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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5/22 17:10:16수정됨
Name   골든햄스
File #1   20190129_112415.jpeg (444.5 KB), Download : 79
Subject   Adventure of a Lifetime


2019년 초. 무리해서라도 일본 나가사키에 놀러갔습니다. 당시 매우 싼 공항 노선이 있었던데다 항구도시라는 낭만이 있어서기도 하였지만 고학벌 아이들 특유의 ‘어디 해외여행 갔다왔어?’ 라는 특유의 인삿말에 대응할 화제를 만들어두기 위함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루 휴대폰 스크린타임이 17시간을 찍기도 했을 정도로 온몸에 고통이 심각할 때였습니다. 아파서 절뚝거렸고, 그러면서도 곳곳을 걸었습니다. 사람과 말할 때 보이는 기죽은 기색은 해외에서도 이상하게 여기더군요. 일본 숙소 주인들은 저를 희한하게 보고는 했습니다. 그럼에도 온천 탕을 골라 들어갔고, 나름 별하늘을 보았습니다.

별 것 아닌 일들. 어른들 눈과 귀에는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상처가 되어 온몸 혈관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아파트 위치를 묻는 아이들. 부모의 직업을 자랑하는 아이들. 네이버에서 부모님 이름을 검색해 보여주는 아이들. 외모로 나뉘는 계급. 공부에 대해서는 정작 ‘외우면 되지’하는 무관심한 시선들. 어느새 나만 빼고 다 갖고 있는 족보. 아버지의 학대. 그럼에도 집밖에 같이 나가면 늘 불쌍한 아버지인척 몸을 움츠리고 내 뒤를 따라 걷던 아버지. 아버지 밥은 해주냐며 혼내는 사람들. 보기 좋고 흐뭇했다고 내가 쓰지도 않은 웬 휴먼 드라마를 짓고 있는 학교 동기들. 스터디할 때 도움될 직언을 하지 않다 나중에 결과가 좋아지니 이렇게 할줄 알았는데 왜 그때는 그랬냐고 하던 친구도 생각나고. 다들 막상 연애관계로 들어가면 온갖 부모 문제로 끙끙대면서. 이런 이야기는 전혀 반영이 안 되어있는 정치 현장.

혐오 앞에서 속수무책 하나씩 무너지던 학생 공동체들. 토론 동아리를 다녔는데 갑자기 카톡으로 회장에게 왔던 외모 좀 꾸미고 어깨 좀 키우라는 소리.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아이가 자신의 과를 창피해하던 것. 서울대학교 아이들끼리 대외활동에서 만났을 때 서로 보이는 기묘한 인사하는 태도들. 마치 저 아이는 어디 남작가 아이야, 라고 하듯이 속삭대는 그 태도가 조금 무서웠던 기억. 근데 또 이걸 의식하는 티가 나는지 이상하게 강사님이 애꿎은 저를 두고 과 서열을 의식한다고 저만 갈구던 기억도 ㅋㅋ

조금만 이상한 태도가 보여도 서로 손절하고 다음부터는 인사를 안 하고. 아. 세련되게 울고 세련되게 힘들어할줄 알아야 하는 건데. 부모 사랑 받고 학창시절도 잘 보냈으면 뭔가 아우라 자체가 달랐어요. 하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무슨 말을 해도 조직에서 무시당했습니다. 한강 위에서 오리강을 타며 다들 떠들 때, 기묘하게 제 말에만 다들 아무 답을 안하던 때 느꼈던 설움. 늘 혼자 일하던 것. 교수님의 마음을 읽고 수업 목표를 통찰해내도 남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 가슴 앓이하던 기억들. 외로움에 서성거리던 도서관의, 낡은 책꽂이들이 그나마 위로가 되던 기억. 가끔 밥을 사주던 교수님들. 발견해주던 눈동자 한 번의 기억으로 또 일년을, 이년을 살아넘기고.

대외활동을 하면서 경쟁심을 살까 몰래 하고 늘 숨기던 아이들. 쟤는 자기 거만 챙겨. 쟤도 그래. 그런 애들만 같이 어울리는 학점 높은 애들 중 한가득. 서관에서 울며 공부하고. 밤을 새며 공부하고. 같이 걷다 갑자기 2차까지 남으면 B, 3차까지 남으면 A라는 소수과의 술자리를 보고 후다닥 자기가 빠지면 안 된다고 달려가던 언니.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건 왜 그리도 항상 스케이트 타듯 어려웠는지. 대체 누가 소득분위가 낮아 장학금을 타냐고. 그런 사람은 주위에 하나도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아이들. 일반고 나온 내가 제일 불쌍하고 출세한 것 같이 느껴진다는 남자아이들. 인터넷 사이트에 가득한 혐오와 음란물. 뒷이야기. 뒷이야기. 또 뒷이야기.

나는 교수가 될 거야. 심리학과란 이유로 다른 과 남자아이들이 고위 관료가 되고 이럴 때 뒤처지기가 싫어. 뚱뚱한 학회장은 그렇게 미국 유학을 갔다. 일베를 하는 오빠는 내 맨다리가 이쁘다고 테이블 밑을 보며 칭찬했고, 편입으로 들어온 오빠는 자기는 될 사람 같다며 반드시 누군가를 다스리는 자리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사업을 하고 망했습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명함이나 소개팅 얘기를 했어요. 명함 내밀 때 쪽팔리지 않게.

여자애들은 맨날 엄마, 아빠 얘길 했다. 질 좋은 깔끔한 옷을 입었고 어머니들이 헌신적이었다. 하루도 가족 얘기를 안 하는 때가 없는 애들도 있었어. 자기들이 얼마나 화목하고 행복하고 부유한지. (근데 왠지 모르게 다들 비슷한 게, 공부를 못하는 동생은 자기랑 엄마가 보기에 이해가 안 되고 음침하고 답답하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음) 재외국민 친구들은 나보고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하거나 내가 발표하기로 한 것에 허락 없이 자기 이름을 넣었다가 내가 화내니 사과하고. 서로 힙업이 됐느니 안 됐느니 다투고. 웃겼지만 그중 하나는 진심으로 상처 받아 무리를 나갔더라고요.

성추행하는 교수와 몰카 찍는 아이들. 트위터에 빠진 아이들. 이런저런 덕질에 대한 극한의 도덕주의는 들이대면서 정작 조별과제는 잠수타기 일쑤고. 갑자기 길거리에서 누가 봐도 불안장애가 있는 느낌으로 용기내어 인사를 걸어오던 친구를 인사만 받아주고 지나갔던 기억. 그때 힘들었나보다 뒤늦게 밀려오던 후회.

어느 가족이 우울증 속에 아이돌 덕질을 하는 가족 구성원을 두고 모두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던 것도 보고. 가난한 애들은 한에 사로잡혀 미쳐있고. 부잣집 애들은 붕 뜬 느낌으로 학교를 다니며 그 무엇에도 절박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활쏘기와 검도로 보내고. 가난한 사람은 벌레 같고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듣고. 부자들이 무섭다고 하는 것도 보고. 이상한 자기 증명욕에 차있던 국내 박사의 수업도 듣고 비록 sky는 못갔지만 미국 유학갔다와서 너네 교수가 됐으니 자기가 이겼다고 하던 교수도 보고. 체념한 기색의 대학 글쓰기 담당의 나이든 시간 강사들도 보고. 영어 수업 담당 외국인 교수는 항상 십자가를 들고 어설픈 한국말로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외치고 있었습니다. 성매매 업소를 단체로 간 스포츠 동아리와 거기를 저격한 그중 한명의 여자친구. 일베 애들의 박물관 테러.

군대 빼기, 교수 되기 위해 돈 바치기, 자녀 입시 스펙 만들기 정도는 일반적인 일이란 것도 차차 배워가고. 명품과 아파트 투기가 일상인 사람이 많단 것도 배워가고. 가끔은 웃긴 일도 있었어. 술에 취해 근처 여관에 자던 동아리 사람들. 낡고 후미진 꼬치집.

여행 왜 안 가. 젊음의 낭비야. 눈썹 왜 이렇게 그려.
아이들은 순 이런 얘기만 하고.
술자리는 재미없고 학문은 외로웠습니다.
계속 몸에 병이 나 아빠와 병원을 가자 의사가 눈치챈듯 딸을 그만 괴롭히라고 말했으나 아빠는 여전히 그 바보 같은 웃는 표정. 자기가 세상 제일 천사라 믿는 그 얼굴.

교수들은 갑자기 창업을 하라느니, 창의적으로 되라느니 하다가 1점 깎이면 A+을 놓치는 시험을 만들고. 질문을 하면 한숨 쉬고. 융합적 이야기를 하면 전혀 모르고. 교환학생 면접에서 학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가 비웃음을 사고. 이공계 캠퍼스 쪽에 있던 실험동물의 추모비. 흰 쥐와 초파리. 해부해봤던 양의 뇌.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비정규직들.

인스타, 페북으로 정서가 비슷한 밀도인 애들은 무어라무어라 말을 시끄럽게 떠들고 옮기는데 도무지 하나도 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어서 그냥 나가사키 골목을 걸었습니다. 애들은 이상한 연애를 했다가 깨졌다가 저격을 했다가 하고. 대자보가 붙었다가 떼어졌다가 붙여졌다가 하고. 누구는 경찰 고소도 하고.

저도 이상한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나도 존나 남들 상처줬을 거임) 로스쿨 가기 전에 나중에 무시를 안 당하려고 암벽 등반 같은 것도 하고 사진을 남겼습니다. ‘나도 이정도 할줄 아니까 건들지 마라’라는 심리였습니다.

세대가 다르면 이 모든 게 유치하고 귀여워만 보이니 … 어른들 눈에 학교는 아무 일 없는 녹음의 성지였습니다. 총장님은 가끔 잔디밭으로 걸어 내려오며 청춘의 상징 같은 아이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그 모든 사건들은 대체 언제 한국에서 얘기될까. 아마 한국은 그런 걸 영영 얘기 안 하는 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다들 사회인이 되고 엄마, 아빠가 되어있겠지요. 그것이 한국이 개인들의 상처를 다루는 방식이니까.

아.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 와중에도 여행 테마곡이라고 콜드플레이의 adventure of a lifetime 을 들었더라고요. 네덜란드와의 교역 흔적을 보며 좋아하기도 했더라고요. Turn your magic on. 그 가사를 들으며 풍경을 보고 있었더라고요.

Under this pressure, under this weight
We are diamonds taking shape
We are diamonds taking shape

그래도 청춘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이제 저는, 그림을 배우고 싶고 영상을 찍고 싶고 여행을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 됐습니다. 아이들을 모아두는 게 과연 항상 좋은 일일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튼, 우리는 그 당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 서로 한데 모여 서로를 외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가장 멀리 서있는 펭귄 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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