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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7/25 21:44:34수정됨
Name   호미밭의파스꾼
Subject   취향이시겠지만 딥하게 이야기 좀 해봅시다
전 인터넷에서든 일상에서든 딥하게 이야기하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러지 못하고 있죠. 어떤 소재든, 특히 의견이 갈리는 상대와 층위를 심화하며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상대의 세계관에 닿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취향도 존중하는 마당에, 취향을 낳은 원인이 된, 성장 환경과 수많은 경험, 선택-결과의 누적이 형성한 ‘세계관’과 여기서 비롯된 가치관이라니! 당연히 존중하는 게 맞겠죠. 교양 있는 현대인이라면 종교, 정치 이야기는 일상대화에서 피해야 한다는 상식도 여기서 온 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이야길 아쉬움을 담아 하는 건, 사실 전 논쟁 끝에 제 세계관의 맹점이 밝혀지거나 나아가 부서지는 걸 별로 저어하지 않고, 되려 반겨 왔으며, 이런 태도가 저란 인간을 발전시켰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좀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나 극단적 무신론자 및 반기독교주의자였다가 범신론자가 되고, 방구석 재야 신학 연구 끝에 과정주의 신학을 독자 정립한 후(이런 우스운 설명을 덧붙이는 이유는 당연히 전공자도 아닌 제가 독자적으로 저런 신학관을 정립한 후 몇 년이 지나 첨단 신학의 갈래에 ‘과정주의 신학’이라 명명되는 흐름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ㅋㅋ) 이신론적 윤회론자 등으로 교체되는 과정은 무척 즐겁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근본적 세계관 외에도 개인의 삶이나 세상,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도 꾸준히 변하고 있고, 전 그 변화가 꽤 만족스럽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해하기 힘든 게, 현대인의 세계관 및 가치관과 그에서 비롯된 의견(사실 대부분의 경우엔 성장 환경 등 한정된 경험에서 온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호불호의 누적이 만들어낸)에 대한 수호 의지입니다. 근대 이전 인류는 가문, 종교, 민족과 같은 전통적이고 비교적 실체가 있던 가치를 신성화했죠. 현대인은 이걸 (제가 보기엔) 별다른 고민 없이 던져 버렸습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던가요? 원전인 키에르케고르보다 테드 창이 훨씬 더 재밌게 묘사한(ㅋㅋ) 현대인 특유의 불안. 저는 어쩌면 이게 숙고 없는 기존 가치+세계관의 유기에서 비롯된, 우리의 취향과 한계가 분명한 정치적 입장, 신념에 대한 과한 애착을 낳았고, 이것이 다시 이에 대한 자유로운 논의를 틀어막아, 공공선 등 근본적 가치나 민주주의 그 자체의 발명과 발전을 지지부진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라 봅니다.

Q. 공리주의가 답이 아닌 건 알겠어. 그렇다면 그 다음은?
Q. 대의제 민주주의가 자꾸 열화하는데? 이 다음은?
A. 거기부턴 본능이고 취향이야. 닥쳐줄래?

에엥? 이게 맞나요?

구시대의 가치가 안정적으로 담보하던 정체성을 버린 우리는.. 어쩌면 어떤 아이돌과 브랜드를,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정치인을 지지하는 나로서만 스스로를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살게 된 것 같습니다. 한순간 나락에 가거나 '택갈이'될 수도 있는 너무 매력적이지만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망가질 위험도 너무 큰 대상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라도 없다면, 이젠 내 정체성을 설명할 방법도 딱히 없는.. 하찮은 것을 믿게 된 현대인의 하찮은 비극?

게다가 이런 과도한 수호 의지는, 우리가 더 자유롭고 성역 없이 이야기해야 할 영역에 대한 대화와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듯 합니다. 내 생각은 물론 현재의 세상이 불완전하고 고칠 부분이 많다는 건 누구나 동의할 텐데, 내 '취향'이나 정치적 의견이 '절대 진리'가 되어 '나 자신'과 동일화되는 순간, 그게 어쩌다 형성되었는지, 맹점은 없는지,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대화는 끊기거나, 궤변이 되거나, 과격해지기 마련이더라고요.

정말 우리는 내 가치관과 신념의 갱신을 전제로 한 열린 대화와 자기반성 없이도, 더 나은 인간이 되어 더 나은 공동체와 정치체계,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때로는 그냥 "취향이고 내 삶의 맥락에선 대단히 필연적인 정치적 입장이긴 한데, 어쩌다 이런 취향과 의견을 갖게 되었는지부터 딥하게 이야기 좀 해볼까요?" 라고 말하거나 자문하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각자의 사적 신념 체계에 대한 '깊은' 사유와, 그렇게 얻은 '내 사적 신념은 변화와 발전이 가능한 것이구나?'라는 인식을 공유한 개인 간의 '깊은' 대화가 가능한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개인과 세계의 진화나 시대적 난치병에 가까운 철학과 정체(Polity)의 정체(Stagnation)를 뚫을 개복 수술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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