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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20 05:21:55
Name   영혼
Subject   이럴거면 그러지 말지.
#1
"찡찡대지말고 힘내서 시험 잘 쳐 임마. 그러라고 고기 사먹인거니까."

아주 오래전 꿈을 꾸었는데, 매일 같이 추억하곤 했던 날이였기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생생하게 그 날의 모든 것들이 느껴졌다. 그래 짜샤 고마워, 하며 그 아이는 커피 한잔 하자 요건 내가 쏜다 하며 당돌한 손놀림으로 카페 손잡이를 잡았다. 전역한지 이제 반년이 조금 지났을 때였고, 첫사랑이라는 여자 아이는 여전히 멍청하며 동시에 매력적으로 대학생으로서의 마침표를 찍으려 노력하고 있었으며, 얼마전부터 페이스북 따위에 힘들다고 징징대는 일들이 많아져 괜한 걱정에 고기라도 사먹이려고 굳이 먼 길을 나서서 온 날이였다. 아이스 아메키라노를 두잔 시키고 앉아서 기다리는 순간 그 아이는 헤어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순식간에 쏟아내었고, 나는 적당히 상대해주는 척 하다가 차가운 커피를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넘마, 첫 월급 타면 나한테 먼저 고기 쏘기다. 오늘 니가 먹은 거 영수증 가지고 있을꺼야."

진지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는 나를 보며 그 아이는 피식 웃었고, 첫 월급은 아무래도 부모님한테 써야겠으니까 힘들 것 같고, 내가 취업하고 다이어트 하고 나서 걱정 없이 고기 먹어도 되면 연락 할께 그때 같이 먹자! 라며 그 아이는 나에게 약속을 건넸다. 나는 우선 한숨을 푹 쉬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살을 빼고 만나자고? 아이고, 이번 생애에 만나지 말자는 얘기구만. 고단수 먹튀야. 고단수야 역시. 라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발끈하며 주먹을 쥐었다가 펴곤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 웃고 말았다. 그 아이도 나를 따라 싱긋 웃었다.


#2
평소 새벽 다섯시 쯤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던 게 습관이 되어서였을까, 오랜만의 오후 근무를 몸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지 생각했던 시간보다 두어시간 일찍 눈이 떠졌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알람을 확인해 예정되었던 두어시간 이후의 알람을 진정시켰다. 괜한 꿈을 꾼 것만 같았는데 기억이 흐릿했다. 이른 시간의 기상 덕분에 뻐근한 몸은 관절 관절을 통해 비명을 질러댔고 수없이 태워댄 담배 연기의 증거만큼이나 머리는 아프다못해 뿌옇게만 느껴졌다. 습관처럼 잠에 들고 난 이후에 나를 찾은 사람은 혹시라도 없었는지 뒤적거리려 카톡을 켠 순간 아주 오랜 친우의 불운한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며칠 전부터 여자친구가 카톡에 굉장히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답답하여 통화를 하려고 해도 바쁜 일이 있다며 통 응하여 주지 않는다는 비관적인 소식과 함께, 그러던 그 아이가 느닷 없이 오늘 오후쯤 잠깐 시간을 내어 보자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였다. 그네들은 무려 500일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내었고, 그 친구와 나는 일수로 따지자면 몇백일은 커녕 반만일을 함께 멍청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니 한번쯤은 그 아이 얼굴을 보아도 괜찮지 않냐고 친구 녀석을 핀잔 준지 고작 이틀쯤이나 지난 날이였다. 나는 당혹스레 왜, 무슨 일인데 싸우기라도 했어? 라며 조심스레 답장을 보냈고, 동시에 여자친구에게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으며 피곤해서 출근 전까지 조금 더 누워있을 것 같다는 카톡을 보낸 뒤 눈을 감았다. 피곤에 쩔어 아직까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대는 관절들과 달리 생각은 또렷해졌고 머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아파왔다. 휴대 전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빠르게 떨어댔고, 나는 뻑뻑한 눈을 뜨며 휴대폰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3
"오늘 조금 일찍 퇴근해도 되겠습니까?"

쳐놀고 먹더라도 전공을 아주 조금이라도 살린다는 명목 하에 전공과는 코딱지나 콧털 만큼도 상관 없는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지 몇 개월이 조금 지난 오늘이였고, 할 일이 없어 괜한 이면지를 찢어다가 Middle East Raspiratory Syndrome이라는 철자를 대략 오십번 정도 쓸만큼 나른한 밤이였다. 그 놈의 메르스가 뭔지, 내가 배워온 대로라면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인 그 녀석은 언론에서 떠들거나 사람들이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만큼 무서운 놈은 아니였고, 이제껏 세상을 들썩이며 많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이나 공포, 혹은 죽음으로 이끌었던 다른 질병 놈들에 비해서 생각보다 약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메르스라는 놈 때문에 현재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예의 없고 형편 없으며 동시에 몹쓸 생각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며 동시에 메르스라는 질병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조용해진 대학 병원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느냐는* 불알 친구 녀석의 말과 함께,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순간 벙 쪘던 나는 오늘 밤에 만나 술이라도 한잔 하고, 이제껏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고 친구를 채근한 지 몇 시간이 지난 때였다. 나는 오후 열 시, 친구는 나보다 한 시간 이른 아홉 시 퇴근이였으니 친구 녀석에게는 수지타산이 안 맞는 약속이 될 게 뻔했고, 나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한시간 쯤 일찍 퇴근할테니 오늘 꼭 봤으면 좋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던 상급자에게 뻔뻔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뭐 그래. 할 일도 없고 사람도 없고.. 혼자 있기 심심하긴 한데, 둘이 있어도 심심하니까 먼저 가."
"네 고맙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4
"형 그 얘길 먼저 해주셨으면 참 좋았을 것 같아요."

여자친구 때문에 몇날 며칠을 고통 받던 동생놈에게 상담 같지도 않은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 줄 알았으면 이런 연애 시작조차 안했을 거라고 푸념을 늘어놓은 게 화근이였다. 그 자식은 아주 이쁘장한 여자 아이와 오랜 시간 교제를 하고 있음에도 문란하게도 많은 여자들과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고, 근본부터 나와는 달랐던 게 아무래도 생긴 것 부터가 어마어마했던 그 자식은 이제껏 잘 생긴 얼굴 덕분에 이야기를 잘해왔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눌한 말씨로 나에게 말했다. 얼마 전 우연히 함께 술을 마시게 된 스무살 여자 아이가 너무 이쁘고 착해보이며, 마음이 설렐만큼 그 아이에 대해 좀 더 깊게 알고 싶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 아이에게 남자란 동물은 애초부터 쓰레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얼버무렸다. 여자친구도 있는 자식이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고 그러면 안되는거야. 라고 응당 조금이라도 어른이라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나로서 할 수 있는 식상한 말을 나는 내뱉을 자격이 없었다. 친구 녀석은 눈치 없이 우리 둘이서 친구의 전 여자친구가 저지른 일들을 차근차근 정리해서 잘못에 대한 내용증명이나 영수증 같은 걸 써붙여서 후련해져야만 하는 자리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나의 첫사랑을 불러내게 되었다고 말했고, 나는 병신처럼 그 아이가 온다는 그 한 마디와, 나의 의미 없는 페이스북 똥글에 달린 첫사랑의 짧디 짧은 한 마디에 이미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던 순간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퇴근 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5
여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이상의 정보를 제공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아주 오랜 불알 친구이며 같은 대학인 친구 녀석과, 나의 입학 동기인 내 여자사람친구가 우연히도 같은 동아리에 속해 있었으며, 그 둘의 관계가 생각보다 긴밀했고, 내 친구의 이별을 달래기 위해 셋이서 만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동기가 여자 아이며 이 부분에 대해 미리 말해둬야 할 것만 같았고, 그 아이는 당연히도 굉장히 못 생겼다는 정도의 정보만을 미리 제공했다. 어쩌면 그 아이가 굉장히 못 생겼다는 부분은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아니지. 며칠 단위로 헤아리려면 손가락이 분질러질만큼 오랜만에 본 그 아이는 굉장히 이뻤고, 아니지 아니야. 예전에도 이뻤지만 오랜만에 나이가 들어 만난 오늘의 술자리에서도 이쁜 모습은 여전했고, 금방 퇴근했다는 것을 표현이라도 하듯 눈가에 눌러붙은 다크서클이나 옅어진 아이라인 같은게 꼴사납기는 커녕 묘하게 애닳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나도 애지간히 미친놈이거나 쓰레기인가봐. 나에게 현답을 얻은 듯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는 동생 놈의 잘 생긴 얼굴이 왠지 모르게 스쳐지나가고, 동시에 여자친구의 걱정스런 문자도 스리슬쩍 지나가고, 다시 실연 당한 내 친구와 여전히 짜증날만큼 이쁜 내 첫사랑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눈에 띄었다. 자기혐오는 처음부터 함께 했지만, 몇십분전부터 참아온 변의처럼 때때로 강렬하게 나를 쿡쿡 찔러댔다.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해진 테이블에 손을 얹고선 불알 친구녀석에게 나는, 이런 말하면 굉장히 싸가지 없게 느껴지는 거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사실 너네 헤어질 것 같았어. 지난 달부터 그런 생각이 정말 깊게 들더라. 그게 오늘일줄은 몰랐지만... 근데.. 아니.. 뭐, 쳐맞을꺼 같으니까 화장실 좀 갔다올께. 라며 담배나 휴대폰 같은 여러가지들을 챙기고 자리를 나섰다. 친구에게 바짝 날이 선 말을 내뱉은 것보다, 이런 순간에도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음에 스스로가 너무 역겨웠다. 눈치 없게 심장은 여전히 쿵쾅대기만 했다.


#6
새벽 두시가 조금 더 넘은 시간까지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알코올을 주고 받았고, 지나고 나서야 생각해보면 그 많은 열변들을 그동안 토해내지 못해 어찌나 답답하게 살았을런지 걱정이 될만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야 벌써 두시도 넘었어. 이제 슬슬 가야지. 라는 이야기가 서로에게서 튀어나왔고, 지폐 몇장을 건네는 나의 손을 밀어내고 굳이 나서서 계산을 하겠다는 여자 아이를 이겨낼 자신이 없어 그리하라고 한 이후였다. 나는 여자 아이 모르게, 친구에게 밀쳐졌던 지폐 가운데에 만원 짜리 한 장을 건내며 요거면 택시 타고 집까지 갈 수 있지? 라며 빠른 발음으로 친구에게 물었다. 내 불알 한쪽인 그 자식 또한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폐를 쑤셔넣었다.
계산을 하고 나온 밤거리는 술기운에 쩔어 굉장히 아름다우며 어지럽게 느껴졌고, 아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빨리 집에가서 쳐 자야지,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만큼 화려했다. 불알친구가 택시타고 먼저 가면 그 아이랑 함께 택시를 타고 집엘 따라가버릴까? 술 마시고 집에 가면 쫓겨나서 밖에서 자야되는데 요즘 세상이 무서우니까 하룻밤만 재워주라며 그 아이에게 징징대면 왠지 띠껍고 흔쾌하게 그러라고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아냐 무슨 미친 생각이야.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노력했다. 여자친구는 지금 내가 집에 가서 누울 때가 되어서야 잠에 들거라는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뜨문뜨문 보내는 내 문자에 칼같이 답장을 했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전화를 백통, 아니 천통이라도 때릴 기세였다. 여자의 감이라는게, 참 무서워. 남자는 그냥 쓰레기 같은데 말야.
어영부영 혼자서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우리를 반기는 새벽 택시 두 대에 첫사랑과 불알 한 쪽이 나누어타고 황급히 도로변을 빠져나갔다. 어어 조심히 가, 라며 얼빠진 채 택시에다가 손을 흔드는 나의 모습은 생각보다 형편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부끄럽더라도, 구차하게 느껴지더라도 꼭 한번은, 대체 왜 그랬던거냐고 묻고 싶었던 수많은 의문들이 불빛들과 함께 스쳐지나가는 듯 했다.


#7
친구놈에게 택시비를 줘버렸으니 나는 택시를 탈수도 없는 노릇이였고, 시내에서 술을 먹고서 어렸을 적 종종 30분 컷을 목표로 걸어갔던
우리 동네가 크게 멀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알코올에 절어 숙면 중인 하체 근육들을 기상시켰다. 어영부영하며 담배나 한 두대 피우던 사이 불알 친구에게서 집에 잘 도착했으며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다는 짧은 전화통화를 주고 받게 되었다. 어 그래 푹 자라. 나도 금방 들어갈 듯. 하며 통화를 끊으려는 순간, 불현듯 친구녀석에게 물어봐도 도움 되는 대답을 듣지 못할 질문이 내 안에서 뿜어져나왔다.

"야 근데, 나 지금 대명동 가서 그 아이한테 커피나 한잔 하자고 하면 욕 꽤 많이 먹을까? 그래도 되지 않나? 우리 사이에?"

"아 뭐.. 니가 어떻게 하든 니 선택을 존중할거긴 한데, 내가 아는 너라면 내일 아침에 왜 안 말렸냐면서 욕하고 후회할꺼야.
니 알아서 해. 난 잔다. 지금 기분이 되게 별로네. 너무 싱숭생숭해."

"야 내가 그랬잖아 헤어지고 밖에 있으면 되게 괜찮은 것 같은데 집에 들어가서 신발을 벗는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난다니까. 울려면 울어라"

"잔다. 안녕."

나는 어차피 그 아이의 동네까지 갈 택시비를 지금 당장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멀쩡히 ATM을 찾아가 현금을 뽑고 그 현금을 지갑에 쑤셔넣을만큼 내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에휴. 집에나 가야지. 삼십분하면 가겠지. 하며 터덜터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그 아이가 잘 들어갔는지 정도는 전화해서 물어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고쳐잡고 주소록을 뒤적거리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번이나 채 울었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알 수 없는 흥분이 나를 감싸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보세요?"


#8
"이럴거면 그러지 말지 그랬어. 나는 한달에도 수십번씩 후회하는 연애를, 이제 끝낼 명분을 찾지 못해서 2년을 넘게 어영부영 만나고 있는데, 그냥 나한테 이럴거면 그런 말이라도 하지 말지. 내가 기다리게라도 하지 말지. 가끔 들리는 니 소식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됐는데."

".. 꼭 봐. 8월 1일에 딱 대구에서 떠날거니까. 그 전에는 꼭 한 번 만나자."

"또 그러네. 얌마 이번에도 내가 먼저 연락했지. 맞짱 뜨는것도 아닌데 선빵이 중요한건 아니지만 넘마 나한테 저지른 일들이 있는데 좀 나한테 잘하지 그랬어. 난 그렇게.."

"니가 나한테 정말 잘해줬던 거 알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난 지금 여자친구가 있고, 너는 내가 좋아했던 시절보다 꽤 많이 늙었고, 우린 서로 담담하게 예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할만큼 나이가 들었는데도 니가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오늘 너랑 같이 술 한잔 할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혼자서 곰곰히 왜 대체 왜? 내가 얘가 왜 좋았던거야? 라고 고민했다가 우리 만나고 너 딱 보자마자 아, 내가 그럴만도 했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돈데. 그러지는 말지."

"흐하하 야 아무리 술김이라도 그렇게 내가 이쁘게 보인다니까 고마워. 이쁘게 봐줘서 정말 고마워"

"됐고, 가기 전에 한번 봐."


#9
많고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서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때였다. 느닷없이 입을 뗀 그 아이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남자친구와 이제는 정말로 굿바이 했다는 그 아이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였다. 평소엔 헤어지자하고 하루 이틀이면 너무 후회되고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다시 연락하여 서로 질질 짜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었더라는 이야기를 하던 그 아이는, 곰곰히 술집 천장을 바라보더니 벌써 한달이나 다되가는데 이젠 아프지도, 미안하지도 않고 그냥 그 사람이 잘 살았으면 좋겠단 생각 뿐이야. 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불알 친구녀석은 나를 보며 왠지 모르게 씁쓸하게 웃었고, 만약 나였더라도 나를 보고 있었다면 그런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10
"그래.. 7월에 꼭 보자. 그전엔 나도 떠날 준비를 좀 많이 해야되고, 알아볼게 많아서 바쁠 것 같아"

"너나 나나 월초면 근무표 짜이니까, 7월 초쯤에 내가 염치불구하고 다시 연락할게. 그 때 얘기해."

"그래.. 꼭 연락해야돼."

"나도 너만큼.. 아니 너보다 간절했는데, 우리 결국 이렇게밖에 못 만났네. 너 이제 자야지 내일 출근도 하면서. 빨리 자."

"아.. 나 사실 지금 과자 먹고 있어.."

"이것 봐라 살 뺴고 만나자는 말 자체가 순전 뻥이라니까."

"크히히 그런거 아니였어 절대로"

"그래 아니겠지 임마. 비록 이렇게 만났지만, 오늘 만나서 정말.. 음.. 좋았어. 그냥, 좋았다. 자라 짜샤. 내일 출근해야지. 나도 집 근처야."

"그래. 조심히 가. 나도 오랜만에 너 보니까 되게 좋더라.
다음에 꼭.. 그래. 다음에 꼭! 다음달에 꼭 보자. 알겠지? 연락할께. 아니 연락해. 끊을게. 안녕."


#11
뚝하며 끊어진 그 아이와의 통화를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아직 절반도 채 오지 못한 대로변을 한 걸음씩 정복하기를 포기하고 근처의 PC방에 들어가 편안한 의자에 내 몸을 맡겼다. 넘마, 이럴거면 그러지 말지. 너무 졸려. 기절할 거 같아. 오타도 너무 많이 나. 손가락이 말을 안 듣는데 수백번이나 엉망으로 쓰이는 단어들을 고쳐쓰며 징징거려야 할만큼 힘든 날이 될거였으면, 혹시나 하고 썼던 우리 이야기에 좋아요 누르지 말지. 결국 설레기만 하고 아무 것도 아닐거였으면서. 나는 내일 숙취와 함께 모든 현실을 이겨내야 할텐데. 이렇게 될거였으면 그냥 그러지 말지. 혼잣말만 늘어가잖아. 전하지도 못할말만. 쓰레기처럼.
나나 너나, 이럴거면 그러지 말지. 이럴거였으면, 그냥 이런 관계였을거면, 술에 취해 미세요였는지 당기세요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출입문을 붙들고 괜한 씨름을 하면서 낄낄댈만큼 엉망일거였으면, 우리 그 때는 그런 식은 아니였어야, 그러지 말았었어야 됐는데.






*이오공감 - 한 사람을 위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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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제가 끈을 놓치 않았던 이유는 막연하게나마 훼손(?)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할까요. 처음에는 순수한 감정이라고 생각했고 제가 점점 자라나면서 그건 묻어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은 기억과 고마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친구하고 나름 자주 봅니다. 제가 여자친구가 있을 때는 서로서로 조심했었고 그 친구는 재미있게도 이후로 계속 남자친구가 없군요 자기 말로는 주변에 원하는 남자가 없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눈이 높은겁니다(!!)

    지금은 그 친구를 보면 좋지만 그 시절의 뜨거움 같은 건 그리 느껴지지 않네요. 그건 제가 변한 건지 혹은 원래의 모습이었어야할 나를 찾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자라면 그 때 기억은 추억이고 후자라면 한번 쯤 겪는 시행착오라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뭔가 주저리 주저리 썼는데 결론 같은 건...없네요;; 그냥 영혼님 글에 묻어가면서 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요. 이제 영혼님의 감정을 과거의 저를 기억하면서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는 저인지라 뭔가 조언을 해드릴 수는 없겠지요. 힘내시라는 말씀 밖에요.

    요즘은 넷 상에서 이런 스타일의 글을 올려주시는 분이 잘 없어서 영혼 님 글을 보면 반가움이 앞섭니다. 추억으로 곱씹을 수 있을 때 종종 글 올려주시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옆 동네에서 after diary라는 어설픈 제목으로 종종 글을 쓰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에세이의 십중팔구는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였기도 했었죠.
    가만 생각해보니 예전 글들에 비해서 지금 이 글은 너무 불친절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갖게 된 감정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꽤 많은 에피소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글이 너무너무 길어져버리는데다가 본래 하려 했던 이야기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별 수 없이 이런 식으로밖에 쓸 수 없었네요. 아무래도 전 제대로 된 글쟁... 더 보기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옆 동네에서 after diary라는 어설픈 제목으로 종종 글을 쓰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에세이의 십중팔구는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였기도 했었죠.
    가만 생각해보니 예전 글들에 비해서 지금 이 글은 너무 불친절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갖게 된 감정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꽤 많은 에피소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글이 너무너무 길어져버리는데다가 본래 하려 했던 이야기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별 수 없이 이런 식으로밖에 쓸 수 없었네요. 아무래도 전 제대로 된 글쟁이는 못되나봅니다.
    어제는 참으로 이럴거면 그러지 말지, 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밤이였습니다. 케케묵어서 대체 어디에 숨어있었냐 싶을만큼 사소하고 자잘한 의문들이 닭살 돋듯 무수히 제 마음에서 삐져나왔고, 그 의문이 시작되었을때부터 지금까지 결코 쉽사리 해소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보다 숙취는 심하지 않아서 몸은 굉장히 멀쩡한데, 마음은 아직 너저분합니다. 고작 한 번의 술자리인데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네요. 왜 끈을 놓지 못하는지, 이렇게 놓지 못할 것이였으면 예전 그 날들에 저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박초롱
    절반쯤 읽었을 때 저도 모르게 백아연의 신곡이 생각나더라니요. 어쨌거나 그렇게 옛사랑을 다시금 만나볼 수 있다는 게 괜스레 부럽네요. 물론 지금 느끼시는 그 감정은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요. 저의 지난 날은 언제나 파국으로 매조지되어 그저 제 기억에 의존해 돌이켜보면 이게 추억인지 망상인지도 모를만큼 아스라하기만 하다 보니 한 번쯤 다시 만나 그 때를 돌이켜보며 무던하게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막연함이 늘 있습니다.
    본문에 나와있는 페북 똥글도 사실 \"이럴거면 그러지말지\" 였습니다. 노래가 가삿말도 그렇고 별 생각 없이 듣기에, 또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듣기에 괜찮더라구요. 엊그젠가부터 그 노래를 자주 듣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고나니 자연스레 노랫말이 떠오르더라구요. 이럴거면 그러지말지 싶은 생각들도 그렇고. 제 지난 날도 사실 이런 식으로 미화될만큼 정갈했던 건 아닙니다만 서로가 어느정도 결핍되어 있거나 그런 결핍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종종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이 친구 타지 가고 나면 이제는 굳이 보려고 애쓰지 않는 이상 못 보게 될텐데 제가 어찌해야할지 참 싱숭생숭하네요. 참, 지난번에 써주신 글들은 잘 읽었습니다.
    박초롱
    노래는 참 밝은데, 저도 그 노래를 들으면서 \'헤어지자고 할거면 왜 사귀자고 했니\'라는 말이 생각나서 심쿵했던, 아 아닙니다 제가 들은 얘기는 아니고 제 지인이 그랬다는 데 감정이입이 되서 그만. 그나저나 그 똥글을 읽으셨다니 고초를 겪으셨을 영혼님의 눈에 심심한 위로를 드립니다.
    거의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는 편이고, 어떤 사람과 있었던 일들이나 감정, 추억따위는 훨씬 더 쉽게 빛바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만 요 며칠간 그 생각이 철저하게 바뀌는 기분입니다. 괜히 만났나 싶어요. 괜히 또 보고 싶네요. 나쁜년..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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