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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2/25 19:43:07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연극 <터미널>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 위치한 소극장에서 연극 <터미널>을 봤습니다. '터미널'은 4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옴니버스 형식의 작품이었습니다. 터미널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모든 에피소드는 9개인데, 시간 관계상 그중 4개 혹은 5개의 이야기를 돌아가며 공연하고 있더군요. 제가 관람한 날은 '소', '내가 이미 너였을 때', '망각이 진화를 결정한다', '전하지 못한 인사'의 4개 에피소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최근 대학로의 창작극을 보면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가 주를 이루고 있는 데 반해, 이번 공연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소'의 경우 열심히 일만 하던 아버지가 소로 변하고, 역시 열심히 일하던 장남도 점점 소로 변해가고 있는 상황을 다룬 이야기였습니다. 남은 가족 중 둘째 아들과 막내딸은 소로 변한 아버지를 돈을 받고 팔아버리고, 변해가는 장남을 언제 팔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논합니다. 가족을 위해 일만하다 어느날 아침 벌레로 변해버린 후 가족에게 외면당하는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릴법한 작품이었습니다. '내가 이미 너였을 때'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떤 선택을 하든, 바뀌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습니다. '전하지 못한 인사'는 살아있는 동안 주변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는 무난한 내용이었습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극 중 배우들의 코믹 연기가 압권이었던 탓에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망각이 진화를 결정한다'는 이날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에피소드였습니다.

22세기 혹은 23세기의 어느 날, 지구행 우주선을 기다리는 달의 터미널에서 낯선 두 남녀의 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한국인임을 알게 되지요. 미래에는 죽은 사람의 기억을 메모리칩에 담아 관람하는 것이 가능한데, 여자는 그 메모리 칩을 보고 있었습니다. 여자가 보고 있던 메모리칩에 관심을 보이던 남자는 곧 그것이 비영리단체에서 무료로 배포한 것임을 알게 되자 흥미를 잃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자신이 가진 메모리칩을 권합니다. 얼마 전 죽은 연쇄살인범의 기억, 20세기 살인마들의 기억을 모아놓은 메모리칩 등 그가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기억들에 관한 물건을 소개하며 그것을 여자에게 권합니다. 그렇지만 여자는 정중히 그것을 거절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로봇 반려견의 수리를 위해 11년 만에 휴가를 내고 지구로 돌아가는 여자와 쓸데없는 감정소비와 노화가 진행되는 인간의 몸이 거추장스러워 몸의 절반을 로봇으로 교체하고 단기기억삭제장치까지 구매한 남자는 서로 많이 다릅니다. 남자는 지루함과 쓸데없는 감정소비를 싫어합니다. 그는 생태인류학자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망각이 진화를 결정한다!' 남자는 학습으로 인한 유용한 기억이 아닌 쓸데없는 감정에 대해서 쉽게 잊는 생물들이 고등생물로 발전해 왔다고 믿습니다. 생산적이지 못한 감정의 소비 - 예를 들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 는 진화의 과정에서 걸림돌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 얘기를 들은 여자는 말합니다. 그와같은 망각이 진화를 결정한다면, 자신은 진화하지 않겠다고.

서로의 생각 차이 때문인지 잠시 대화가 중단된 상황이 심심했던 남자는 여자가 보고 있었던 메모리칩에 관해 묻습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지요. '21세기 회고록 - 보통사람들의 잃어버린 삶의 초상'이란 제목의 메모리 칩을, 여자는 같이 관람하기를 권합니다. 마침 심심했던 남자는 그 권유를 받아들입니다. 그 메모리칩은 1967년에 태어난 이순화라는 여성의 기억에 관한 것입니다. 둘은 그녀의 삶을 처음부터 관람합니다. 지루한 부분을 빠르게 넘기려는 남자를 여자가 진정시켜 가면서 말이지요. 농촌에서의 평범한 어린 시절을 지나 짜장면집에서 받았던 프러포즈의 기억, 남편의 식당이 망했을 때의 어려움, 두딸을 키우며 다시 재기하는 모습과 같은 장면이 그들의 눈 앞을 지나쳐 갑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떠나는 둘째 딸과의 대화 소리가 들려옵니다. 쌈짓돈 10만원을 챙겨주는 그녀의 모습과 좋아하며 집을 나서는 딸의 목소리.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기억은 온통 바다입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새롭게 입력된 기억이나 감정 없이, 여자의 기억 속은 그저 새파랗고 어두운 바다만이 존재합니다.

메모리 칩을 모두 보고 난 후 남자는 분노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엉망으로 만든 그 메모리칩과 그 내용을 알면서도 마치 모르는 것처럼 자신에게 그것을 권한 여자에게 말이지요.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내던 남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기기억삭제장치의 버튼을 누릅니다. 그리고 여자와의 만남부터의 기억을 지워버린 남자는 다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마치 처음 본 사이인 듯이. 한국인이냐며 인사를 건네는 남자를 외면한 여자는 조용히 읊조립니다. 언젠가 당신은 후회하게 될거라고. 그리고 연극은 막을 내립니다.

연극 속에서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처럼 오늘날의 불행은 평범합니다. 수많은 매체를 통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불행이 쏟아져 나옵니다. 매체를 통해 상투적인 표현으로 가공된 불행은 그 뒤에 존재하는 사람과 슬픔을 가리고 그것을 일련의 정보로 추락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불행에 무뎌집니다. 연극 속 남자가 메모리칩을 설명하는 전단지의 내용 중 '타인의 재난을 들여다보자'라는 구절에 시큰둥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겁니다. 그러나 메모리칩 속 '이순화'라는 인간의 불행과 단독으로 대면하자, 남자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자가 자신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이겠죠. 그것은 타자가 노크도 없이 내 안에 들어와 나의 의지를 교란시키고, 내가 누리는 정적을 깨뜨린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남자가 단기기억삭제장치로 기억 자체를 소거해 버린 것은 그런 이유때문입니다. 나를 나답게, 평온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아침나절 광화문 광장을 지나칠때 흘러나오던 학생들의 마지막 음성을 떠올려봅니다. 울컥하는 눈물을 참기위해 입을 앙다물어야 했었죠. 이렇듯 불행의 단독성과 대면하게 되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든지 '지겹다'와 같은 자기기만과 회피로 일관할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현실에서는 연극 속 남자처럼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요. 타자에 대한 이 책임은 무한책임이기에 고작 자기기만이나 회피만으로 벗어나기에는 중과부적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알료샤가 말하듯이,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기에 그런 것이겠죠. 무엇보다도 불행의 단독성과 대면하는 일이야말로 사고 이후의 대책이나 보상 이전에 선재해야 하는 태도 혹은 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불행에 대해서 갖춰야할 최소한의 예의같은 것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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