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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04 12:45:48
Name   박초롱
Subject   잘 지내요?.. (2)
1편 https://kongcha.net/?b=3&n=198




살다 보면 상대성 이론을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 가끔씩 있다. 9회말 투아웃에서 외야로 날아가는 공이 떨어지는 시간은 단언컨데 다른 평범한 플라이에 비해 길다고 자신한다. 가끔은 내 속에 있는 흑염룡이 시간을 느리게 가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 어느 날 언덕을 올라가던 해병이 맹독충의 초록 껍질을 보자마자 산개했던,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의 슈퍼 플레이를 펼쳤던 그 순간 나는 시간이 무척이나 느리게 흐른다고 느꼈던 것 같다. 허나.

핸드폰이 다섯 번의 진동을 하는 그 시간은 아주 길게 느껴졌고 나는 지나치게 여유로웠던 모양이다. 아주 잠깐 갈등을 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고 생각했지만 간발의 차로 그의 발신과 나의 수신은 엇갈렸다. 민망하게도 핸드폰 액정에는 통화 시간 00:00:00이라는 메시지만 깜빡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 통화를 시도한 그 누군가가 더욱 궁금해졌다. 답문을 보내볼까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을 한다.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실례는 아닐까 하면서도 어차피 실례는 상대방이 먼저 한 것인데 뭐 어때 싶다가도 이내 풀이 죽고 소심해진다. 이래서 내가 여태 모태솔로인거지.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문자도 보내고 전화도 하는 상대에 비해 나는 너무나도 우유부단한 것이 아닌가. 순간의 자책은 분노를 낳았고 분노는 호승심을 낳았으며 그 호승심에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말았다.




#2.

술자리에서 가장 고역인 일은 남보다 늦게 취하는 일이다. 그러한 탓에 술이 세다는 것이 반드시 좋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 온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고등학문에 대한 열망? 아니.
취업을 위한 발판? 아니.
부모님의 강압? 아니.
그저 연애를 해보고 싶어서다."

아까부터 이어지는 이미 반인반견 상태인 녀석의 시시콜콜한 개드립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는 없음에도 뜻밖에 나는 정색했다.

"대학을 가도 안 생겨요. 그러니까 너도 안 생겨요. 생놈생 안놈안. 닥치고 술이나 드세요."

평소답지 않게 까칠한 말투에 내뱉고도 나조차 놀란다. 주위 사람들도 제법 놀란 눈치다.

"야, 이 새끼..... 지는 좀 생겨봤나보다?"

순간 이 발랄한 분위기의 술집에서 우리 테이블의 공기만 무거워진다. 술에 취해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그 녀석보다 그 녀석의 입을 틀어 막으며 내 눈치를 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나는 더 불편하다. 아, 오늘도 즐겁게 술마시긴 글렀구나. 알코올로 혈액을 희석시키는 건 여기까지다.

"미안. 나 먼저 일어나야겠다. 일이 있어서."

이거 놓으라며 퍼덕이는 그 녀석의 죽빵을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난 이 친구들을 다시 못 볼 것 같았다. 서로가 불편한 자리가 되면 다른 친구들과 더더욱 소원해질 터. 억지로라도 내가 괜찮다 괜찮다 하며 어울려야지 그나마 쓸쓸함이 조금은 달래질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녀석을 대신 쥐어박아 주며 붙잡는 시늉도 해주고 그나마 고맙네.

일단 술집은 나왔지만 헝클어진 마음을 조금은 달래줘야 할 것 같아 코너를 돌아 술집 화장실 옆 가로등이 조금은 덜 비치는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다소 이른 시간인데 벌써부터 토악질을 해대는 한 여자와 어떤 마음으로 그 여자의 등을 두들겨 주고 있는지 모를 한 남자에게서 눈을 떼어 주머니와 가방을 뒤적이며 라이터를 찾아보는데 꼭 이럴 때마다 라이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아마도 술집에 두고 온 모양인데 그렇다고 라이터를 편의점에서 돈 주고 사기는 늘 아깝다. 이런 젠장. 아쉬운 마음에 꺼낸 담배의 필터만 질겅 질겅 씹던 중 한 친구가 따라나와 라이터를 건낸다. 센스쟁이.

"그래도 너가 이해해라. 쟤 술취하면 원래 저러잖아."

술에 취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누군가가 먼저 저러는 게 얄미울 따름이다. 사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솔직하게 말하면 어제 이 시간 즈음부터 술에 취하고 싶었던 건 나인데, 그래서 위로받고 싶었던 건 나인데 하는 생각은 속으로만 한다. 까놓고 이야기하자니 찌질해지는 느낌에 잔소리만 들을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 재미있게 놀아라. 라이터는 내가 가지고 간다."

걸어가는 등 뒤로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하는 친구의 말은 시끌벅적한 대학가의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형형색색 번쩍이는 네온 사인 사이로 나만 홀로 잿빛인 느낌이 온몸으로 밀려온다.
이 위화감을 지우고자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미안하다 친구야, 쪽팔려서 네 앞에서 차마 눈물은 보이지 못하겠구나.

그렇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3.

꽤 오래 전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아리 여선배가 오묘한 웃음을 지으며 한 번 읽어보라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을 건내줬다. 오오 말로만 듣던 무라카미 하루키 이제 나도 대학생의 문화를 향유하는 것인가 하며 몇 날 며칠을 탐독하고선 섹스신이 있는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을 붙여서 돌려줬다. 공부를 해도 사실 이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요즘 영화 엑기스 아니 하이라이트 몇 분 몇 초하며 알려주는 것의 아날로그적 정서같은 느낌이었을까. 이 날 이후 나는 꽤 많은 선배들이 나를 만날 때마다 그 여선배가 보이던 오묘한 웃음을 짓던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선배님들 그렇다고 제가 그 책을 가지고 뭔가 다른 용도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정작 이런 변태스러운 루머의 주인공이었던 내게 가장 감명을 준 건 도저히 하루키 단편의 제목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100%의 여자 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였다. 첫 눈에 반하는 건 그냥 헤픈 거라고 생각하던 내게 쓰잘데기없는 로망을 심어준 건 뜻밖에도 섹스덕후 하루키였던 것이다. 물론 저 100% 라는 뜻에는 속궁합도 포함된 것이라며 친구들과 킬킬대기는 했지만.

그리고 4월의 어느 해맑은 봄날, 그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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