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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6/17 07:53:32 |
Name | 뤼야 |
Subject | 안고수비(眼高手卑) - 신경숙의 표절시비에 대하여 |
안고수비는 눈은 높으나 솜씨는 서투르다는 뜻으로, 이상만 높고 실천이 따르지 못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오늘 아침 작가 신경숙의 표절시비 기사를 애인의 카톡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신경숙의 작품을 단 1페이지도 못볼 정도로 신경숙의 작품을 싫어합니다. 한번도 제대로 된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녀가 무슨 무슨 상을 탔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문학계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무척 작가로 살고 싶어하나 그녀의 솜씨는 서투르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알고 있는 표절시비만 해도 3번입니다. 그리고 표절한 문장을 봐도 한심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인들의 반응은 한결같습니다. 고작 이따위 문장을 베끼고 표절작가가 되다니... 언어는 인류 문명 최고의 결정체입니다. 치밀하고도 쉽게 파악되지 않지만, 인간의 인식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언어의 본질이죠. 문학 창작은 현재성을 소유하기 힘든 정신적 가치들을 만날 수 있게 만드는 단 하나의 도구입니다. 작가의 창조성이란 작가 자신만의 혼잣말로 시작해서 인류보편의 진실과 상통할 때 가능해집니다. 작가의 심미(深美)라는 것은 그럴듯한 문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정(抒情)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오, 무절제한 자기연민으로 꽃피는 것도 아닙니다. 작가는 자기도 타인도 아닌 제3의 눈을 가져야합니다. 이 중성적인 시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꼭 책을 펴듭니다. 눈꼽도 안떼고 머리는 산발을 한 채로 일하러 나가기 싫어 꾸물대는 제 오래된 습관입니다. 20대에는 책을 차마 덮지못해 밤을 홀딱 세는 짓도 잘 했습니다만, 이젠 늙은 관계로 쏟아지는 잠을 물리칠 수가 없네요. 어제 제가 요새 가장 공들여 읽고 있는 작가인 토마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다시 읽다가 잠들었습니다. 아침에 어제 읽다 잠든 부분을 좆다가 소식을 들었네요.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제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사람이 이 모양이라니 문학덕후의 눈에는 눈물이 고입니다. 제가 아주아주 좋아하던 유부남이 있었습니다. 유부남만 아니라면 제꺼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했던 분이지요. 역시나 이런 고백은 좋지 않지요? 하지만 사실인데 어쩌겠습니까? 제가 한창 블로그를 열심히 하던 시기에 그 분과 이웃이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제가 좋아하는 책(서평집)의 저자였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쭌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그랬더니 "안고수비" 단 한 마디를 제게 던지시더라고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 되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좋은 책들때문에 내 눈은 한없이 높아요. 그 책들을 뛰어넘는 책을 쓸 자신이 없어요. 저는 독자로 만족합니다."라고요. 출근하기 싫은 수요일이네요. 흐흐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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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알못에 가까운 터라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신경숙씨의 인기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만 그런게 아니라는 사실에 조그만 위안을 얻고 갑니다. 흐...
표절했다는 문장도 보니 표절해도 왜 이런 문장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문학계 표절 하니 생각나는게 고등학생시절에 읽었던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생각나네요. 제목이야 뭐, 브레히트의 너무나 유명한 시집 제목이니 오마쥬 내지 패러디라고 할 수 있겠는데, 소설은 그냥 하루키 스타일 그 자체였었죠. 몰랐을땐 참 몇번을 읽으면서 감동과 설레임으로 가득했었는... 더 보기
표절했다는 문장도 보니 표절해도 왜 이런 문장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문학계 표절 하니 생각나는게 고등학생시절에 읽었던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생각나네요. 제목이야 뭐, 브레히트의 너무나 유명한 시집 제목이니 오마쥬 내지 패러디라고 할 수 있겠는데, 소설은 그냥 하루키 스타일 그 자체였었죠. 몰랐을땐 참 몇번을 읽으면서 감동과 설레임으로 가득했었는... 더 보기
문알못에 가까운 터라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신경숙씨의 인기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만 그런게 아니라는 사실에 조그만 위안을 얻고 갑니다. 흐...
표절했다는 문장도 보니 표절해도 왜 이런 문장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문학계 표절 하니 생각나는게 고등학생시절에 읽었던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생각나네요. 제목이야 뭐, 브레히트의 너무나 유명한 시집 제목이니 오마쥬 내지 패러디라고 할 수 있겠는데, 소설은 그냥 하루키 스타일 그 자체였었죠. 몰랐을땐 참 몇번을 읽으면서 감동과 설레임으로 가득했었는데, 나중에 상실의 시대부터 해서 하루키 쪽을 읽다가 느꼈던 기시감과 배신감... 문학계 쪽에서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표절입니다.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장정일씨가 이 소설 표절 의혹제기를 했더라구요? 90년대 초중반의 장정일도 하루키 표절건에 대해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일텐데 말이죠. ;;
표절했다는 문장도 보니 표절해도 왜 이런 문장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문학계 표절 하니 생각나는게 고등학생시절에 읽었던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생각나네요. 제목이야 뭐, 브레히트의 너무나 유명한 시집 제목이니 오마쥬 내지 패러디라고 할 수 있겠는데, 소설은 그냥 하루키 스타일 그 자체였었죠. 몰랐을땐 참 몇번을 읽으면서 감동과 설레임으로 가득했었는데, 나중에 상실의 시대부터 해서 하루키 쪽을 읽다가 느꼈던 기시감과 배신감... 문학계 쪽에서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표절입니다.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장정일씨가 이 소설 표절 의혹제기를 했더라구요? 90년대 초중반의 장정일도 하루키 표절건에 대해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일텐데 말이죠. ;;
제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썩 좋아하지 않는 터라, 접한 작품이 많지 않습니다. 근데 그 중 하나가 핀천이었지요.
읽으면서는 계속 이건 무슨 소리인가. 이놈이 누구였던가. 이건 무슨 의미인가. 당최 알 수가 없구나. 싶었습니다.
알수없는 상징들이 난무해서, 내가 그냥 \'미끄러지고\'만 있구나 싶었습니다.
아무튼지간에 포스트모더니즘 하는 놈들은 변태같다. 뭐 그런 생각을 했지요.
곧바로 후식 먹듯 뒤쪽 작품 해설을 읽었습니다.
어... 에디파가 오이디푸스의 여성형 이름이구나. 1960년대 소설이었구나. 나왔을 때 미국 대학생... 더 보기
읽으면서는 계속 이건 무슨 소리인가. 이놈이 누구였던가. 이건 무슨 의미인가. 당최 알 수가 없구나. 싶었습니다.
알수없는 상징들이 난무해서, 내가 그냥 \'미끄러지고\'만 있구나 싶었습니다.
아무튼지간에 포스트모더니즘 하는 놈들은 변태같다. 뭐 그런 생각을 했지요.
곧바로 후식 먹듯 뒤쪽 작품 해설을 읽었습니다.
어... 에디파가 오이디푸스의 여성형 이름이구나. 1960년대 소설이었구나. 나왔을 때 미국 대학생... 더 보기
제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썩 좋아하지 않는 터라, 접한 작품이 많지 않습니다. 근데 그 중 하나가 핀천이었지요.
읽으면서는 계속 이건 무슨 소리인가. 이놈이 누구였던가. 이건 무슨 의미인가. 당최 알 수가 없구나. 싶었습니다.
알수없는 상징들이 난무해서, 내가 그냥 \'미끄러지고\'만 있구나 싶었습니다.
아무튼지간에 포스트모더니즘 하는 놈들은 변태같다. 뭐 그런 생각을 했지요.
곧바로 후식 먹듯 뒤쪽 작품 해설을 읽었습니다.
어... 에디파가 오이디푸스의 여성형 이름이구나. 1960년대 소설이었구나. 나왔을 때 미국 대학생들이 화장실에
WASTE니 나팔이니 낙서를 해댔구나. 껄껄. 이걸 유치하다고 해야 할지 밝고 쾌활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이분법적인 선택을 거부하고 제3의 선택을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 핀천의 주장인건가.
결국은 \'다른 세계\'를 기다려야 하는건가. 에디파가 마지막 경매를 기다리듯이.
(묘하게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습니다)
포스트모던은 남들이 해석해놓은 찌끄레기밖에 역시 섭취를 못하겠구나. 그런 씁쓸한 마음도 들었고요.
(기억이 잘 안나서 다시 뒤적거렸습니다)
핀천이 산업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어느쪽이든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60년대는 이미 지났고, 냉전도 끝났는데 사회는 왜 여전히 극단을 달리고 있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트리스테로를 만들어내기 때문일까요.
덕분에 다시 한번 훑어보게 되었네요.
이야기를 할려고 해도 도무지 기억이 안나서. 허허.
읽으면서는 계속 이건 무슨 소리인가. 이놈이 누구였던가. 이건 무슨 의미인가. 당최 알 수가 없구나. 싶었습니다.
알수없는 상징들이 난무해서, 내가 그냥 \'미끄러지고\'만 있구나 싶었습니다.
아무튼지간에 포스트모더니즘 하는 놈들은 변태같다. 뭐 그런 생각을 했지요.
곧바로 후식 먹듯 뒤쪽 작품 해설을 읽었습니다.
어... 에디파가 오이디푸스의 여성형 이름이구나. 1960년대 소설이었구나. 나왔을 때 미국 대학생들이 화장실에
WASTE니 나팔이니 낙서를 해댔구나. 껄껄. 이걸 유치하다고 해야 할지 밝고 쾌활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이분법적인 선택을 거부하고 제3의 선택을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 핀천의 주장인건가.
결국은 \'다른 세계\'를 기다려야 하는건가. 에디파가 마지막 경매를 기다리듯이.
(묘하게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습니다)
포스트모던은 남들이 해석해놓은 찌끄레기밖에 역시 섭취를 못하겠구나. 그런 씁쓸한 마음도 들었고요.
(기억이 잘 안나서 다시 뒤적거렸습니다)
핀천이 산업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어느쪽이든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60년대는 이미 지났고, 냉전도 끝났는데 사회는 왜 여전히 극단을 달리고 있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트리스테로를 만들어내기 때문일까요.
덕분에 다시 한번 훑어보게 되었네요.
이야기를 할려고 해도 도무지 기억이 안나서. 허허.
Eneloop 님// 사실 소설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서사나 주제의식이 뭉개친 채 포스트모던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달고 나오는 글들이 문학을 메마르게 한다는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핀천은 일상적인 장면을 일부러 비(불)합리하게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건 에디파가 일종의 주술에 걸린 라푼쩰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죠. 소설 속에서 에디파의 선택은 애매모호하고 비합리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하죠. 이 부분은 남성독자들에게 충분히 의아하게 여겨질만 하다고 생각해요. 에디파가 미지의 것에 끝없이 인력을 느끼는 것이 결국, 오이디푸... 더 보기
Eneloop 님// 사실 소설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서사나 주제의식이 뭉개친 채 포스트모던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달고 나오는 글들이 문학을 메마르게 한다는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핀천은 일상적인 장면을 일부러 비(불)합리하게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건 에디파가 일종의 주술에 걸린 라푼쩰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죠. 소설 속에서 에디파의 선택은 애매모호하고 비합리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하죠. 이 부분은 남성독자들에게 충분히 의아하게 여겨질만 하다고 생각해요. 에디파가 미지의 것에 끝없이 인력을 느끼는 것이 결국, 오이디푸스와는 다른 점인데, 에디파는 오이디푸스의 여성형이지만 오이디푸스식의 자가당착이 아닌 새로운 욕망의 길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제가 크라잉랏은 블로그에 길게 독후감을 올린 것이 있는데 나중에 홍차넷에 올려볼까 생각중입니다. 아... 정말 같이 이야기 나누게 되어 좋습니다.
제가 헤칼트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솔직한 열정때문이죠. 흐흐흐
음... 사실 저는 문학의 진짜 위기는 신경숙의 뻘짓같은 거라고 생각 안해요.
신경숙을 내다 버린지는 오십만년 전이기때문에 별로 신경이 안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진짜로 걱정되는 것은 독자가 자꾸 줄어든다는 것이에요.
신경숙이 저렇게 대놓고 막나갔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 중에서
누구도 자기가 어디서 무언가를 배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만큼 신경숙은 약은거죠.
독자가 성하면 감히 그런 짓을 못합... 더 보기
음... 사실 저는 문학의 진짜 위기는 신경숙의 뻘짓같은 거라고 생각 안해요.
신경숙을 내다 버린지는 오십만년 전이기때문에 별로 신경이 안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진짜로 걱정되는 것은 독자가 자꾸 줄어든다는 것이에요.
신경숙이 저렇게 대놓고 막나갔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 중에서
누구도 자기가 어디서 무언가를 배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만큼 신경숙은 약은거죠.
독자가 성하면 감히 그런 짓을 못합... 더 보기
제가 헤칼트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솔직한 열정때문이죠. 흐흐흐
음... 사실 저는 문학의 진짜 위기는 신경숙의 뻘짓같은 거라고 생각 안해요.
신경숙을 내다 버린지는 오십만년 전이기때문에 별로 신경이 안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진짜로 걱정되는 것은 독자가 자꾸 줄어든다는 것이에요.
신경숙이 저렇게 대놓고 막나갔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 중에서
누구도 자기가 어디서 무언가를 배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만큼 신경숙은 약은거죠.
독자가 성하면 감히 그런 짓을 못합니다.
사실 홍차넷에 문학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무도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보세요. 헤칼트님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제 글에 호응을 해주셨잖아요.
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문학의 수호자도 아니고 왜 이리 좋은걸까...아마 헤칼트님은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2012년 정도를 기점으로 그나마 좋은 문학 블로그를 운영하던 분들이 거의 다 문을 닫았어요.
그분들과 가끔 소통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갈데가 없어요.
특히나 Eneloop님과 나눈 이야기는 몇 번을 다시 봤는지 모릅니다.
애인한테 자랑도 했어요.
애인이 제게 Eneloop님은 정말 책 많이 읽은 분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숨은 고수를 발견하게 되어 정말 좋아요.
제가 도발을 하니까 못견디고 나오신거죠. 크크크
도서관 책을 훔친다는 둥, 핀천이 좋다는 둥 이러면서요.
제 도발은 계속 됩니다. 흐흐흐
음... 사실 저는 문학의 진짜 위기는 신경숙의 뻘짓같은 거라고 생각 안해요.
신경숙을 내다 버린지는 오십만년 전이기때문에 별로 신경이 안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진짜로 걱정되는 것은 독자가 자꾸 줄어든다는 것이에요.
신경숙이 저렇게 대놓고 막나갔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 중에서
누구도 자기가 어디서 무언가를 배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만큼 신경숙은 약은거죠.
독자가 성하면 감히 그런 짓을 못합니다.
사실 홍차넷에 문학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무도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보세요. 헤칼트님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제 글에 호응을 해주셨잖아요.
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문학의 수호자도 아니고 왜 이리 좋은걸까...아마 헤칼트님은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2012년 정도를 기점으로 그나마 좋은 문학 블로그를 운영하던 분들이 거의 다 문을 닫았어요.
그분들과 가끔 소통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갈데가 없어요.
특히나 Eneloop님과 나눈 이야기는 몇 번을 다시 봤는지 모릅니다.
애인한테 자랑도 했어요.
애인이 제게 Eneloop님은 정말 책 많이 읽은 분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숨은 고수를 발견하게 되어 정말 좋아요.
제가 도발을 하니까 못견디고 나오신거죠. 크크크
도서관 책을 훔친다는 둥, 핀천이 좋다는 둥 이러면서요.
제 도발은 계속 됩니다. 흐흐흐
안고수비. 든든하면서도 속쓰린 명목이군요. 같은 태도를 견지하시는 분(우연하게도 유부남이군요)을 알고 있어서 확 와닿긴 합니다만, 안목이 높지 않은 저는 쓸 수도 없는 말인지라 겨우 상상만 해봅니다. 쓰지 않는 사람이 그 말을 할 때와 쓰는 사람이 그 말을 할 때, 둘 중 어느 쪽이 더 처절할지에 대해서 말이죠.
어쩌면 쓰는 입장에서는 신경숙\'조차\' 낮춰볼 수만은 없을지도 모르는데, 속시원히 말씀하시는 게 부럽기까지 합니다. 신경숙 씨를 둘러싼 잡광에 전혀 개의치않을 정도로 빼어난 것을 많이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부러움을 ... 더 보기
어쩌면 쓰는 입장에서는 신경숙\'조차\' 낮춰볼 수만은 없을지도 모르는데, 속시원히 말씀하시는 게 부럽기까지 합니다. 신경숙 씨를 둘러싼 잡광에 전혀 개의치않을 정도로 빼어난 것을 많이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부러움을 ... 더 보기
안고수비. 든든하면서도 속쓰린 명목이군요. 같은 태도를 견지하시는 분(우연하게도 유부남이군요)을 알고 있어서 확 와닿긴 합니다만, 안목이 높지 않은 저는 쓸 수도 없는 말인지라 겨우 상상만 해봅니다. 쓰지 않는 사람이 그 말을 할 때와 쓰는 사람이 그 말을 할 때, 둘 중 어느 쪽이 더 처절할지에 대해서 말이죠.
어쩌면 쓰는 입장에서는 신경숙\'조차\' 낮춰볼 수만은 없을지도 모르는데, 속시원히 말씀하시는 게 부럽기까지 합니다. 신경숙 씨를 둘러싼 잡광에 전혀 개의치않을 정도로 빼어난 것을 많이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부러움을 느끼는 한편, 어떤 한국작가들을 높게 사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일단 토마스 핀천을 찾아읽어야겠군요.
당분간 \'중성적인 제3의 눈\'에 대해 생각할 듯 싶습니다. 시선과 문학적 인터페이스를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지낸 거 같네요.
어쩌면 쓰는 입장에서는 신경숙\'조차\' 낮춰볼 수만은 없을지도 모르는데, 속시원히 말씀하시는 게 부럽기까지 합니다. 신경숙 씨를 둘러싼 잡광에 전혀 개의치않을 정도로 빼어난 것을 많이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부러움을 느끼는 한편, 어떤 한국작가들을 높게 사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일단 토마스 핀천을 찾아읽어야겠군요.
당분간 \'중성적인 제3의 눈\'에 대해 생각할 듯 싶습니다. 시선과 문학적 인터페이스를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지낸 거 같네요.
첫번째로, 당연히 쓰는 사람이 더 처절하겠지요. 어쩌면 제게 그 말을 해주셨던 분도, 저도, 그 쓰라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낮고 천한 비평의 자리에 머무르려 하는 것이려니 생각합니다. 사실은 제 애인이 등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편 하나를 탈고했고 지금은 장편 하나를 무지 어렵게 쓰고 있습니다. 당사자는 1년을 약속했는데 저는 택도 없다 했습니다. 저는 3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소설을 읽고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까다로운 진상손님처럼 식당주인의 사정이야 내 알바 아니지 하는 사람입니다만, 그에게 충고를 해주어야 하... 더 보기
첫번째로, 당연히 쓰는 사람이 더 처절하겠지요. 어쩌면 제게 그 말을 해주셨던 분도, 저도, 그 쓰라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낮고 천한 비평의 자리에 머무르려 하는 것이려니 생각합니다. 사실은 제 애인이 등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편 하나를 탈고했고 지금은 장편 하나를 무지 어렵게 쓰고 있습니다. 당사자는 1년을 약속했는데 저는 택도 없다 했습니다. 저는 3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소설을 읽고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까다로운 진상손님처럼 식당주인의 사정이야 내 알바 아니지 하는 사람입니다만, 그에게 충고를 해주어야 하는 입장이 되고 보면 많이 힘들고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창작자는 비평의 눈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어차피 비평은 창작에 비하면(가라타니 고진이나 콜린 윌슨처럼 비평이 또 더 큰 차원의 창작이 되지 못할 바에야) 아무짝에 쓸모없는 말잔치일 뿐이지요. 결국 남는 것은 작품이지 비평이 아닙니다.
두번째로, 신경숙을 둘러싼 집광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한국문학계의 집광을 하루이틀 본게 아닙니다. 빼어난 것을 많이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 취향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압니다. 그리고 제 취향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작가를 높이 치느냐 하면 단연 하일지와 이문열입니다. 두 작가에 관한 이야긴 덧글로 너무 길어질거 같아서 이름만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세번째로 \'중성적인 제3의 눈\'에 대한 부연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모더니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서술의 변화, 즉 과거에는 없던 서술자가 등장한 점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전지전능해서 소설 속의 모든 사건에 개입하며 독자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화자의 변화, 즉 \'누가 이 이야기를 하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문제는 인칭의 문제와는 약간 각도가 다릅니다. 서술자의 문제는 또한 \'이 서술자는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하는가?\'의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게 되지요. 서술자의 태도에 따라 같은 사건이 독자에게는 아주 다르게 각인되니까요. 결국 저는 현대의 소설이란 \'화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화자가 결국 소설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중성적인 제3의 시선이라 칭함은 결국 이러한 화자의 문제이며, 소설안에서 화자의 일관성, 완결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소설가는 살만 류슈디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중 한명입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
두번째로, 신경숙을 둘러싼 집광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한국문학계의 집광을 하루이틀 본게 아닙니다. 빼어난 것을 많이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 취향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압니다. 그리고 제 취향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작가를 높이 치느냐 하면 단연 하일지와 이문열입니다. 두 작가에 관한 이야긴 덧글로 너무 길어질거 같아서 이름만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세번째로 \'중성적인 제3의 눈\'에 대한 부연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모더니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서술의 변화, 즉 과거에는 없던 서술자가 등장한 점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전지전능해서 소설 속의 모든 사건에 개입하며 독자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화자의 변화, 즉 \'누가 이 이야기를 하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문제는 인칭의 문제와는 약간 각도가 다릅니다. 서술자의 문제는 또한 \'이 서술자는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하는가?\'의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게 되지요. 서술자의 태도에 따라 같은 사건이 독자에게는 아주 다르게 각인되니까요. 결국 저는 현대의 소설이란 \'화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화자가 결국 소설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중성적인 제3의 시선이라 칭함은 결국 이러한 화자의 문제이며, 소설안에서 화자의 일관성, 완결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소설가는 살만 류슈디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중 한명입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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