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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9/08 08:35:15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메갈리아 이슈에 즈음하여
1.

사건(event)이 그 사건을 구성하는 주체와 객체보다 앞선다고 주장한 철학자들이 있었어요. 예컨대 '보다'라는 사건이 있기 전에는 그걸 보는 '나'도 없었고 내게 보여지는 '꽃'도 없었다는 거예요. 이 경우 "내가 꽃을 보았다"라는 문장의 구성성분을 사건 발생의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보았다'가 1등이요 나머지 둘은 공동 2등이 돼요.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싶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게 지혜로운 싯구처럼 들려요. 메갈리아 이슈가 있기 전까진 그 이슈로 싸우는 A와 B는 없었던 거예요. 이슈가 아예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A와 B는 어쩌면 좋은 친구로 남았을 거에요. 안타까운 일이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당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지지 정당의 정견과 무관하게 투표를 했어요. 보수당 지지자들도, 노동당 지지자들도, 대략 반반으로 갈라졌지요. 이슈가 이슈이니만큼 이 내홍은 봉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그래서 총칼로 현역 의원을 살해하는 일까지 생겼지요.

브렉시트 이전에 영국 노동당과 보수당 사이에 그어져있던 선들 역시 이런저런 이슈들이었어요. 건강보험이라든지, 복지 정책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전통적으로 노동당/보수당 지지층을 갈라 놓았지요. 크고 작은 이슈들이 새로 등장할 때마다 양당은 각자 기존의 입장에 맞는 자신들의 입장을 정해서 당론으로 정했고, 새 이슈들이 기존의 이슈보다 더 크지 않았기에 지지자들은 약간 불만이 있어도 대체로 기존 정당들의 결정을 지지했어요. 하지만 브렉시트는 기존 이슈들을 [덮어 쓸]만큼 파괴력이 컸고, 그래서 많은 유권자들이 "건강보험이고 복지정책이고 나발이고 네가 감히 브렉시트를 반대해?" 라며 격분해서 기존 정당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어요. 이런 의미에서 메갈리아 이슈는 어쩌면 소규모 한국판 브렉시트 이슈가 아닌가 싶어요.


2.

사건이 주체와 객체를 정의(define)하듯 이슈들이 조직을 정의해요. 하지만 어떤 이슈가 어떤 조직을 어떻게 정의해야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예컨대 누군가는 한국 정치판은 북한이슈로 뚜렷하게 정의되며, 그래서 정치인은 반공 아니면 종북이라고 믿는 반면 다른이는 반공과 종북 사이에 중간지대가 있을 거라고 믿고 또 다른 이는 반공과 종북 둘 다 잘못됐으니 북한 이슈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믿을 수도 있어요. 

조직 입장에서 보면 중간지대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파가 될 때가 가장 위험해요. 사람들은 특정 이슈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받아들일 수록 아군이 아닌 이가 꼭 적군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돼요. 그래서 자신의 의견에 십분 동조해주지 않으면 암구호를 물어 피아를 식별하려고 하지요. 김정은 개객기 해봐. 안해? 그럼 빼박 종북이네. 이때 해당 이슈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 혹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중간지대를 유지하고자하는 이들은 적당히 동조하거나, 숨거나, 아니면 조직에서 탈퇴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사라지게 돼요. 그렇게 되면 승리한 다수파는 [성토]의 향연을 벌이지요.

해당 이슈가 업데이트 될 때마다 관련 뉴스와 자료를 퍼오고, 수 백 수 천 명이 몰려와서 그걸 뜨겁게 소비하고, 그리고 다음 업데이트를 기다려요. 진지하게 토론할 파트너가 내부에 남아있지 않으니 이런 성토들은 대개 짧고 뭉툭하게 변하기 마련이에요. "쓰레기" 라든가 "가지가지하네" 라든가 "역겨워" 라든가 "빨갱이 아웃" 이라든가 하는 반응만 한껏 달리곤 끝나지요. 담론은 후퇴하고, 신중함은 사라져요. 질이 후퇴한 자리는 양이 채워요. 사람들은 양껏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렇게 통쾌감을 얻고 논의를 종료해요. 일베라든가, 오유 시사게 같은 곳을 가보면 대개 이런식이에요. 거기엔 소통할 타자가 없어요. 일정 수준 이상의 동질성을 확보한 개체들이 모여 만든 군체가 끝없이 독백할 뿐이에요.

자기 조직이 이렇게 되길 원치 않는 이들이 있어요. 자기가 사랑하는 조직의 이슈 소비 방식이 후퇴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이들의 전략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흑/백 사이에 중간지대를 끼얹는다든지 (한 번 이런 각도로 관찰해봤어요), 문제를 지양(止揚)함으로써 이슈 자체를 냉각시킨다든지 (이 이슈를 통해 이런 점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살벌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자 이슈와 무관한 소소한 이야기를 열심히 써서 올린다든지 (우리 고양이 예쁘죠), 다른 이슈를 소개한다든지 (지금 이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아니면 그저 간절하게 부탁한다든지 (제발 싸우지 말아요).


3.

메갈리아 이슈를 대하는 제 자세는 가능한한 홍차넷에서만큼은 이 이슈를 흑/백의 시금석(試金石)으로 만들지 말자는 거예요. "반메갈"의 기치에 화끈하게 동조해주지 않았다고 홍차넷을 "친메갈" 사이트라며 라벨링하고 가는 건 좀 너무하잖아요. 해당 이슈에 접근하는 다양한 각도를 소개하고, 각각의 접근에 어떤 장단이 있는지 토론하고, 극단주의적 시각에 어떤 맹점이 있는지 이야기하면서 가능한한 넓은 중간지대를 확보했으면 좋겠어요. 많은 회원 분들이 도와주신다면 가능할 것도 같아요.

어떤 분들은 이런 제 입장 표명(?)이 불쾌하실 테고, 그래서 차단하거나 탈퇴하실 수도 있어요. 생각해보니 벌써 한 분이 명백히 저 때문에 탈퇴했고 모르긴 몰라도 여러 분들이 이미 저를 차단하셨을 거에요. 그래도 전 제가 아주 못된 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곳은 이른바 "어느 누구나 와서 활동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요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는 곳이니까요. 온 세상이 시끄러울 때 차분한 곳이 한 군데 쯤 남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4.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지금 이곳은 새벽이라 피드백은 자고 일어나서 열심히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14
  • 장님이 코끼리를 파악하려면 여러사람이 더듬어 보는 것만큼 의견을 합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 제 머리 속 생각을 꺼내 놓은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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