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4/12/08 09:20:45수정됨
Name   삼유인생
Subject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차가운 거리로 나서는 이유
아래 당근매니아님의 글을 보고, 참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이 불법계엄 내란 사태 이전까지 저도 거의 같은 생각이었죠.

1997년, 한보비리와 김현철의 전횡에 맞선 대학생들의 거리시위가 제 인생 첫 집회였습니다. 중간 중간 여러 상황이 있었고, 시시때때로 집회와 시위에 참여해 살던 '40대 진보대학생'의 전형이랄까요.

당연히 미선이효순이 사건과 촛불시위, 광우병 집회, 박근혜 탄핵 집회는 거의 대부분을 참여했지요. 그리고 박근혜 탄핵 집회 시기에는 애가 없었습니다. 자발적 딩크족이었지요.

애키우는 아빠가 주말에 어딜 갑니까? 아무리 명태균이가 어쩌고, 선거 여론조작이 어쩌고, 쪼그마한 파우치가 어쩌고 해도 '뭐 잘못 투표한 책임을 국민들도 느껴야 하고, 언론도 박살나야 한다'라는 생각에 굳이 집회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탄핵이라는 게 그리 쉽게 되지도 않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런데, 나라가 잠시 몇 시간 동안 권위주의 독재 정권으로 회귀했다가 돌아온 사건 이후에는 매일 밤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습니다. 적어도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이후에는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던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는 그냥 선진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삶이 순식간에 박살날 뻔한 경험이 주는 트라우마겠지요.

꿈에서 가끔 계엄이 펼쳐지기도 하고 늘 뒤숭숭하고 푹 잠들지 못합니다. 딸램과 평화롭게 9시쯤 잠들었다 연구소 행정실장의 새벽 1시 반 전화를 받고 깬 이후에는 계속 그렇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국격 개판나도 그냥 한국에서 살면 되고, 번듯하고 좋은 직장 다니고 연봉도 괜찮고 자산도 있습니다. 어찌저찌 30년 정도 더 살면서, 말년에는 책읽고 글이나 쓰면서 소일하면 그만입니다. 쓰고 싶은 책 주제도 많고, 방통대에서 다니고 싶은 과정도 있습니다. 그런 거 하고 살면 됩니다.

근데, 결국 딸바보한테는 딸이 문제입니다. 내 딸이 '대한민국 국민'의 국적을 갖고, 이 땅에서(외국을 다녀오든 말든) 안전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흔들린다는 것. 그걸 도저히 견딜수가 없습니다.

연구소 전망실 소속 동료와 내란 사태 직후에 점심 먹으면서 이 사태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대화를 나눴는데(저랑 동갑인 경제학 박사), '항구적 데미지'를 입기는 할 것 같다는 것에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회복력을 믿어볼 수 밖에요. 그 회복탄력성의 탄성에 0.0000x라도 도움이 되자는 심정, 어쩌면 어제 그 추운데 혼자 나가는 마음의 한 켠을 차지하던 마음의 조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마 다음 주나 다다음주는 나가기가 어려울 겁니다. 미리 잡혀 있는 일정들이 있어서요. 육아 아빠의 삶이란 게 7년전 때 처럼 주말마다 당연히 운동화 끈 묶고 핫팩 챙겨서 나갈 수 없게 만드니까요.

그래도 어떻게든 짬을 내서 나갈 겁니다.

'이 짓을 또 하게 되다니...'

그런데 뭐 저 정도면 충분히 선진민주국가 자유시장경제의 혜택을 받고 살아온 사람이고, 이는 산업화 세대의 땀과 눈물, 민주화 세대의 피의 댓가였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이건 그 다음인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안정화 임무'로 인식합니다.

어차피 근대국가 형태로 굴려온지 100년이 안되는 나라입니다. 초고속 압축 성장에 누군가는 댓가를 지불해야지요. 그나마 우리세대가 내는 비용은 그리 비싼편은 아니네요.

여담이지만, 어제 여의도 한복판에서 서 너명의 젊은 여성이 돌아다니면서 외치는 걸 들었습니다. "저희는 탄핵에 반대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지만, 제 관심은 끌었습니다. 화나지 않고 웃겼지요. 지금 늬들이 막 떠들 수 있는 그 권리 하나 만들자고 죽어간 사람들이 몇인 줄이나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다음에는 이런 생각으로 이어지더군요.

'그래 내가 늬들의 황당한 사고체계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사는 동안 만큼은 그 얼토당토 않은 사고방식이 세상을 망치지 않게 상쇄하는 숫자 1로는 살아야겠다'

당근매니아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조금만 더 고생하겠습니다.



40
  • 같이 고생합시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637 게임[LOL] T1 안웅기 COO의 제우스에 대한 공식 사과문 전문 9 Leeka 25/07/23 1448 2
15636 일상/생각아이들을 가르치기 11 골든햄스 25/07/23 1387 10
15634 오프모임펜타포트 타죽으러 가시는 분 찾습니다 23 나단 25/07/23 1929 1
15632 방송/연예아마존 반지의 제왕 시즌1을 보며, 미친 음모론자의 모험. 2 코리몬테아스 25/07/22 1457 5
15631 영화지브리애니를 이제야 처음 본 사람의 천공의 성 라퓨타 감상기 - 지브리와 닌텐도, 평양냉면 31 연구개발 25/07/22 1779 4
15630 일상/생각역시 딸내미가 최고에요~~ 10 큐리스 25/07/21 1960 26
15629 정치정청래가 당 대표가 되면 검찰개혁 4법은 어떻게 될까. 20 휴머노이드 25/07/20 2234 1
15628 게임[LOL] 7월 20일 일요일의 EWC 일정 3 발그레 아이네꼬 25/07/19 1237 1
15627 사회서구 지식인의 통제를 벗어난 다양성의 시대 3 카르스 25/07/19 1786 5
15626 게임[LOL] 7월 19일 토요일의 EWC 일정(수정) 12 발그레 아이네꼬 25/07/18 1287 0
15625 게임[LOL] 7월 18일 금요일의 EWC 일정 2 발그레 아이네꼬 25/07/18 1201 0
15624 여행상하이를 다녀오면서 17 셀레네 25/07/17 1711 12
15623 게임[LOL] 7월 17일 목요일의 EWC 일정 12 발그레 아이네꼬 25/07/17 1294 0
15622 음악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가장 빈곤한 청춘, 한로로를 위하여 6 골든햄스 25/07/16 1914 13
15621 의료/건강gpt 로 식단+운동관리 받기 중간보고 3 수퍼스플랫 25/07/16 1228 5
15620 사회동남아시아, 장애인 이동권, 그리고 한국 5 카르스 25/07/16 1712 13
15619 게임[LOL] 7월 16일 수요일의 EWC 일정 6 발그레 아이네꼬 25/07/15 1281 0
15618 과학/기술천문학 취미의 시작 - 홍차넷 8 mathematicgirl 25/07/15 1422 6
15617 IT/컴퓨터Gemini를 이용한 홍차넷 분석 with 간단한 인포그래픽 12 보리건빵 25/07/15 1722 1
15616 일상/생각왜 나는 교회가 참 어려울까 10 Broccoli 25/07/15 1382 3
15615 철학/종교복음서 소개-(1) 마가복음 part 5 길위의 맹인들 1 스톤위키 25/07/15 1011 3
15614 음악[팝송] 케샤 새 앨범 "." 김치찌개 25/07/15 961 1
15613 도서/문학『마담 보바리』에서의 '나비'의 이미지 막셀 25/07/14 1112 1
15612 철학/종교복음서 소개-(1) 마가복음 part 4 떡이냐 빵이냐 1 스톤위키 25/07/14 1069 5
15611 도서/문학뉴욕타임스 칼럼 "소설이 중요했던 시절" - chatGPT 번역 3 막셀 25/07/14 1456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