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6/25 14:23:30
Name   켈로그김
Subject   3600마리의 닭, 360개의 엔진, 30명의 사람.

울산 제2 단조공장 앞에서 내려서
내 인생의 2배는 산 아저씨들 틈에 섞여 걷다보면 귀소본능처럼 내 자리 앞에 서게 된다.
(근데, 그 아저씨들이 지금 내 나이보다 몇 살 많네;;)
그리고 능숙하게 아반떼 엔진의 엉덩이를 뒤집어 까고 주사를 놓듯 밸브를 끼워넣는다.

이 짓을 10초에 한 번. 1시간에 360개의 엔진에 벨브를 꼽아 보내는게 내 일이다.


그러다 린번엔진 타임이 오면, 드릴로 너트를 박아넣는 일이 추가되는데,
보일듯 말듯한 린번엔진 표시를 알아채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는
주머니 가득 너트를 넣고 뛰어가서 너트를 박아넣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꼭 허벅지엔 멍이 들어있다. 꼭 새총으로 쏘지 않아도 너트는 흉기가 맞는거 같다.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일하다 보면, 1시간에 5~10분정도 컨베이어가 빌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잽싸게 휴게실로 가서 담배를 빨고, 똥오줌도 가리면 된다.

이 짓을 12시간 하는게 내 일이다.


일이 마치면, 십짱형이랑 공장 앞 식당. 혹은 아저씨들이 끼면 좀 더 으슥한 술집으로 가서 술을 한 잔 한다.
안주는 정주영.
그는 죽었지만 안주가 되어, 노래가 되어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계시다.
얼큰하게 취하면 노래를 한다.
"정주영 잡으러 재단에 갈 때엔, 한 손엔 식칼들고 한 손엔 도끼 (헤이!)"


구내식당에 일하는 누나가 참 고왔다.
밥먹으러 가서는 일하는 모습을 넋놓고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수줍게 짜증나는 표정을 짓고는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곤 했는데,
가끔은 내가 꺼졌는가 확인하러 고개를 빼꼼 내밀다가 다시 눈이 딱 마주쳤던 적이 있다.
그 후로는 보직이 변경됐는지 볼 수가 없었다.



"누나 좀 쳐다볼께"
"시선 가드"
"뚫어라 눈알광선"


-----------------------------


대한민국 2차 산업의 대명사인 현대자동차.
그 중에서도 핵심중의 핵심인 엔진조립부에서 일하던 고오-급 인력이었던 나는 지금 닭 내장을 빼고 있다.
영양사 누나를 쳐다본 죄로 부당하게 해고되고, 어쩔 수 없이 진로를 급 변경하는 바람에 찾아온 빈곤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하락은 일의 빈도의 차이로 나타난다.
엔진은 10초에 하나씩 왔는데, 닭은 1초에 한마리씩 온다.
계속 온다.. 끝없이 온다..
컨베이어는 무자비하게 돌아가고, 라인에 선 자들의 자구책으로 각자 돌아가며 2시간에 5분 쉬는게 최선이 된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어쨌든 식품을 다루기 때문에 내부를 청결히 하느라 따뜻한 수돗물이 나와서
똥까지는 무리지만 오줌은 옷에다 싸고 샤워기를 바지춤에 넣어 씻어내릴 수 있다는거다.

어쨌든, 1초에 한마리.
1시간에 3600마리의 닭의 똥꼬를 벌려서 내장을 뽑아내는게 내 일이다.

그리고 그 짓을 12시간 하는게 내 일이다.


매 주, 혹은 격주로 수요일 퇴근시간에는 근무자에게 닭을 싸게 내 놓는다.
팔 수 없는 닭들을 싸게 파는 것인데,

똥꼬가 지나치게 넓게 찢어져 배꼽까지 이어졌거나,
밟혀서 구두밑창 무늬가 찍혀있거나,
날개나 다리가 하나 없거나,
이빨자국이 있거나(?),
그런 것들이다.
나는 내가 밟았던 녀석이 반가워서 한마리 사서 자취방에서 후라이드 치킨을 해 먹었다.
그리고 그 후로 치킨은 무조건 시켜서 먹는다. Don't try this at home..


돈은 자동차공장에 비해 더 많이 줬기에 계속 일을 하고 싶었지만, 검지와 중지가 점점 아파왔다.  
결국 양 손의 손가락들이 모두 내 고추만해졌을 때.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손을 꺼내 들고 다니는 것 만으로도 공연음란맨이 된다는게 두려웠다.
친구는 그게 지금과 다를게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진실된 친구를 한 명 발견했다. 개이득.

------------------------------------------------------------

그 친구와 함께 약국을 차렸다.
그리고 그 친구는 곧 로스쿨에 갔다.

나는 자식을 유학보낸 기러기 아빠의 심정으로 성실하게 일을 했고,
어느덧 시간당 5명에서 시간당 30명으로 응대해야 할 환자의 수가 늘어났다.

가끔은 사람이 엔진으로 혹은 닭으로 보일 때가 있고,
약이 너트로, 밸브로, 혹은 모래주머니로 취급될 때가 있다.
그래도, 그 숫자의 차이만큼은 성의를 곱해서 보이고 있(을것이)다. 아마도..

홍길동 환자..
당신은 알까?
당신이 내장이 제거된 닭고기보다 120배. 밸브가 조립된 엔진보다 12배나 가치있는 고객임을 말야..
(대충 때려잡아서 말이지;;)

나도 잊지 말자.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를.
내가 지금 하는 일의 의미를.
그리고..
밥누나의 눈빛을..

----------------------------------------------------------


...그냥..
직원이 신혼여행 가고 혼자서 일하면서 허덕허덕대다가..
'이렇게 바쁘고 힘든건 참 오랜만이군 크큭..'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 보니 옛날에 비슷한 느낌으로 일했던 생각도 나고 해서
뻘소리를 투척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해요..;;

..라고 쓴 글입니다. 넵;;



11
  •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추천.
  • 파란만장하셨군요!
  • 고추의 크기가 궁금해지는 글이다.
  • 일단 믿고 추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176 오프모임3/10 늦은 5시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 22 타는저녁놀 18/02/28 4957 0
5069 일상/생각3/2 부산 모임 후기 38 밀8 17/03/04 4165 14
7291 오프모임3/31(토) 부산 봄맞이 벚꽃놀이 모집!(펑) 11 나단 18/03/27 4681 7
8908 오프모임3/4 보드게임 벙개 23 토비 19/02/27 4532 10
8917 오프모임3/4월 영화벙개 “살인마 잭의 집” 34 다람쥐 19/03/01 7054 4
10349 오프모임3/5 당산역 6:30? 20 류아 20/03/05 4980 3
13607 오프모임3/5(일) 11시 다비드 자맹 전 모임해봅니다' 6 간로 23/02/28 2083 1
10518 경제300만원 사기당할뻔한 이야기. 12 사나남편 20/04/21 4867 25
11029 육아/가정30개월 아들 이야기 21 쉬군 20/10/05 5987 46
9184 일상/생각30대 기획자. 직장인. 애 아빠의 현재 상황. 15 아재 19/05/12 5819 35
4896 일상/생각30대 남녀가 6년을 만나 40대가 되어 결혼한 이야기 (1) 27 Bergy10 17/02/17 5486 12
4898 일상/생각30대 남녀가 6년을 만나 40대가 되어 결혼한 이야기 (2) 16 Bergy10 17/02/17 5617 20
10733 도서/문학30대 남자를 위한 웹툰 추천(다음) 18 오르토모 20/07/01 6054 4
6850 오프모임30일 송년모임(취소) 21 무더니 17/12/29 3997 2
11440 일상/생각30평대 아파트 셀프 인테리어 후기 22 녹차김밥 21/02/22 4970 29
3099 창작31주차 그대. 3 헤베 16/06/22 4023 0
1976 일상/생각342,000번의 묵묵함 8 mmOmm 16/01/08 4307 0
1221 육아/가정34개월 여아의 말배우기 14 기아트윈스 15/10/10 9213 13
11356 일상/생각34살, 그 하루를 기억하며 7 사이시옷 21/01/21 3856 27
210 기타35번 메르스 의사 미스테리 45 Zel 15/06/04 11521 0
3121 일상/생각3600마리의 닭, 360개의 엔진, 30명의 사람. 2 켈로그김 16/06/25 3984 11
3146 IT/컴퓨터3D 공간에 그리는 그림 - 구글 틸트 브러시 (Tilt Brush) 6 Toby 16/06/28 10696 0
14047 일상/생각3년만의 찜질방 2 큐리스 23/07/15 1943 7
182 기타3년차 회사원의 고민과 걱정 12 블랙밀크티 15/06/02 8365 0
14011 일상/생각3대째 쓰는 만년필 ^^ 7 삶의지혜 23/07/01 2232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