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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7/21 19:27:30
Name   DrCuddy
Subject   하늘에서 빗발치는 그것은 정말 '정의'인가
법대생으로 '정의'는 언제나 쉽지 않은 주제였죠. 법철학 시간 창가에 기대 나긋나긋한 교수님의 강의를 배경으로 졸았던 기억은 차치하더라도 존 롤스의 '정의론'과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교분석 하겠다며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존 롤스의 전문사회과학서적을 학교 도서관 대출연장 최대치까지 밀어놓고도 결국 마이클 샌델의 교양서적을 주로 분석하고 존 롤스의 정의론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에 대한 비교교보재로 취사분석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것도 학부시절의 이야기. 학부를 졸업하고 법과 별로 관련 없는 분야에서 일하면서 '정의'라는 단어에 대해 더이상 심각하게 생각하게 될 일은 없을거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은 그동안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의'는 의외로 다른곳에서 찾아오더라구요.

그 후로 한동안 볼일 없었던 정의가 츼근들어 눈보라사 게임을 통해 별로 곱지 않은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노란 뽀글머리 성기사란놈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꽁꽁 묶어놓고 '정의를 위해!'라며 갖가지 망치와 도검으로 명치를 때리더니 이젠 이집트에서 왔다는 파라가 '무고한 이들을 지키겠'다며 부스터를 타고 높이 솟아 '하늘에서 정의가 빗발친다!'며 무자비한 폭격을 쏟아부으며 속을 뒤집어 놓네요.
로켓을 발사하는 파라 자체가 '정의'인가, 파라에 맞아죽는 상대방의 죽음이 정의인가, 아니면 파라가 발사한 수많은 초소형 로켓 중 하나를 까면 '축! 당첨! 정의!"를 얻는걸까요? 좀 엉뚱하긴 하지만 '파라'가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봅시다.

정의에 관하여 분류도 많고 복잡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몇가지로 제한해서 이야기해볼게요.
정의는 평등, 분배 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파라가 말하는 정의란 상대방의 자유 행위에 대한 징벌적 의미의 정의라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정부나 통치세력의 구속을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freedom)와 정부나 통치세력이 구속할 경우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되는 소극적 자유(liberty)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라는 소극적 자유를 수호하는 입장에서 자의적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여 '정의'란 이름으로 로켓을 쏟아붓는다는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파라는 비행 수트를 입고 흡사 경찰과 같은 모습으로 전장을 누비며 정의를 실현하는 법 집행자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파라가 과연 '정의'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은 단죄할 수 있을까요.
게임으로 돌아와보면 멀티플레이 fps게임 속에서 파라는 오버워치 22명의 케릭터 중 하나이고 그를 조종하는 플레이어 역시 게이머 중 하나일 뿐입니다.
로켓 미사일 포화를 맞는 상대방 역시 오버워치 케릭터로 대표되는 다른 수많은 게이머 중 하나일 뿐이구요. 다만 그들이 파라와 다른 편이라는 점을 빼면.
파라 개인으로서 딱히 정의를 판단하거나 집행할만한 지위나 지식을 갖춘거 같진 않군요. 게다가 이 정의를 집행하는 기준 또한 때로는 단발 로켓 런처를 사용하다 궁극기 게이지가 꽉 찬 상태가 되면 임의적으로 수십발의 로켓을 발사하는 포화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집행의 일관성을 갖춘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도대체 파라는 하필 정의를 외치는 걸까요. 하늘을 날아다니며 뭔가 쏴대는걸 보니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치 않겠다는 세일러 문의 정통 후계자라도 자처할 셈일까요. 아니면 힘이 곧 정의라는 이데올로기라도 전파하고 싶은걸까요.

이토록 장황하게 '파라'의 '정의'에 대해 언급한 것은 하늘에서 정의가 빗발친다는 파라의 외침을 듣고 있자니 최근 온라인에서의 페미니즘과 관련한 다툼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온라인)에서 정의(항의)가 빗발친다!' 이에 붉은 글씨로 줄줄이 올라오는 상대방 처치 메시지. 그리고 뜨는 POTG에 뿌듯해 하는 게이머. 어디서 많이 본거 같은데.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난하고 항의하는 것은 파라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라 같은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리고 로켓 런처를 맞은 실제 게이머가 죽는 것도 아니고 게임에서도 케릭터가 몇 초 후 다시 살아나는 것 처럼 비난을 받은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커뮤니티를 우리가 파괴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전 결코 어느 쪽은 비난하거나 편들고 싶지 않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는 페미니즘이 받는 비판도 충분히 이유있으며 '파라'의 포화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하였으며 행위책임에 따라 SNS나 커뮤니티에 공개적으로 생각을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감하구요.
하지만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상대방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조차 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단순히 적으로 인식되어 상대에게 '정의의 포화'를 쏟아붓는게 아닌가, 법 집행자와 같은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게임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돼서 편합니다. 우리팀은 동료고 상대팀은 처치해야할 대상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르죠. 현실에서 '정의'와 그 행위에 충분한 당위성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파라'의 정의는 실제 게임 속 상대방에 대한 '묻지마 정의'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안타까운 것은 상대방이 '파라'의 지위에서 '파라'를 픽해서 마찬가지 '정의'를 쏟아붓는다면 똑같이 돌아올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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