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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4/03/17 10:16:26 |
Name | meson |
Subject |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9. 나가며 |
이전 편: #1 #2 #3 #4 #5 #6 #7 #8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연개소문이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당나라의 기록들은 666년 연남생의 청병을 기록하며 연개소문의 사망 기사를 덧붙였을 뿐 자세한 시점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9-1] 반면 『일본서기』는 그 유명한 유언 기록과 함께 연개소문이 664년 10월에 죽었다고 서술했지요.[9-2] 그런데 「천남생묘지명」에서는 연남생이 32세에 태막리지에 올랐다고 되어 있어[9-3] 665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했음이 암시됩니다. 일단 「천헌성묘지명」에도 연헌성이 16세일 때 연남건과 연남산 등이 재난을 일으켰다고 나와 있으므로,[9-4] 665년 중에 고구려의 내분이 시작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9-5] [9-1] 『冊府元龜』 卷986, 外臣部 征討5, 乾封 元年 6月;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高麗;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資治通鑑』 卷201, 高宗 乾封 元年 5月 조. [9-2] 『日本書紀』 卷27, 天智天皇 3年 10月 조. [9-3] 「泉男生墓誌銘」, “卅二, 加太莫離支, 摠錄軍國, 阿衡元首.” [9-4] 「泉獻誠墓誌銘」, “洎建產等兇邪, 公甫年十六時.” [9-5] 서영교, 「乾封元年(666) 封禪문제와 唐의 對고구려 정책」, 『대구사학』 120, 2015, 78-79쪽.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662년에 방효태 등을 대파한 뒤 664년의 어느 시점까지도 요서 방면의 재진출을 지휘하였으나, 이후 병환 등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9-6] 그리고 665년 자식들의 내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사망하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661~662년의 2차 고당전쟁은 연개소문이 마지막으로 치른 전쟁이었고, 이와 더불어 집권기의 기록상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당군에게 대승을 거둔 전쟁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그가 사망한 뒤 발생한 아들들의 내분으로 인해 고구려가 태산봉선으로 얻어낸 외교적 성과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9-7] [9-6] 방용철, 「연개소문의 후계구도 정립과 사망(死亡)」, 『대구사학』 131, 2018, 143쪽. [9-7]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185쪽. 빛바랜 영광 그 다음에 고구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적어도 원인과 결과에 관해서만큼은 그러한 듯합니다. 물론 3차 고당전쟁에 대한 학술적 해석은 계속해서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지만, 2차 고당전쟁을 다루는 자리에서까지 언급할 만한 내용은 단지 여기까지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연개소문의 마지막 불꽃은 그렇게 끝났고, 그가 평생에 걸쳐 진력해 온 대당항쟁과 국제교섭의 편린은 단지 사수의 싸움을 담은 한 장의 이미지로만 갈음되어 오늘날까지 회자될 뿐입니다. (정영렬 作, 「연개소문의 사수싸움」) 의의: 역사에 비추어 그러나 그 멸망기의 사관에서 한 발짝 떨어지고 나면,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 결국 2차 고당전쟁은 무엇이었을까요? ] 누구에게나 나름의 대답이 있겠지만, 여기까지 아홉 편(혹은 일곱 편)의 길고 지루한 글을 끌고 온 이상에야 이번에도 남의 말을 빌려 주장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합니다. 아래의 기록은 663년 8월, 당나라에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만연하던 시절의 간언입니다.
그리고 당고종은 여기에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황제의 이러한 고백을 읽은 뒤에 돌아보면, 우리는 연개소문의 마지막 싸움이 고구려가 수·당과 항쟁한 70년을 짊어진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최후의 승첩으로 말미암아 당고종의 조정이 혼란에 빠졌고, 제국의 군사력이 이완되었으며, 고구려의 세력권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되었다는 것은 이미 전편에서 언급하였습니다. 666년의 봉선은 이 70년 전쟁의 결과를 공인받는 장이었으며, 고구려는 그 직전까지 거의 성공할 뻔했습니다. 그것이 2차 고당전쟁을 3차 고당전쟁과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돌이켜보면 수·당대의 국제정세는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수나라의 욱일승천하던 기세가 고구려로 말미암아 꺾인 다음에 돌궐이 흥성했고, 이에 당태종은 돌궐에서 시작해 사방을 위압했죠. 훗날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실패한 뒤에는 다시 설연타를 시작으로 토번·돌궐·고구려가 당나라의 패권을 위협했고, 당고종은 다시 돌궐을 복속시켜 사방을 제압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가 재차 고구려에서 실패하자, 이번에는 거란·해·철륵에 대한 지배력이 이완되고 토번이 돌궐과 연계하며 강성해지기에 이르렀고요. 기미지배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한순간의 부침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체제였고, 고구려는 극적인 전기마다 등장해 흐름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2차 고당전쟁은 그 강렬한 저항의 절정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결론적으로 2차 고당전쟁에 대해 처음와 같이 말하는 것은 가능해 보입니다. 이 글의 처음이란 물론 글의 제목을 가리키며, 그것은 사실상 이 길고 지루한 연재를 거치기 이전과 특별히 달라진 바가 없는 평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같은 결론에 대해서도 더 안심할 수 있거나, 조금이나마 해박해질 수 있거나, 보다 적절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면 무엇에든 의미란 존재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앞선 질문에 대한 본고의 대답을 여기에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2차 고당전쟁은 승첩이다.” ] 나머지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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