다보면 그래도 조금씩 좋아질 거라고 희망을 가져보는 게 최선이라는 거예요. 물론 미국은 죽어도 이렇게 안하려고 하겠지만요 -_-;;;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럴법해요. 나란놈 팔랑귀. 핵즉시북 북즉시핵이라면 결국은 꾹 참고 얘들이랑 이웃으로 같이 살아야하는 게 제일 현실적인 해법이겠죠. 아우 그런데 정말 민폐 이웃이에요. 어디 이사도 못가고 저걸 달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넘나 깝깝한 것.



끗.



8
  • 이제 나도 친구들한테 대북 전문가 행세할수 있어요 고마워요 아조씨
  • 현장감 넘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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