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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3/15 14:57:42
Name   meson
Subject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7. 선택과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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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사정

2차 고당전쟁에서 당나라의 본래 계획은 신라군을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7-1] 그러나 당시 한반도 남부의 상황은 당나라의 예상과는 상이하게 전개되고 있었지요. 660년 9월 소정방이 철수하자 백제부흥군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백제 지역에 잔류한 1만 명의 당군은 사비성 사수에도 어려움을 겪어 신라군의 구원을 받아야 했습니다.[7-2] 백제 멸망전 당시 나당연합군의 기만술로 당진 방면에 집중되었던 백제군이 그대로 부흥운동을 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7-3]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병력을 증파하지 않았으며, 웅진도독이 사망했을 때도 새로운 웅진도독이 아닌 임시 대방주자사만을 파견하는 등 백제 문제에 소홀하였습니다.[7-4]

[7-1]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元年 6月.
[7-2] 서영교, 「倭의 百濟 援助와 蘇定方의 平壤城 撤軍」, 『대구사학』 117, 2014, 3-4쪽; 박지현, 「661~663년 신라의 백제부홍군 공격과 그 배경」, 『충청학과 충청문화』 31, 2021, 138쪽.
[7-3] 이상훈, 「나당연합군의 군사전략과 백제 멸망」, 『역사와실학』 59, 2016, 59-60쪽.
[7-4] 김병남, 「신라의 백제부흥세력 공략 과정과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28, 2018, 262쪽.


이에 신라는 주도적으로 백제부흥군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라군은 초반의 승세에도 불구하고 두량이성·주류성·고사비성 등을 함락하는 데 실패하였으며, 결국 퇴각하다가 오히려 각지에서 습격을 받기까지 하였지요.[7-5] 무열왕은 이를 패배로 평가하며 여러 장수들에게 벌을 내렸습니다.[7-6] 반면 백제부흥군은 신라군을 격퇴함으로써 남쪽 여러 성들의 호응을 얻어 세력을 확대했고요.[7-7] 또 661년 초 신라에는 전염병이 돌았으며,[7-8] 급기야 661년 6월에는 무열왕이 사망하여 신라가 백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7-9]

[7-5] 김병남, 「신라의 백제부흥세력 공략 과정과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28, 2018, 264쪽.
[7-6] 『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 太宗武烈王 8年 4月, “王以諸將敗績, 論罰有差.”
[7-7] 서영교, 「倭의 百濟 援助와 蘇定方의 平壤城 撤軍」, 『대구사학』 117, 2014, 5쪽.
[7-8] 장창은,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신라사학보』 38, 2016, 93쪽.
[7-9] 김병남, 「백제 부흥전쟁기의 옹산성 전투와 그 의미」, 『전북사학』 42, 2013, 55쪽.


당나라가 신라에 고구려 공격을 주문한 것은 바로 그 6월이었습니다.[7-10] 이를 보면 당시 당나라는 기밀 유지 등을 이유로 신라와의 사전 교감 및 협의를 경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7-11] 막 즉위한 상태였던 문무왕으로서는 우선 경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7-12] 목전의 백제부흥군을 두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도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물론 문무왕은 7월 17일에 출전할 장수 24명을 임명하고,[7-13] 8월에는 직접 시이곡정(始飴谷停, 대전 대덕)[7-14]까지 북상하는 등[7-15] 일단은 고구려를 공격할 듯한 태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북정은 그 뒤로 매우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7-10]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元年 6月.
[7-11]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6-57쪽.
[7-12]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5쪽.
[7-13] 김병남, 「신라의 백제부흥세력 공략 과정과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28, 2018, 266쪽.
[7-14] 이상훈,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주둔과 신라군의 대응」, 『역사교육논집』 57, 2015, 127쪽.
[7-15]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元年 8月.


남천주 회군과 옹산성 전투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시이곡정에 머물자 옹산성(甕山城)에 주둔한 백제부흥군이 길을 막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7-16] 실제로 옹산성에는 상당한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7-17] 이는 신라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7-18] 당시 문무왕은 사신을 보내 옹산성을 한 번 타일렀지만 실패했고, 이후 9월 25일에야 공성을 시작했습니다.[7-19] 만일 8월 초에 시이곡정에 도착했다고 한다면 거의 2달 가까이 옹산성에서 시간을 지체한 셈이지요.[7-20] 이러한 상황은 고구려 공격에 대한 신라의 미온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7-21]

[7-16] 서영교, 「倭의 百濟 援助와 蘇定方의 平壤城 撤軍」, 『대구사학』 117, 2014, 7-8쪽.
[7-17] 이상훈,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주둔과 신라군의 대응」, 『역사교육논집』 57, 2015, 133-134쪽.
[7-18]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4쪽.
[7-19]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元年 9月.
[7-20]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6-57쪽.
[7-21]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7쪽.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부흥군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할 시급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인원(劉仁願)이 이끌던 백제 지역의 당군은 웅진부성(사비성)에 주둔해 있었는데, 백제부흥군에 의해 고립된 상태였습니다.[7-22] 그런데 661년에 신라군이 출병할 때가 되면 돌연 유인원이 자유롭게 사비성을 빠져나가 남천주(南川州, 경기도 이천)[7-23]에 진을 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7-24] 이것은 백제부흥군과 당군 간 모종의 교섭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죠.[7-25] 그렇다면 신라로서는 이러한 협상 분위기를 차단하는 군사행동이 긴요했을 것입니다.[7-26]

[7-22]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 文武王 11年 答薛仁貴書.
[7-23] 김병남, 「백제 부흥전쟁기의 옹산성 전투와 그 의미」, 『전북사학』 42, 2013, 62쪽.
[7-24]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中.
[7-25] 김병남, 「백제 부흥전쟁기의 옹산성 전투와 그 의미」, 『전북사학』 42, 2013, 62-63쪽; 김병남 , 「신라의 백제부흥세력 공략 과정과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28, 2018, 265-266쪽.
[7-26] 김병남, 「백제 부흥전쟁기의 옹산성 전투와 그 의미」, 『전북사학』 42, 2013, 63쪽.


그리하여 김유신이 북상하던 도중 8월경에 남천주에서 당군과 만나자, 시이곡정에 도달해 있던 문무왕은 김유신 등을 일단 회군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7-27] 회군한 주력부대의 합류를 기다린 신라군이 9월 19일경 합군을 완료하였고, 25일부터 증강된 전력으로 옹산성을 공격하여 불과 이틀 만에 함락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7-28] 이후 신라군은 9월이 채 지나기 전에 백제부흥군의 우술성(雨述城) 역시 함락시켰으며,[7-29] 웅현성(熊峴城)까지 쌓아[7-30] 웅진부성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개통하였습니다.[7-31] 이렇게 하여 신라군은 다시 당군을 직접적으로 원조할 수 있게 되었고, 당군이 백제부흥군과 유착할 이유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요.[7-32]

[7-27] 이상훈,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주둔과 신라군의 대응」, 『역사교육논집』 57, 2015, 131쪽; 장창은,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신라사학보』 38, 2016, 96쪽.
[7-28] 이상훈,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주둔과 신라군의 대응」, 『역사교육논집』 57, 2015, 133쪽.
[7-29]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元年 9月.
[7-30]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元年 9月.
[7-31]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 文武王 11年 答薛仁貴書.
[7-32] 김병남, 「백제 부흥전쟁기의 옹산성 전투와 그 의미」, 『전북사학』 42, 2013, 64쪽.


문무왕의 대고구려전 회피

전편에서 언급한 소정방의 전언이 문무왕에게 전달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습니다.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문무왕은 앞서 문천(文泉)을 보내 소정방에게 먼저 서신을 보냈었다고 하므로,[7-33] 이때에 도착한 전언은 그에 대한 답변도 겸했을 것입니다.

[7-33]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中.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저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 만 리의 창해(滄海)를 건너 적을 토벌하고자, 해안에 배를 댄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습니다. 대왕의 군사는 도착하지 않고, 보급로[粮道] 또한 이어지지 않아, 그 위태로움이 심합니다. 왕께서 장차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我受命, 萬里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粮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
-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

이를 보자면 소정방은 신라에게 병력 지원 또는 군량 수송을 바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는 옹산성 공격 이전부터 당군의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이 이미 신라군에 찾아와 군량 수송을 요청했다고 되어 있어 주목됩니다.[7-34] 반면 신라본기에는 10월 29일에 당나라 사신이 찾아왔다는 기사 다음에 유덕민이 군량 수송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7-35] 다만 두 사료 모두 유덕민이 당고종의 명령을 전달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7-34]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 文武王 11年 答薛仁貴書.
[7-35]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元年 10月.


이러한 신라본기와 답설인귀서 간의 충돌에 대해, 답설인귀서를 신뢰하고 신라본기의 기록을 오류로 보기도 합니다.[7-36] 그러나 오히려 답설인귀서의 기록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답설인귀서는 문무왕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사료로, 신라 측이 당나라를 위해 헌신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량 수송 지연 등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7-37] 문무왕이 늘 유덕민과 상의하였다고 상황을 윤색하여 서술할 유인은 충분하지요. 실제로 다수의 연구에서는 유덕민이 10월에 칙지를 가지고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7-38]

[7-36] 김수진, 「「含資道捴管柴將軍精舍草堂之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대구사학』 140, 2020, 37쪽.
[7-37] 김수진, 「「含資道捴管柴將軍精舍草堂之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대구사학』 140, 2020, 39쪽.
[7-38] 이상훈,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국방연구』 55(3), 2012, 100쪽; 노양규, 「662년 식량수송작전을 통해 본 김유신 장군의 활동과 함의」, 『한국군사학논총』 4, 2013, 109쪽;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8쪽; 장창은,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신라사학보』 38, 2016, 102쪽;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8쪽.


그렇다면 소정방은 9월경 문무왕에게 전언을 보냄과 동시에 당고종에게도 전황을 보고하였고, 보고를 받을 즈음 계필하력군의 철수를 결정한 상태였던 당고종은 계필하력군 대신 신라군을 활용해 보급을 이어가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7-39] 이에 따라 10월 말경 당나라의 사신단이 신라에 도착하였고, 유덕민이 문무왕에게 군량 수송 칙지를 전달한 것이지요.

[7-39]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7-238쪽.


그런데 당시 문무왕은 경주로 돌아가 사신을 맞이하였습니다.[7-40] 신라는 고구려 공격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7-41] 이러한 분위기는 당나라 사신들의 행보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예컨대 사신단은 도착 직후 무열왕의 죽음을 애도해 주었으며, 문무왕에 대한 책봉 교서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7-42] 하지만 정작 문무왕의 신라왕 책봉은 사신단의 도착으로부터 약 2개월 뒤인 662년 정월에야 이루어졌지요.[7-43] 이미 사신이 도착한 상태에서 이처럼 책봉이 장기간 지연된 사례는 신라 역사를 통틀어 문무왕의 경우가 유일합니다.[7-44]

[7-40]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元年 10月.
[7-41]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3-184쪽.
[7-42]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9쪽.
[7-43]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2年 正月.
[7-44]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9쪽.


이때의 책봉 지연은 신라의 군량 수송을 실현하기 위한 당나라의 압박 수단이었을 공산이 큽니다.[7-45] 신라본기에는 662년 1월 문무왕이 책봉을 받았다는 기사 다다음에 신라군 보급부대의 출발이 기재되어 있고,[7-46] 김유신열전에는 책봉보다 앞서 12월 10일에 이미 보급부대가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7-47] 만일 12월에 보급부대가 출발했다면 당나라 사신이 이를 확인한 뒤에야 책봉 교서를 수여한 것으로,[7-48] 1월에 출발했다면 문무왕이 책봉의 반대급부로 즉각 보급부대를 파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요.[7-49] 이를 절충하면 문무왕은 12월 10일에 수송부대 파견을 결정하였고, 1월에 실제로 수송부대가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7-50]

[7-45] 이상훈,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주둔과 신라군의 대응」, 『역사교육논집』 57, 2015, 137쪽.
[7-46]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2年 正月.
[7-47]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中.
[7-48]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9쪽.
[7-49] 이상훈,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주둔과 신라군의 대응」, 『역사교육논집』 57, 2015, 136-137쪽.
[7-50]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8쪽.


이러한 신라의 태업은 당시 평양을 공격 중이던 당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7-51] 그러나 신라 입장에서는 고구려 공격에 희생하기보다는 백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실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7-52] 당시 백제부흥군은 660년 10월 이후 지속적으로 왜국의 원조를 받으며[7-53] 기세를 올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국은 백제 원조가 곧 고구려 구원이나 다름없다고 자평하였고,[7-54] 고구려 또한 왜국과 군사 정보를 교환하며 적극 협조하였지요.[7-55] 이러한 노력은 적중하였고, 신라는 고구려 공격에 사실상 불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량 수송조차 장기간 지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7-51] 서영교, 「倭의 百濟 援助와 蘇定方의 平壤城 撤軍」, 『대구사학』 117, 2014, 9쪽.
[7-52]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4쪽.
[7-53] 서영교, 「倭의 百濟 援助와 蘇定方의 平壤城 撤軍」, 『대구사학』 117, 2014, 15쪽.
[7-54] 『日本書紀』 卷27 天智天皇 元年 3月, “高麗乞救國家, 仍遣軍將, 據疏留城. 由是, 唐人不得略其南堺, 新羅不獲輸其西壘.”
[7-55] 서영교, 「倭의 百濟 援助와 蘇定方의 平壤城 撤軍」, 『대구사학』 117, 2014, 21쪽.


군량 수송: 신라의 요식행위

물론 겨울이 되어서는 문무왕이 당나라의 독촉에 타협하여 보급부대를 출동시켰으므로, 신라는 전투병의 소모는 최소화했으나 군량의 소모는 막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7-56] 김유신이 이끈 군량 수송부대는 수로의 결빙 등으로 인하여 육로를 택한 것으로 추정되며, 풍수촌 → 칠중하(七重河, 임진강) → 산양(蒜壤) → 이현(梨峴) → 장새(獐塞, 황해도 수안) → 양오(楊隩) → 평양의 동선으로 주요 거점이나 큰 성읍을 피하면서 행군하였습니다.[7-57] 이는 고구려인과의 조우를 최소화하고자 험하고 좁은 길을 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지요.[7-58]

[7-56] 이상훈,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주둔과 신라군의 대응」, 『역사교육논집』 57, 2015, 139쪽.
[7-57] 이상훈,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국방연구』 55(3), 2012, 104쪽.
[7-58]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中.


662-55-3-2012-108-114
(이상훈,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국방연구』 55(3), 2012, 108쪽; 114쪽. 참고용 지도입니다.)

그런데 이때 신라가 수송한 군량을 살펴보면 의미심장한 점이 발견됩니다. 열기열전에 의하면 군량의 규모는 4,000석의 미(米)와 22,250석의 조(租)인데,[7-59] 15만 명이 10일, 10만 명이 15일, 5만 명이 1달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으로 흔히 여겨지고 있습니다.[7-60] 그러나 이는 당군 병사가 하루에 쌀 2승(升)을 소비했다는 정보에만 근거한 추론이며,[7-61] 신라 당대의 도량형을 고려하지 않아 재고가 필요합니다.

[7-59] 『三國史記』 卷47 裂起傳.
[7-60] 이상훈,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국방연구』 55(3), 2012, 102쪽; 노양규, 「662년 식량수송작전을 통해 본 김유신 장군의 활동과 함의」, 『한국군사학논총』 4, 2013, 112-113쪽; 장창은,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신라사학보』 38, 2016, 103쪽;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88쪽.
[7-61] 이상훈,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국방연구』 55(3), 2012, 101쪽.


당나라의 1승(升)은 현대 도량형으로는 약 0.6L로 환산되며,[7-62] 신라의 1승은 중대까지 약 0.2L로 유지되었다고 여겨집니다.[7-63] 또한 신라의 양제에 대해서는 8세기 중반 무렵 작성된 「정창원 좌파리가반 부속 신라문서」에서 1석(石)이 20두(斗)임이 시사되며, 최치원이 찬술한 「숭복사비」에서는 1석이 15두임이 시사됩니다.[7-64] 이러한 양제가 계승되어 조선시대에도 15두가 평석(平石=小斛)으로, 20두가 전석(全石=大斛)으로 통용된 것[7-65]을 고려하면, 신라 시대에도 두 가지 부피체계가 함께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7-66]

[7-62] 김상보, 나영아, 「고대 한국의 도량형 고찰」, 『동아시아 식생활학회지』 4(1), 1994, 7쪽.
[7-63] 이종봉, 「韓·中·日 中世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석당논총』 73, 2019, 251-252쪽.
[7-64] 정혁수, 「文武王의 絹布 규격 조정과 통일정책」, 『신라사학보』 38, 2016, 340쪽.
[7-65] 정혁수, 「文武王의 絹布 규격 조정과 통일정책」, 『신라사학보』 38, 2016, 340쪽.
[7-66] 이종봉, 「韓·中·日 中世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석당논총』 73, 2019, 249쪽.


그렇다면 조(租)의 도정수율이 70%라고 할 때 (참고) 신라가 수송한 군량은 15,575+4,000=19,575석의 미(米)에 해당하며, 1석이 20두라고 볼 경우 10승이 1두이므로 19,575석은 3,915,000승, 783,000L로 환산됩니다. 그런데 당군 병사 1명이 1일에 미(米) 1.2L를 소모한다면, 783,000L의 쌀은 652,500명이 1일을 먹을 수 있는 양이며, 13만 명이 약 5일을 버틸 수 있는 양이지요. 또한 1석을 15두로 잡는다면, 실제로 수송된 군량은 이것의 75% 수준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는 신라가 수송한 군량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막대한 양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이 보급부대에는 9명의 장군이 참여하였으며, 당시 신라 장군 1명은 1,000~2,000명을 거느렸으므로, 보급부대의 병력은 15,000명 이상이었을 것입니다.[7-67] 이때 신라군이 1월 23일에 칠중하를 건너 고구려 영토로 들어간 것[7-68]과 2월 6일에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달한 것[7-69]을 고려하면 최소 13일치의 군량은 전달 전에 이미 소모된 셈입니다. 신라군을 15,000명으로 놓고 계산해 보면 이는 약 234,000L에 달하는데, 이동 중 손실분과 퇴각을 위한 여유분은 제외한 수치입니다.

[7-67] 이상훈,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국방연구』 55(3), 2012, 101쪽.
[7-68]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中.
[7-69]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2年 2月.


또한 당시 신라군은 2,000여 대의 수레를 동원하였으므로 이를 운용하기 위해 5,000여 명이 더 종군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7-70] 이와 더불어 답설인귀서에는 함자도총관 유덕민이 신라군과 동행하였다고 되어 있고,[7-71] 김인문열전에는 웅진부성에 주둔하던 유인원 역시 동행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7-72] 삼국유사 역시 신라군의 수효를 ‘수만’으로 전하고요.[7-73] 이를 고려한다면 김유신이 이끈 수송부대의 보급 소요는 상당했을 것이며, 이목을 피해 이동한 만큼 현지 조달을 기대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7-70] 노양규, 「662년 식량수송작전을 통해 본 김유신 장군의 활동과 함의」, 『한국군사학논총』 4, 2013, 112쪽.
[7-71]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 文武王 11年 答薛仁貴書.
[7-72] 『三國史記』 卷44 金仁問傳.
[7-73] 『三國遺事』 卷1, 紀異1 太宗春秋公.


위 사항들을 감안할 때 김유신의 수송부대는 많아야 549,000L의 쌀을 소정방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457,500명이 1일을 먹을 수 있는 양으로서 13만 명의 경우에는 약 3.5일을 부양할 수 있고, 5만 명의 경우에는 약 9일을 버틸 수 있는 군량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볼 때 13만 이상의 대군이 반년 가까이 공격하였음에도 큰 성과가 없던 평양 공성이 약 3.5일치의 군량에 힘입어 돌연 달성되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공성 도중 당군의 병력이 감소하였을 가능성은 물론 존재하나, 설령 당군을 5만 명으로 보더라도[7-74] 신라군이 수송한 군량이 충분한 양이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7-74] 이상훈,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국방연구』 55(3), 2012, 102쪽.


당군의 진퇴양난: 조정과 현장의 불통

이와 관련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군의 당시 목적이 보급품의 도착 즉시 철수하는 것이었다고 파악하기도 합니다.[7-75] 실제로 다수의 한국 측 사료에서 소정방은 군량을 전달받자 곧 철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7-76] 그러나 당군이 본래부터 철수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신라군에게 고구려 영토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위험천만한 작전을 독촉한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신라군을 기다릴 필요 없이 당군만 독자적으로 철수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7-75]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62쪽.
[7-76]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2年 2月;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 文武王 11年 答薛仁貴書;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中; 『三國遺事』 卷1, 紀異1 太宗春秋公.


물론 당군이 철수를 준비하고 안전하게 퇴각하기 위해서는 군량을 전달받아 원기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7-77] 그러나 자치통감에 따르면 소정방은 2월 18일 이후에야 실제로 철군하였습니다.[7-78] 신라군이 2월 6일에 군량을 전달하였으므로, 이로부터 12일 뒤는 신라군이 전달한 군량이 모두 소진되고도 며칠이 더 흐른 시점입니다. 앞서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당군의 경우에는 10만여 명의 철군에 단 8일가량만 소요되었고요.[7-79] 따라서 당군의 철군 작업이 2월 6일부로 개시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군량을 수령할 당시에는 퇴각이 결정되지 않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7-77]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60쪽.
[7-78]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龍朔 2年 2月 조.
[7-79]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92쪽.


실제로 방효태는 전사 직전에도 다음과 같이 전쟁 수행 의지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 어떤 사람[或]이 포위를 뚫고 유백영(柳伯英)・조계숙(曹繼叔)의 진영으로 갈 것을 권하자, 방효태[孝泰]가 말하였다. “내가 양대(兩代)에 걸쳐 나라를 섬기며 지나친 은혜를 입었으니, 고려(高麗)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돌아가지 않을 것인데, 유백영[伯英] 등이 어찌하여 반드시[何必] 나를 구하겠는가. 또 내가 거느리던 향리(鄕里)의 자제 5,000여 인이 이제 모두 죽어 없어졌는데, 어찌 내 한 몸만 스스로 살기를 구하겠는가.” 적이 안으로 들이닥쳐 공격하자, 죽은 자가 수만 명[累萬]이었고, (방효태는)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꽂혀, 마침내 그 아들 13명과 함께 죽었다.
或勸突圍就劉伯英・曹繼叔之營. 孝泰曰, “我伏事國家兩代, 過蒙恩遇, 高麗不滅, 吾必不還, 伯英等何必救我. 又我將鄕里子弟五千餘人, 今並死盡, 豈一身自求生邪.” 賊內薄攻之, 死者累萬, 箭如蝟毛, 遂與其子一十三人皆死之.
- 『책부원구』 권373, 장수부34 -

위 사료에 따르면 방효태는 죽기 직전에도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만일 당군 내부에서 이미 철수가 확정되어 있었거나 당나라 조정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왔더라면 이러한 발언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착안해 반대로 생각해 보면, 당군의 퇴각은 앞서 3개 도행군의 회군과 마찬가지로 당고종의 명령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평양성 함락이라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퇴각하는 것은 곧 패배를 시인하는 행위이며, 막대한 부담이 따랐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645년에는 당태종이 직접 철군을 결정했으므로 휘하 장군들의 부담이 덜했겠지만, 662년의 당고종이 이러한 결정을 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죠. 이런 상황에서는 전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임아상, 소정방, 방효태 등이 자의적으로 철군을 단행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러한 추론을 인정할 수 있다면, 당군은 2월 6일에 군량을 수령한 이후에도 얼마간 전투를 이어가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 당군은 실제로 평양성을 함락하기에는 군세의 부족과 사기 저하가 역력했습니다.[7-80] 아마도 12월에 대공세가 실패한 이후로는 당군 지휘부도 승전이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군 장수들은 이러한 실상을 솔직히 보고하기를 주저한 것으로 추정되며, 방효태의 경우에는 조정의 요인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 승전보를 유포하기까지 하였습니다.[7-81]

[7-80]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61쪽.
[7-81] 『新唐書』 卷223上, 列傳148上 姦臣上 許敬宗.


그러므로 당고종은 10월에 수립한 작전 계획을 유지하였고, 당나라 사신은 1월까지 문무왕을 압박하여 결국 신라군 보급부대를 출발시켰습니다. 그러나 평양 현지의 장군들은 이미 신라군 보급부대가 전세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굳이 김유신 등과 합세하는 대신 신라군에게 신속히 돌아가라고 권고한 것[7-82]으로 보입니다. 또한 신라군이 수송한 군량의 양을 고려하면, 신라 측 역시 평양의 전황을 감지하고 무의미한 군량 소모를 최소화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답설인귀서에는 당시 신라군이 한파로 인해 군량 전달에 실패했다는 주장이 기재되어 있는데,[7-83] 이는 운송한 군량 자체가 소량이었던 것을 변명하기 위한 수사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7-82] 『三國遺事』 卷1, 紀異1 太宗春秋公.
[7-83]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 文武王 11年 答薛仁貴書.


고구려군의 공세: 소정방 퇴각의 이유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때였습니다. 비록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군이 1월에 옥저도행군 등을 격파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7-84] 이는 1월에 누방도행군을 격파했다는 전승으로 인해 서술상 혼란이 일어난 결과로 생각됩니다. 정명진군의 궤멸로 운신의 폭이 넓어진 요동의 고구려군이 이후 남하하였고, 평양의 고구려군 또한 이에 호응하였다고 볼 때, 고구려의 공세는 2월에 이루어졌을 공산이 큽니다.[7-85]

[7-84] 『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寶藏王 21年 正月.
[7-85]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17쪽.


2-661-662-17-2023-165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65쪽. 참고용 지도입니다.)

이렇게 역공을 시작한 고구려군은 우선 내성 방면을 노리던 패강도행군부터 공격해 붕괴시켰고,[7-86] 이때의 피해로 당군의 최고 사령관 임아상이 14일 군중에서 사망하였습니다.[7-87] 당시 패강도행군은 병입고황(病入膏肓)의 상태에 빠져[7-88] 군사적인 여력을 상실했으며, 유백영과 조계숙 등은 임아상의 사망 이후 패잔병만 간신히 수습한 것으로 여겨집니다.[7-89]

[7-86]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64-165쪽.
[7-87]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310쪽.
[7-88] 「任绪墓誌」, “第二子雅相 … 頃以遼隧尚梗, 三韓未清, 應受脤之隆, 當出閫之重. 而廟謀未發, 膏肓已兆. 兩兒落寐, 方漸彌留, 遠志屈於頹齡.”
[7-89]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98쪽.


승리를 거둔 연개소문은 다음 순서로 2월 18일 옥저도행군까지 공격하였습니다.[7-90] 고구려군은 우선 방효태군의 사수 방어선을 돌파하여 사수 일대의 수군 5,000여 명을 섬멸한 다음, 봉화산 일대로 물러난 방효태를 재차 공격하여 남은 옥저도행군까지 전멸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7-91] 이로써 임아상에 이어 방효태까지 4일 만에 전사하자, 소정방군 역시 전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7-92]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후환이 두렵더라도 일단 철군을 단행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마침 2월 18일 이후 평양에는 큰 눈이 내렸고,[7-93] 소정방은 기상 악화를 틈타 유백영·조계숙 등 살아남은 당군을 수습하여 수로로 퇴각하였습니다.[7-94]

[7-90]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龍朔 2年 2月 조.
[7-91]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64-165쪽.
[7-92]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00쪽.
[7-93]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90쪽.
[7-94]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65쪽.


김유신의 철수와 임진강 전투

한편 평양 근교까지 도달했었던 김유신군 역시 2월에 회군하였습니다.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달한 직후인 2월 6일 또는 7일에[7-95] 당군의 권고에 따라 철군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유신은 소를 이용한 기만술로 신라군의 위치를 속인 다음 밤중에 몰래 행군하여 고구려군을 피해 남하하였습니다.[7-96]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를 추격하여 임진강에서 신라군을 따라잡았고,[7-97] 신라의 후군(後軍)이 살획당했지요.[7-98] 이에 김유신은 쇠뇌를 쏘아 고구려군을 격퇴한 뒤,[7-99] 다음날 반격을 가해[7-100] 소형(小兄) 아달혜(阿逹兮) 등[7-101] 5천여 명을 사로잡고 1만여 급을 베었다고 합니다.[7-102]

[7-95]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08쪽.
[7-96]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中.
[7-97]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 文武王 11年 答薛仁貴書.
[7-98] 『三國遺事』 卷1, 紀異1 太宗春秋公.
[7-99]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中.
[7-100] 『三國遺事』 卷1, 紀異1 太宗春秋公.
[7-101]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2年 2月.
[7-102] 『三國史記』 卷44 金仁問傳.


662-55-3-2012-117
(이상훈,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국방연구』 55(3), 2012, 117쪽. 참고용 지도입니다.)

이때 고구려의 주력군은 2월 18일까지 평양에 있었으므로, 신라군을 추격한 병력은 주력군에서 차출된 일부 경기병 부대가 황해도 지방군에 더해진 구성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7-103] 반면 신라군은 이미 임진강을 건너 신라 영토로 들어온 뒤에 고구려군과 일전을 벌였으므로, 국경 일대에 배치된 병력과 합세하여 역공을 가함으로써 고구려군의 허를 찔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7-104] 그렇다면 신라군의 전과에 대한 과장 논란[7-105]과는 별개로 신라가 큰 승리를 거둔 것 자체는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7-106]

[7-103]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10-111쪽.
[7-104] 노양규, 「662년 식량수송작전을 통해 본 김유신 장군의 활동과 함의」, 『한국군사학논총』 4, 2013, 117쪽.
[7-105]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3쪽.
[7-106] 노양규, 「662년 식량수송작전을 통해 본 김유신 장군의 활동과 함의」, 『한국군사학논총』 4, 2013, 117쪽;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15쪽.


이렇게 하여 임진강에서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661~662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전쟁 종반부에 고구려는 평양성 앞의 당군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고,[7-107] 신라는 개전 당시부터 그러했듯이 자국의 피해 최소화를 시종일관 추구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편 행동의 폭이 가장 경직되어 있던 당군은 결국 별 성과 없이 패퇴하고 말았지요.[7-108]

[7-107]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16쪽.
[7-108] 『舊唐書』 卷199, 列傳149 東夷 高麗, “宗嗣位, 又命兵部尙書任雅相·左武衛大將軍蘇定方·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等前後討之, 皆無大功而還.


고구려와 신라는 각자 중시하는 바를 선택했고, 전력을 집중하여 이를 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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