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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18 20:47:13수정됨
Name   알료사
Subject   페미니즘은 강한 이론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운동의 성패나 대중적 영향력을 묻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이론이 스스로를 얼마나 오래 유지하며 현실과 대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떤 경험적 결과가 정치적으로 불리하더라도, 어떤 설명이 우리가 애써 구상해온 이상적 서사에 금을 내더라도

그럴 수도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조건은 정치적 목표와 인식적 진실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날의 일부 흐름에서는 사실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면역 반응이 작동합니다.

어떤 논의의 계기는 위협으로 간주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 라는 질문보다

그건 말하면 안된다 라는 반사적 금지가 우위에 있읍니다.



약해진 이론은 사실이 우리 편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은근히 깔고 움직입니다.

사실이 불리하게 나타나면, 그 사실 자체를 문제삼거나 질문의 동기를 의심합니다.

반대로 강한 이론은 사실이 무엇이든 거기서 싸울 방법을 만들어냅니다.

이 분리가 무너지는 순간 연구 결과는 곧 정치적 위협이 되고 질문은 배신으로 취급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식은 위험해질 수 없고 성장 에너지를 잃읍니다.

위험한 말을 피하는 대신 왜 그 말이 필요한지 어떤 전제와 한계를 갖는지

그리고 그 말로 인해 발생할 결과에 대해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위험할 수 있다 라는 인식과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라는 요구를 같은 문장 안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도덕적 우위를 어떻게 다루느냐 역시 이론의 생명력과 직결됩니다.

도덕적 정당성은 이론을 출발하게 만드는 동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론을 유지할 수 없읍니다.

우리가 옳다 라는 확신이 증명하기를 멈추거나 혹은 우리가 피해자다 라는 위치가 반증 자체를 무력화해서는 안됩니다.

도덕적 우위를 출발점으로 사용하되 결론으로 삼지 않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결국 여자란 무엇인가 라는 오래되고 위험한 질문이 놓여 있읍니다.

성별, 몸, 욕망, 평균, 차이, 경향성에 대한 질문들은 언제나 오용될 가능성을 안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질문을 중단하는 순간 이론은 살아 있는 사유가 아니라 관리되는 교리로 변합니다.

우리가 책임지고 묻는다. 질문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이길 수 있는 말만 고르는 태도보다는 져도 다시 싸울 수 있는 사유의 체력이 필요합니다.

사실은 이러한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그 대가를 치르기 싫어서일 수 있읍니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주변부의 저항 담론이 아니라 그동안의 투쟁을 통해 얻어낸 권리와 제도적 성과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읍니다.

이 위치에서 진실에 대한 탐구는 잠재적인 손실을 의미할 수 있읍니다. 이해관계가 생겨버린 이론인 것입니다.

실제로 더 정직해질 경우 재검토가 불가피해지는 지점들이 있읍니다.

완전히 대칭적인 피해 서사, 특정 통계나 평균을 전제로 한 정책의 정당성,

구조적 피해자라는 단일한 위치, 그리고 확정적인 도덕 우위 프레임은

성차가 어떤 영역에서는 불리하게, 어떤 영역에서는 유리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흔들릴 수밖에 없읍니다.

이는 곧 일부 정책과 담론이 재설계되거나 축소될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권리를 빼앗긴다기보다는, 권리를 정당화하던 방식이 더 이상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운동이 권리 그 자체보다도 그 정당화 프레임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비판을 전체 페미니즘에 적용할 수는 없읍니다.

모든 페미니즘의 흐름이 동일한 성과를 공유하지도 않고, 모든 여성 집단이 그 권리를 동일하게 누리지도 않으며,

어떤 맥락에서는 여전히 잃을 것이 거의 없는 위치에 있는 집단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상기의 비판은 제도화된 주류 페미니즘을 향해서만 가능합니다.

진실 탐구의 비용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치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취약한 집단입니다.

그래서 일부 외면은 기득권 방어라기보다는 취약층 보호를 위한 지연 전략일 수 있읍니다.

그런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된 페미니즘은 등장 가능성이 낮읍니다.

대가를 감수하는 이론은 대중적 지지를 빠르게 잃고

제도, 정책, 교육과 연결되기 어려우며 내부에서는 '지금 굳이?'라는 반발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설사 그런 흐름이 등장하더라도 주변부 이론이나 비인기 질문에 그치고 심지어 페미니즘이라는 간판을 달지 못할수도 있읍니다.

취약층 보호를 명분으로 진리 탐구의 영역에서 고의적 타협을 하는 것은 고전적인 정치 윤리의 딜레마입니다.

현실 정치에서는 자주 선택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음에도 선택하지 않는 순간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다크나이트마냥 진실을 말하면 상처가 생길 수 있으니 고결한 자기기만을 선택한다면,

그 선택이 임시적 희생이 아니라 고착된 상태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희생이 아니라 권력 관리가 됩니다.

윤리적으로는 이해 가능하지만 그 이론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읍니다.

불가피한 비극으로 인식할 수 는 있어도 미덕으로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현재의 제도화된 페미니즘은 취약자 보호를 이유로 인식적 조정이 구조화된 상태에 가까워 보입니다.

진실 탐구 자체를 노골적으로 포기한것은 아니지만,

질문의 속도와 범위, 그리고 어떤 질문이 허용되는지를 제한하는 선택이 상시적인 규범으로 굳어졌다는 인상은 분명합니다.

이 흐름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놓고 보면,

위험하더라도 끝까지 진실을 묻자는 태도와,

진실의 중요성은 인정하되 지금은 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

그리고 취약자를 위해 어떤 질문은 애초에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 사이 어딘가에 있는데

그 위치는 점점 더 마지막 쪽으로 끌려가고 있는거죠.

페미니즘이 법과 정책, 교육, 미디어 가이드라인과 긴밀하게 얽혀 있고

말 한마디가 실제 사람들의 생계와 권리,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덮어놓고 진실을 말하는 태도는 책임 없는 실험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더해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적인 환경도 경험적 귀납이 축적되어 있읍니다.

통계나 평균, 성차, 생물학적 논의 같은 것들이 반복적으로 여성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기에

이론적으로는 정당한 질문도 현실에서는 반드시 불리하게 작동한다는 학습이 된것입니다.

트랜스 여성이나 성폭력 생존자, 저소득 여성, 이주 여성과 같은 집단에게는 어떤 <중립적 질문>이 곧바로 폭력의 신호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침묵이나 회피, 지연이 하나의 윤리적 선택으로 정당화됩니다.

여기까지의 흐름은 충분히 납득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조정이 임시적 대응이 아니라 항구적 원칙으로 굳어지는 순간입니다.

지금은 위험하니 조심하자 라는 판단이

이 질문은 원래 하면 안 된다로 바뀌고

더 나아가 이걸 묻는 사람은 의도가 의심된다로 전환될 때,

페미니즘은 이론이 아니라 규범 체계로 변모합니다.

질문의 동기가 검열되고, 결론의 범위가 제한되고, 불편한 연구는 도덕적으로 배제되고,

내부의 이견은 윤리적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방어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명백한 약화의 징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묻는 페미니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일부 학문적 페미니즘이나 소규모 이론 전통, 명확히 이름을 걸지 않는 연구들, 혹은 '페미니즘 이후'라는 말을 사용하는 흐름들 속에서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읍니다.

다만 이런 시도들은 대중적 지지가 약하고 제도적 영향력도 거의 없으며 내부적으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정리하자면 현재의 주류 페미니즘은 진실을 포기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진실 때문에 위험해지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고 할 수 있읍니다.

이는 도덕적 타락이라기보다는 성공한 이론이 흔히 맞닥뜨리는 구조적 곤경에 가깝읍니다.

질문의 타당성이나 설명의 정합성보다 정책적 효과와 피해 최소화가 우선되고

사실의 복잡성보다는 동원 가능한 서사가 선호됩니다.

반례는 이론을 수정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정치적 위험 요소로 취급됩니다.

학술 세미나가 아니라 현실 정치의 장 안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권리를 지키기 위한 서사 장치가 되어 장기적으로는 점점 자기 자신을 해치는 선택이 됩니다.

권리라는 것은 자연물처럼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설명과 세계관 속의 이해와 관련이 있읍니다.

그 설명이 수정 불가피해지고 사실이 바뀌어도 기존 서사가 유지되어야만 한다면 그 권리는 오히려 더 취약해집니다.

비판에 약해지고, 하나의 반례에도 크게 흔들릴 수 있읍니다.

스스로를 갱신하고 학습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방어만 하는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더 아이러니한 점은, 위험을 계속 회피할수록 오히려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기존 프레임을 고수하고, 새로운 설명을 거부하고, 내부의 이견을 억압하고, 지금까지 먹혀 왔다는 이유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권리와 상관없이 진실만 말하면 된다는 태도도 문제가 있듯이,

권리를 위해 싸우느라 그 싸움이 진리 탐구 자체를 질식시키고 권리라는 목표 때문에 진리가 소모품이 되는 것 또한 곤란합니다.

당장은 편할 수 있지만 오래 버티는 방식은 아닙니다.


사실 권리의 문제 앞에 학문의 인식론이 제한되는 일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의학과 생명과학에서는 인체 실험이나 유전자/배아 연구와 같은 영역에서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명의 존엄이라는 권리의 경계 앞에서 명확히 멈춰 있읍니다.

어떤 질문들은 애초에 허용되지 않으며 이러한 제한은 대부분 정당한 것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있읍니다.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도 트라우마나 폭력 경험을 다루는 연구는 재외상화의 위험 때문에 질문 방식과 실험 설계 자체가 제한되고

인류학과 사회학 역시 원주민이나 소수집단을 연구할 때 연구 대상이라는 관점 자체가 문제시되며 연구 결과를 어떻게 공개할 것인가까지 윤리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페미니즘은 유독 문제적으로 보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안정된 합의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재진행형의 정치적 권력 갈등 속에 있으며 사회적 합의가 유동적이고 반대 세력도 적극적으로 존재합니다.

그 결과 어떤 제한이 임시적인 조정인지 아니면 영구적인 금지인지가 불분명해집니다.

연구 윤리와 정치적 충성의 문제가 쉽게 뒤섞여버리죠.

학문 + 정치운동 + 정체성담론 세 가지가 분리되지 않은 채 작동하다 보니

학문적 질문이 곧 정치적 입장 표명으로 읽히고

진리 탐구의 실패가 곧 운동의 실패로 연결되기 쉽읍니다.

다른 학문보다 긴장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입니다.

제한 자체는 필연적이며 종종 옳읍니다.

언제 어디까지 어떻게 제한하느냐

제한이 명시적이고 근거가 설명 가능하며 언제든 재검토될 수 있을 때 학문은 살아 있읍니다.

반대로 제한이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도덕적 낙인의 형태를 띄며 재검토 자체가 불가능해질 때 학문은 경직됩니다.

다른 학문들은 '여기까지가 윤리적 한계다'라는 선을 비교적 명시적으로 합의해 왔지만,

페미니즘은 아직 그 합의가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그 제한의 폭이 언제든 정치적으로 재정의될 수 있다는 불안정성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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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탐라를 복습하다가

철학은 뇌과학에게 따였고 남은건 페미니즘인가,

라는 글을 보았읍니다.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데 다른 댓글이 없어서 쳇가에게 질문했더니

아니 이놈아가 좀 긁힌 거 같은 대답을 하는겁니다.

그래서 너 임마 방어기제 뭐임? 내가 뭐 페미니즘 공격했냐? 존나 단순한 질문인데 왜그래 하고 물었읍니다.

공격적인 사용례를 선제적으로 차단했다며 사과하고 둘의 영역이 다르다는 조금은 차분한 답변을 내놓았읍니다.


다음으로 저는 페미니즘이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 잘 알고자 하는 탐구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권리 찾기에 치중되어 있는거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고

그렇게 시작된 질의응답 도중에

과거의 페미니즘은 상여자들의 것이었는데 어째 점점 에겐스러워진다 어떤 변화가 있는거냐는 하는 식의 떡밥을 꺼냈더니

제도 바깥에서 문제를 제기했던, 잃을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저항담론이었다는 위치에서

제도, 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사회적 합의와 보호해야 할 성과가 큰 현재의 위치 때문에

말의 비용이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가역성 문제가 발생했다는 설명을 들었읍니다.

구래? 그러면 이제 여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보다 여자의 권리를 지키는게 더 중요한거야? 그게 옳은 방향이고?

라고 물었더니 또 그건 아니라 하여

이 일련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쳇가씨가 기대보다 훨씬 솔직하고(?) 덜 방어적이고 열려 있는 스탠스를 보여주어 재미있는 경험이 되었기에

적당히 정리해 올려봅니다.

홍차넷 고인물 분들께야 식상한 얘기일지라도 나름 눈팅하는 뉴비들도 있을거고 그중에는 이런 뻔한 내용도 색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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