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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1/19 08:36:25
Name   범준
Subject   [조각글 4주차] 일기

4주차. 일기

사람은 짧은 시간을 살면서도 무수한 처음을 만난다. 모든 것엔 처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굳이 덧붙이면서. 그런데 내게 어떤 처음이 있었는지 어느 하나도 생각이 안났다. 아마 처음 뭘 한다는게 으레 그렇듯 미숙해서, 만족할만한 결과가 안나와줬고 그게 창피해서 기억하기가 싫었던 거다. 그런 경험이야 무수히 많고 내가 알아서 잘 까먹었을 테지만. 경험에 붙은 접미사 '첫'의 의미를 꺼내 글을 쓰려고 찬찬히 날 뜯어봤더니 몇가지가 나오긴 하더라. 첫 밥숟가락을 떴을 때 처럼 나에게 가치 있지만 이걸 기억하려는 노력이 의미가 없는 경우가 있고, 부모님께 첫 아들로서 살아온 얘기는 -글로 옮길 실력도 안되거니와- 감히 내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랴, 첫수능 따위는 그냥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기타를 배우고자 한건 내가 스스로 한 결정중 가장 잘한 것이었다. 지금은 취미가 있으면 삶이 풍족해진다느니, 악기 하나 다룰 수 있다는게 뿌듯하다느니 말을 만들어 다니지만 그 때는 결국 중학생의 유치찬란한 이유만이 있었다.

학교축제때 여고에서 밴드 누나들이 왔었거든. 좀비영화마냥 우르르 무대 앞으로 몰려든 남자무리들의 무질서에 혀를 차면서도, 몸은 현실적인 남중의 분위기에 적당히 편승해 있었으며 속으로는 나도 뛰쳐나가고 싶다며. 뭐 그런 내적갈등이 있었는데 이건 지금의 나로서도 안변한 것 같다. 도덕적,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가만히 못봐주겠고 특히 이성때문일 경우 되게 한심하게 생각하지만, 나 역시도 예쁘고 괜찮은 친구들과 친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있다는게 이따금 느껴진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남중에 갇혀버렸던 그때보단 상황이 좀 낫다는게 그나마 다행이다.

계속해서 그런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있기엔 남은 공연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무대에 다시 집중했다. 연주도 듣기 좋았지만, 보컬누나가 기타를 메고 연신 '넌 내게 반했어'라고 외쳐대는데 정말 반해버릴뻔 했다. 근데 여기서 중학교 이학년 특유의 사고방식이 발동해 '나도 여학교에서 저렇게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면 인기폭발!' 따위의 결론에 도달해버렸다. 여기엔 이제 막 여자사람을 갈구할 때가 된 사춘기 남자의 '종족보전을 위해 노력한 첫경험'이 있었다. 정말이지 소름끼치도록 오그라든다. 그럼 생길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절대 아니었다. 안생겨요...

당시 케이블 채널의 공개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며 기타로 반주를 하는 가수들이 하나둘씩 전파를 타던 때였다. 이것 또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암, 그래야 한다. 여자꼬시려고 기타배웠다고 말하고싶진 않다. 어쨌든 나는 평소 있지도 않던 추진력을 발휘해 기타학원을 등록했고 진지하게 연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가락도 아프고 할 수 있는 노래도 없어서 지루하고 힘든 시기였는데 기본기를 잘 닦아놓자는 생각에 과하게 진지해져서 연습하다보니 동기(밴드누나들이라던가)같은건 완전히 까먹었더랬다. 확실히 그땐 하루하루 실력 느는 재미로 학원다녔던 거 같다.

다행히도 지금은 초심(?)을 까먹고 음악 자체를 즐기고있다. 무작정 통기타 배우고 싶다! 에서 밴드를 하고부터는 음악도 더 잘 들리고 악기도 몇개 더 건들게 됐다. 지금도 가끔 찾아오는 내적갈등에 허무할 때가 많은데 그나마 이렇게 할 줄 아는게 있어야 자존감을 억지로 만들어 회의감을 억누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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