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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6/20 11:51:10
Name   골든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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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사람, 사람, 그리고 미리엘 주교



오늘날 우리의 대부분이 <장발장>이란 제목의 얇은 책은 읽어보았지만, 그 책이 실은 길고 긴 10년이 걸려 적힌 장편임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프랑스 정치의 격변기, 망명을 떠난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가엾은 사람들)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우리가 어릴 때 본 책은 이 책에서 재밌는 장면만 뽑은 엑기스에 가깝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다 읽었냐면, 그건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어릴 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자세히 읽었고, 그거로 만족하고 배가 불러 한동안 그 부분만을 되씹고 있다.

그 부분은 바로 신부의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이, 찾아온 경찰 앞에서 주교가 ‘사실 자기가 준 것이다’ 라고 말하여 용서를 받고 구원과 참회 속에 눈물을 흘리고 새 사람이 되는 부분이다.

어릴 때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무언가 와닿지 않는, 오묘한 장면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책은 사실 이 주교의 이야기를 꽤 자세히 다루고 있다. 단순히 ‘주인공을 용서해준 초반부의 조력자’ 정도로 지나가는 엑기스 판본의 내용과 달리, 책에서 위고는 이 주교의 인물됨과 가정상황, 행적 등을 자세히 묘사한다.

주교의 이름은 샤를 프랑수아 비앵브뉘 미리엘. 책은 그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별안간 교구에 부임한 그는 소박한 성미로 오히려 처음부터 온갖 의심을, 음해를 받는다. 기득권의 주류 귀족들의 속물주의를 교양있게 비꼬고, 여러 청탁과 제안을 거절하는 그를 두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의 악마성을 의심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미리엘 주교는 어째서 장발장을 용서했을까.
그 순간 무엇이 그를 움직인 걸까.
그것까지는 책에 묘사되어있지 않다. 마치 기다렸다는듯 장발장이 선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수많은 인물들의 속내는 쉽사리 묘사되지 않고 마치 무서운 것이 있으면 발바닥을 피하듯, ‘자연스럽게 길을 내준’ 것처럼 묘사되어있다.

다만 그에 대한 약간의 힌트처럼 주어진 건 이것뿐이다.
미리엘 주교는 누구보다 ‘사랑’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단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미덕 중 하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의 후일담이 다 나오고, 한명 한명이 사람으로 다뤄진단 것인데, 많이들 모르는 주교의 뒷이야기가 있다.

주교는 인생 말년에 실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주교 인생에 최고의 축복이었다.

“눈이 멀고도 사랑받는다는 것, 그것은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참으로 얻기 힘든 행복일 것이다. 주변에는 한 여자(주: 미리엘 주교와 뜻을 함께 하며 같이 산 여동생입니다), 한 처녀, 한 누이동생, 한 연인이 있다. 그는 그녀를 필요로 하며 그녀 역시 그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녀가 그에게 필요하듯 그녀에게도 그가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녀가 그의 곁을 어떻게 지키느냐를 보면 그녀의 애정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모든 시간을 내게 할애하는 것은 내가 그녀의 전부이기 때문일 거라고.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마음은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처지더라도 그녀의 마음은 알 수 있다.] 날개 파닥이는 소리 같은 그녀의 옷자락 소리, 발걸음 소리, 이야기하는 소리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신이 그런 움직임과 말, 노래의 중심임을 알고, 시시각각 자신에게 온 신경을 쓰는 그녀의 마음을 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주교는 2년 가량의 간호를 받고 행복하게 죽는다.
당시 마들렌 시의 시장이었던 장발장은, 상복을 입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분과 연이 있었나봐! 역시 품위있고 대단한 분!” 물론 그 뒤에 장발장의 행적이 드러나면 손바닥 뒤집듯 뒤집힐 평판이지만.

그러나 장발장의 이야기를 나는 미리엘 주교의 이야기로 다시 읽고 싶다. 파브롤의 가지치기꾼, 일곱 아이를 돌보느라 빵을 훔친 장발장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촛불을 켜준 건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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